{{작가 정보
| 이름 = 유진오
| 원어이름 = 兪鎭午
| 그림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e/ec/%EC%9C%A0%EC%A7%84%EC%98%A4.jpg/270px-%EC%9C%A0%EC%A7%84%EC%98%A4.jpg
| 크기 = 200px
| 그림설명 = 1942년 1월 15일자 [[매일신보]]에 유진오 박사.
| 출생일 = [[1906년]] [[5월 13일]]
| 출생지 = {{국기나라|대한제국}} [[한성부]]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87|8|30|1906|5|13}}
| 사망지 = {{국기나라|대한민국}} [[부산광역시]]
| 직업 = 작가, 교육인, 법조인, 정치인
| 장르 = 소설, 문학, 법률,정치
| 소속 = 前 [[고려대학교]] 총장
[[신민당]] 총재,헌법기초위원회 위원,초대 [[법제처장]], [[한일회담]] 대표, [[국정자문회의]] 위원,[[국토통일원]] 고문
| 배우자 = 성진순(사별)
박복례(사별)
이용재(삼혼)
| 친척 = [[이명래]](장인), [[한홍구]](외손자)
| 학력 = [[경성제국대학]] [[법학]] [[학사]]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세례명]] : 토마)
| 호 = 현민(玄民)
}}
'''유진오'''(兪鎭午, [[1906년]] [[5월 13일]] ~ [[1987년]] [[8월 30일]])는 [[일제시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의 [[소설가]], [[법학자]], 교육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기계 유씨|기계]](杞溪)이고 호(號)는 현민(玄民)이며 [[한성부]]에서 출생하였다. [[일제시대]] 때에는 [[보성전문학교]]의 교수로 지냈고 [[고려대학교]]의 창립 초기 멤버이며, [[고려대학교]]의 총장을 지냈다.
[[카프]]가 민중문제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불참하였으며 경성제대에 결성되었던 경제연구회라는 마르크스주의 연구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친일 사회주의 좌파 문학인으로 활동했으나 [[태평양 전쟁]] 이후 친일 칼럼, 논설, 친일 어용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에 참여하여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제헌 헌법]]을 입안하였으며, 정치 활동으로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 중 [[민국당]]과 [[민주당]]에 참여하였으며, [[1959년]] [[장택상]] 등과 함께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동참했다. 그 뒤 [[윤보선]]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 계열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언론, 법률 활동 외에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기간 중 야당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신민당]]총재를 지냈으며 1969년 [[3선개헌]]이 통과되자 충격을 받고 당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났으며 [[박정희정부]]하에서는 줄곧 야당지도자로 정부 비판에 앞장섰다. 그러나 [[제5공화국]] 출범 이후 [[국정자문회의]]위원과 [[국토통일원]]고문을 지내면서 비판을 받았다.
== 생애 ==
=== 생애 초반 ===
==== 출생과 소년기 ====
현민 유진오는 [[1906년]] [[5월 13일]] [[한성부]]에서 궁내부제도국 참사관을 지낸 유치형(兪致衡)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기계이다. [[1914년]] [[경성부|경성]]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했다. [[1919년]]에 입학하여 [[1924년]] 졸업했다. [[1919년]] [[10월]]에 성진순과 결혼하였다.
같은 해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 예비시험 격으로 [[일본]] 학생과 [[조선]] 학생이 공동으로 치른 '제1회 대학예과 고등학교 입학 모의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친일인명사전 2 (민족문제연구소, 2009) 621]
==== 학창 시절 ====
같은 해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예과로 입학한다. 입학 후 경성제국대학의 조선인학생 모임인 ‘문우회’를 조직하고 회보 ‘문우’를 발간했다. 성인이 된 뒤 아호를 현민(玄民)이라 하였다.
[[1926년]] 3월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마치고 법문학부 법과에서 수강했고 그해 4월 이후부터 [[1931년]]까지 경성제국대학 내 좌익 성향의 학내 모임인 경제연구회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이때 일제로부터 불령선인으로 감시당했으나 무사히 학교를 마치고 [[1929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1926년 그는 부인 성씨가 별세하자 1928년에 박복례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박복례 역시 사망하여 이명래의 딸 이용재와 재혼한다. [[1929년]] [[4월]]부터 [[1933년]] [[3월]]까지 모교인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수로 있으면서 [[경성제국대학|경성제대]] 예과에 강사로 나갔다.
=== 일제 강점기 활동 ===
==== 작가 생활과 사회 활동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4/49/Korea_University_Main_Hall.jpg/300px-Korea_University_Main_Hall.jpg
고려대학교 건물
[[1927년]] 5월에는 단편소설 ‘스리’를 [[조선지광]]에 발표하면서 작가로 등단했다. 1929년에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조선인 졸업생 모임인 ‘낙산구락부’를 조직하여 학술잡지 ‘신흉’을 발간했다.
[[1929년]] [[4월]]부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수로 재직하다가 [[1931년]] 법철학연구실 조수로 옮긴 뒤, 겸임 예과 교수로 예과에서 법학통론을 강의하면서 강사생활을 시작했다.[친일인명사전 2 (민족문제연구소, 2009) 622] 같은 해 9월 무렵부터 [[이강국]], [[최용달]], [[박문규]], [[김광진 (경제학자)|김광진]] 등과 함께 경제연구회의 주요구성원을 중심으로 한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설립하여 활동했다.
이듬해 1932년에는 [[김성수 (1891년)|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자 교수로 초빙되어 재직,[인촌김성수전(재단법인 인촌기념회 저, 인촌기념회 발행, 1976) 545페이지] 보성전문학교 교수 및 법과 과장을 역임하였다. 그 이후 유진오는 법학 연구를 중단하고 창작 활동에 몰두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1930년]] 이지휘란 필명으로 당시 운동의 상황과 문제점을 정리한 '년간조선사회운동개관'을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같은 해 [[만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후 마적, 귀향, 송군남매와 나 등의 동반자적 경향이 짙은 작품을 발표했다. 당시 카프(KAPF)에서 가입 권고를 받았으나 그는 카프가 조선의 식민지적 현실을 등한시한다고 판단하고 거리를 두었다.
[[1932년]] [[5월]]을 전후해 근로 대중의 이익을 위한 연극을 표방하는 극단 메가폰을 결성했다. [[1932년]] [[김성수 (1891년)|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면서 법학과 강사로 출강했고, 이후 국제법이나 국제정치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 전문학교 교수 활동 ====
[[1933년]] [[4월]]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전임강사에 임용되었고, [[10월]]부터 [[동아일보]]의 객원기자로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1936년]] 원산청년회에서 개최한 강연회에서 강연한 내용이 반일적 사상을 담고 있다는 문제가 되어 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1936년]] [[4월]] [[보성전문학교]] 정교수로 임용되었다.
[[1937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으며, [[1939년]] [[보성전문학교]] 법과 과장 직을 맡았다. [[1939년]] 법학 연구를 중단하고 창작활동에 몰두했다. 이 해 '유진오단편집'이 간행되었다.
==== 친일 행적 의혹 ====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친일 협력의 길로 걷게 된다. [[1939년]] 7월호 ‘삼천리’ 잡지에 중일 전쟁을 적극 지지하는 내용의 사설을 기고한것을 시작으로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각종 총독부 어용단체에 가입하면서 활동하였고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와 선전부 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한다.
[[1939년]] [[7월]]호 삼천지 에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하여 대륙의 전선에 분전하는 용사들을 위문하기 위하여 금차 도지(渡支)하는 제위의 건강을 빌며 이 중대한 사명을 무사히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전쟁이란 실로 인간의 가장 심오한 금선(琴線)을 울리는 가장 절실한 인간 활동이라 금차의 제위의 전선 위문은 반드시 위대한 문학적 성과로 나타날 것을 아울러 기대합니다."라며 '북지황군(北支皇軍) 위문단'을 격려하는 '신질서 건설과 문학'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에 가담하였다.
39년 [[10월]] 조선실업구락부에 가입하였다. 11월 3일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외곽지지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경성에서 결성될 때, 발기인과 간사로 참여했고, 조선문인협회 회원이 되었다. [[11월 8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전선(戰線)에 위문문·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관, 진행하였다.
[[12월]] 조선문인협회의 간사로서 사업부 조직의 임무를 맡았다.
[[1940년]] [[2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평양문예대회에서 '조선문학과 요어 문제'라는 연제로 대중강연을 펼쳤다. [[9월]] [[만주국]] 민생부(民生部)가 주최한 만주문화건설공작강연회(滿州文化建設工作講演會)에서 '조선문학과 만주 문학-특히 현대 조선의 입장으로부터'라는 연재로 만주국 순회강연을 했다. [[10월 12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문사부대(文士部隊)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에 참여한 뒤 '삼천리' 12월호에 '일사불란의 그 훈련'이라는 짧은 산문을 통해 "지원병훈련소를 견학하고 그 질서와 규율에 다시금 탄복하였다. 공교로이 그날 오후 나는 불가피한 사무가 있어 훈련의 실상은 견학하지 못하였으나 숙사 학교 식사 등의 실경을 보았을 때 그 질서의 정연함에 탄복하였다. 그 일사불란의 훈련 속에서 동아신질서 건설의 굳센 힘도 우러나올 것으로 믿는다." 라는 소감을 밝혔다. [[1940년]] [[11월]]부터 [[12월]]까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순회 시국강연회의 연사로도 평안도에 파견되어 '신체제와 국어보급'이라는 연제로 강연했다.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와 선전부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40년]] [[11월 25일]] 김동환, 박영희 등과 함께 시국강연회에 참가한다.
{{인용문|어느덧 성전(聖戰) 만 3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 먼 대륙의 오지에서 모든 고통과 맞서서 싸우며 혁혁한 무훈을 세운 황군 장병 여러분에게 삼가 감사와 경의를 바치고자 합니다. 돌이켜보면, 이 3년간 사변은 당초 우리들이 상상치도 못했던 웅대한 규모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변은 지금 단순히 장(將) 정권의 타도라고 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동아 신질서의 건설이라는 적극적인 것을 목표로 삼게 되었습니다.
사변을 단지 소극적인 것으로, 군사적인 것으로 한정시켜 버린다면 저희 문화인은 단지 일 국민으로서 시국에 협력하는 데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변을 적극적인 것으로까지 발전시켜 보면 저희들은 단지 일 국민으로서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실로 문화인으로서의 막중한 책무도 지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릇 동아 신질서의 건설은 또한 동아 신문화의 건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여 동아 신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어떻게 하여 동양의 오랜 전통을 새로운 규모 아래 건설해 낼 것인가. 대단히 막막하고 곤란한 과제이긴 하지만 지금 저희들 조선에서 자란 사람은 조선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또한 이중으로 과제를 짊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전 3주년을 맞이하면서, 저는 저희 문화인들의 책무가 크고 막중하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됩니다.[《삼천리》, 1940년 7월호, 일문, 《친일문학선집》2]}}
[[1941년]] [[2월]] 제1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좌담회에참석하여 '문화익찬의 반도체제- 금후 문화부 활동을 중심하여'라는 주제로 토론했다.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용산 호국신사 어조영지 근로봉사(護國神社御造營地)에 참여했다. [[1941년]] [[8월]] 조선문인협회 상무간사를 맡았다.
그 밖에 [[1941년]]부터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각종 시국 강연에 참석하여 시국 연설을 하는 등 여러편의 친일 성향의 논조 사설 글들을 게재해 활동한다.
1941년 유진오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위촉되었고, 같은 해 8월 12일 열린 문인협회 간부회의에서는 김동환, 박영희 등과 함께 상무간사로 위촉되었다. 이때 그는 친일잡지 {삼천리} 등에 친일 논문을 실었고[삼천리 지 1940년 12월호, [일사불란의 그 훈련]], 학병 지원의 권유와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역설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명에는 당시 친일문학자들이 만든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단체가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결합되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년에 결성되었는데 당시 조선 문학자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최린(崔鱗), 김동환 계열의 임전대책협의회와 윤치호(尹致昊) 계열의 흥아보국단이 통합한 것이었다.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은 이름 그대로 조선에서 일본의 대동아전쟁을 위한 병력의 보충 등 선전·선동의 역할을 나서서 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국민의용대의 조직 및 활동에 일치시키기 위해 해산될 대까지 학병의 권유와 내선일체를 열심히 외쳤다. 유진오는 총력연맹 문화부에서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결전소설 공모를 심사하였다.
[[1942년]] 이후 문단의 중요 행사로 매년 1회씩 3회에 걸쳐서 개최된 '대동아문학자 대회'가 개최되자 대표로 참여했다. 이것은 대동아 문예부흥을 목표로 내걸었던 일본의 전시문화 공세의 한 종류로, 여기에 대표로 참가한 사람 중에 두 번을 연이어 참석한 사람은 단 세 사람이었는데, 이광수와 쓰다, 그리고 유진오였다.
{{인용문2|동아문예부흥의 역사적 거보, 즉 문화상의 대동아전쟁은 이리하여 무력상의 대동아전쟁보다 훨씬 앞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벌써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면 동양은 어떻게 자신의 새 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동아문예부흥의 구체적 형태는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 새 동양의 수립, 동아문예부흥의 출발이 동양적 전통의 회고로부터 출발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동양과 서양], {매일신보}, 1943년 1월 9일∼13일자]}}
==== 일제 강점기 후반 ====
태평양전쟁이 진행되면서 일제는 병력 총동원을 위한 조치를 4회나 실시하였다. 1938년 2월 23일 공포, 4월 3일 시행된 육군특별지원병제, 1943년 5월 11일 내각 결정에 의해서 10월 1일 훈련소에 입소한 해군특별지원병제, 1943년 10월 1일 공포, 1944년 1월 20일 시행된 학도병 징집, 그리고 1944년 4월 1일에 징병 검사가 실시된 징병제도의 시행이었다. 그는 이러한 조치를 '성려요 성은'이라고 하였다.
조선내 친일문학계는 이에 부응하여 지원병, 징병 제도 등의 병력동원을 적극 권장하는 노래가사 만들기 등을 자발적으로 한다. 이광수는 가요 <지원병장행가>를 작사했고, 주요한은 시 <첫 피>로써 지원병의 죽음을 예찬하였다. 유진오는 [[1943년]] [[11월]] 한 달 동안 《매일신보》에 12편의 되는 학병 관계 사설을 기고했다. [[1943년]] [[11월 18일]] 유진오의 '병역은 힘이다[매일신보 1943년 11월 18일자]'는 매일신보 [[11월 18일]]자 기사 제1면에 헤드라인으로 게시되었다.
[[1944년]] [[8월 13일]] 전국 항복 대강연회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 강연에서 그는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이 눈앞에 있던 그 시기에 유진오는 일본의 '영원한 승리'를 다짐하며 '대화일치(大和一致)'를 강조하였다.
{{인용문2|그리하여 전쟁의 귀추는 벌써 뚜렷해졌습니다. 침략자와 자기 방위자, 부정자와 정의자, 세계 제패의 야망을 쫓는 자와 인류상애(人類相愛)의 이상에 불타는 자의, 한마디로 말하면 악마와 신의 싸움인 것입니다. 정의는 태양처럼, 사악은 먹구름처럼, 구름은 마침내 태양의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의로워 정의자가 일어설 때는 그 승리는 저절로 명백한 것입니다. …… 하여튼 싸움은 이미 우리의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필승에의 신념은 결코 헛된 맹신이 아닙니다. 실로 이와 같은 필승의 이(理)를 자각하고, '대화일치', 서로 굳세게 최후의 단계를 돌파하고 나아가야겠습니다.[일문, '신시대', 1944년 9월호, 《친일문학선집》2]}}
패전 직전 [[1945년]]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가 출범하자 유진오는 언론보국회의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그 뒤 조선언론보국회가 주최한 [[1945년]] [[6월 15일]] 언론총진격 대강연회에 참여한다.
=== 광복 이후 ===
[[1945년]] 광복 직후 잠시 [[경성제국대학|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를 겸하였으나 사퇴하였다. 해방 이후 언론에 헌법과 관련된 글을 발표함으로써 해방과 함께 필연적으로 제기될 헌법 문제에 대해, 특히 자신의 지위를 충분히 이용하여 입지를 마련해 두고자 노력하였다.
[[1945년]] [[8월 16일]] 새벽, 문학단체에 동참하라는 [[임화]]의 부탁을 받고 문인들의 회합에 나갔다가 소설가 [[이태준]]의 항의로 쫓겨났다. 이후 작가의 길을 접고 교육가, 법학자, 관료, 그리고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보성전문학교 교수와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를 겸직하고 [[1945년]] 11월 학무국 산하 교육심의회의 고등교육분과위원회에서 대학령,학위령 등 향후 대학 교육의 근간이 되는 법령의 초안을 작성했다. [[1946년]] 변호사 시험위원에 위촉되었고 그 해 9월에는 [[고려대학교]] 교수 겸 정법대학장이 되었다.
[[9월]] [[조선인민공화국]]이 조직하자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를 요청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선인민공화국]]의 헌법제정 작업은 진주군이 인정한 권력 기구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전혀 도외시하면서 친일 지주들로 구성된 [[한민당]]의 헌법제정 작업 요청에는 수락하였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를 중심으로 한 독립촉성회의 전위조직이며 [[신익희]](申翼熙)에 의해 구성된 일제하 행정 관리들의 연구모임인 '행정연구회'에 참여하여 자문과 헌법제정 작업을 준비하는 활동을 하며 미국, 이승만, 한민당 계열로 인맥들을 충분히 활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1946년]] [[미군정]]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이 된 뒤, [[1947년]] 6월 [[남조선과도정부]] 산하 법전편찬위원회 위원(헌법 분과위원)에 임명되었다.
=== 정부 수립 이후 ===
==== 제헌 국회의원 활동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4/44/%EC%A0%9C%ED%97%8C%EA%B5%AD%ED%9A%8C_%EC%B4%9D%EC%84%A0_%EC%9D%98%EC%84%9D%EC%88%98.svg/150px-%EC%A0%9C%ED%97%8C%EA%B5%AD%ED%9A%8C_%EC%B4%9D%EC%84%A0_%EC%9D%98%EC%84%9D%EC%88%98.svg.png
1948년 5월 30일 제헌국회 총선 의석수
[[1946년]]부터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참여하였으며, 국회 헌법기초전문위원, 초대 법제처장을 지냈다.
[[1948년]] 3월에는 [[김성수 (1891년)|인촌 김성수]]의 부탁을 받고 사법부법전편찬위원회에 초안을 작성하여 넘겼다. 처음에 유진오는 대지주였던 김성수가 자신의 4대원칙 중 하나인 농지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김성수는 유진오의 설명을 듣고 토지개혁을 포함한 4대입법안에 전적으로 찬성을 표하였다. [[양원제]], [[내각책임제]], [[농지개혁법]], 중요기업의 국영화를 4대 기본원칙으로 하는 법안을 점은 본안인 유진오안과 대동소이하였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3/36/South_Korean_general_election_1948.JPG/230px-South_Korean_general_election_1948.JPG
제헌국회 총선 투표 광경
[[5월 30일]] 서울특별자유시 중구 (서울특별시)의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6월]]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서상일]], [[윤치영]], [[김준연]], [[조봉암]] 등과 함께 [[헌법]] 제정에 참여하였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71600209203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7-16&officeId=00020&pageNo=3&printNo=18086&publishType=00020 인터뷰 제헌절 32돌…제헌헌법 기초 유진오 박사에게 듣는다] 동아일보, 1980.7.16.] 1948년 [[6월 1일]]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에 선임되었고,[[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208337&v=44 '헌법기초위원회' - 네이트 백과사전]{{깨진 링크|url=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208337&v=44 }}] 헌법기초위원을 겸하였다.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의 초안에는 [[국민]]을 '[[인민]]'으로 표현했다. 초안 작성자인 그가 [[국민]] 대신 [[인민]]이란 어휘를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차병직, 《안녕 헌법》 (지안출판사, 2009) 40페이지]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가 강하여 국가우월적 느낌을 준다. 반면에 [[인민]]은 [[국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표현한다. 유진오는 국가를 구성하는 자유인으로서의 개인을 표시하는데 국민보다 인민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다.[차병직, 《안녕 헌법》 (지안출판사, 2009) 41페이지]
이에 국회의원이던 [[윤치영]]은 [[대한민국 헌법]] 초안의 [[인민]]이라는 용어를 문제삼아 유진오를 통박하였다. 그는 "[[인민]]이란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그러한 말을 쓰려고 하느냐. 그런 말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유진오)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흥분했다. 유진오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항의했고 [[윤치영]]은 틀린말 하지 않았다며 맞받아쳤다. [[대한민국 국회|국회]]에서는 논쟁이 벌어졌고, 윤치영은 인민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국회의원]]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인민]]이라는 용어는 [[대한제국]]의 절대군주 시절에도 사용되던 용어였다. 후에 유진오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당]]에 빼앗겼다며 한탄하였다.
그해 [[8월]] [[대한민국]] 법전편찬위원회 위원, [[1949년]]에는 고려대학교 법정대학장이 되었다. 그해 고등고시 출제위원에 위촉된 뒤 [[1952년]] [[9월]]부터 [[1965년]] 10월까지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 한국 전쟁과 교육 활동 ====
{{참고|한국 전쟁}}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난 뒤 고려대학교 임시 관리 책임자,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외교위원회 위원 등을 맡았다. [[1951년]] 대한민국교수단 단장, 전시연합대학 총장(4월 ~ 8월), 고려대학교 총장 서리로 활동했다. 같은 해 한일회담 준비조사차 [[일본]]으로 건너갔고, 10월에는 한일회담 대표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1952년]] 5월에 한일회담 결렬로 귀국했다.
9월에는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에 연구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10월에는 [[국제 연합]] 한국대표단 법률고문을 맡았다. [[1953년]] 7월에서 8월까지 유럽 각국을 시찰했고 같은 해에 대한국제법학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54년]] [[대한민국 학술원]] 종신회원에 위촉되었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1179 유진오: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url=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1179 }}], 동년 [[9월]] [[민주당 (1955년)|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59년]] 재일교포 북송을 반대하여 재일교포 북송반대 전국위원회에 참여하였고 재일교포 북송반대 전국위원회 국민대표로 [[장택상]], [[최규남]] 등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일본의 교포 북한송환을 규탄하고, 반대하는 뜻을 알리고 귀국하였다.
=== 야당 정치인 ===
==== 제3·4공화국 시절 ====
[[1961년]]에 [[5·16 군사정변]] 뒤에는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장이 되었으며, [[1962년]] 문화훈장(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64년]] [[8월 13일]] 아리앙스 프랭세즈 프랑스연합회 한국위원회 명예회원에 위촉되고, [[1965년]] 10월 고려대학교 총장직 임기 만료로 사임한 뒤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서 [[1966년]]에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1967년]]에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 (1967년)|신민당]] 대표위원이 된 뒤 6월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듬해 1968년에는 신민당 총재로 취임했고 같은 해에 대한국제법학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68년부터 [[박정희]]의 3선개헌안 통과 시도가 추진되자 1969년 [[1월 17일]]에 유진오는 기자회견을 통해서 “당의 운명을 걸고 3선개헌 저지운동을 벌이겠으며 경우에 따라 소속의원의 총 사퇴도 고려하겠다”고 선언했다.[양순직 《대의는 권력을 이긴다》 (에디터, 2002) 157페이지] 2월 초 유진오는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1969년]] 9월 10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1970년]] [[1월 7일]] 일본 [[도쿄]]의 병석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당수직 사퇴를 공식 발표했다.[1970년 1월~: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41쪽] [[1974년]]에는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병석에 누웠지만 [[박정희]] 정권의 회유와 지지 요청을 여러 번 거절하였다.
[[1971년]] [[종로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종로구)]]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난 뒤 사실상 정계은퇴를 하였다.
==== 만년 ====
[[1979년]] [[10·26 사건]]이 발생한 후 [[국토통일원]] 고문과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으며, [[1981년]]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에 재위촉되었다. [[1983년]] [[9월 2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열린 [[송진우 (정치인)|고하 송진우]] 동상 제막에 참석하였고 같은해 12월에는 [[뇌혈전증]]으로 쓰러져 입원했고
이후 1983년부터 투병생활을 하다가 [[1987년]] [[8월 30일]]에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향년 82세였다.
저서로는 《헌법해의》, 《헌법강의》, 《구름 위의 명상》, 《유진오 단편집》 등이 있다.
==== 빈소 설치 논란 ====
[[1987년]] [[8월 30일]] 사망했을 당시 고려대학교에서 빈소를 마련해 그의 추모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당시 고려대학교 내 일부 교수와 학생들이 “고려대가 친일행위자나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될 수 없다!”며 철거를 주장해 이른바 ‘현민 빈소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의 사망 당시 고대 내에 그의 빈소가 차려진 것을 두고 학생과 일부 교수들은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고대 내에 차려지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며 반대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5308 고려대 총학, 김성수 등 친일파 10명 명단 발표 - 오마이뉴스] 2005년 03월 28일]
{{인용문|그러나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를 불문에 붙이고 고인을 과대미화시킴으로써 그것이 악을 방관·조장하고 현재의 비리마저 정당화시키는 데 악용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관행과 통념에 아부·순종하기보다는 이에 도전하여 이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 진정한 지성인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히 교육자로서 이미 일제 치하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을 노래했었고, 해방 직전까지도 "우리(일본 제국)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외치는 등 친일행각의 전력도 있거니와 야당 당수로서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처참한 광주의 불행과 직결된 정통성을 결여한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으로 다시금 변신했던 고 유진오 씨의 빈소가 고대에 차려진다는 것은 비교훈적이라고 생각하여 사회적 통념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항의 시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료 교수 5인은 그럴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심정을 호소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물러서지 않자 곧 재단측의 출교, 퇴학 조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 사후 ===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1944년]] 《[[신시대]]》에 실은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 등 총 8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다.[{{저널 인용
|저자=김재용
|제목=친일문학 작품목록
|저널 = 실천문학
|연도 = 2002
|작성월 = 8
|issue = 67호
|쪽=123~148쪽
|url=http://www.artnstudy.com/zineasf/Nowart/penitence/lecture/03.htm}}]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한겨레》 (2005.3.28)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1875.html 고대 총학 ‘친일행적’ 10명 발표]]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법률, 경제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8220076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동아일보 2008년 8월 22일자]
== 저서 및 작품 ==
=== 저서 ===
* 《헌법기초회고록》 (1981)
* 《민주정치에의 길》 (1963)
* 《양호기》 (養虎記) (1977)
* 《미래를 향한 창》 (1978)
* 《구름 위의 만상》
=== 논문 ===
* 《헌법해의》(憲法解義) (1949)
* 《헌정의 기초이론》 (1950)
* 《헌법강의》 (1953)
=== 소설 ===
* 《창랑정기》
* 《김강사와 T교수》
== 약력 ==
* [[보성전문학교]] 교사
*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과장
* [[고려대학교]] 총장
* [[1948년]] [[5월 31일]] 국회 헌법기초전문위원
* [[1948년]] [[대한민국 법제처]] 제1대 처장
* [[1949년]]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창당에 참여
* [[1955년]] [[민주당 (1955년)|민주당]] 창당에 참여, 민주당 구파로 활동
* [[1959년]] 한일회담 [[대한민국]]측 수석대표
*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장
* [[1967년]] [[민중당]] 대통령후보
* [[신민당 (1967년)|신민당]] 당수
== 가족 관계 ==
* 아내: 박복례(朴福禮)
** 딸: 유효숙(兪孝淑, [[1930년]] [[3월 27일]] ~ )
*** 사위: [[한만년]](韓萬年, ~ [[2004년]] 前 [[일조각]] 대표)
**** 외손: [[한홍구]](韓洪九, 대학 교수·[[역사학]]자)
** 딸: 유충숙(兪忠淑, [[1933년]] [[9월 25일]] ~ )
*** 사위: [[박동진 (1922년)|박동진]](朴東鎭, [[1922년]] [[10월 11일]] ~ )전 외무부장관, 국회의원
** ** 아들: 유완(교육인, 전 [[연세대학교]] 교수) 아들: 유종(음악가, 포항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역임)
** 딸: 유경숙 (1939년~ )
* 장인: [[이명래]](이명래고약 창업주, [[1890년 6월 20일]] ~ [[1952년 1월 6일]])
** 손자: 유동(법조인, [[1970년]][[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073582 故 유진오박사 손자 유동씨 美 국제로펌 변호사로 활약 :: 네이버 뉴스]] ~ )
* 아내: 이용재(李容載, 이명래고약 대표, 의사, 이명래의 딸 [[1921년]] ~ [[2009년]] [[11월 12일]][
[http://news.donga.com/3/all/20091114/24114604/1 donga.com[뉴스]-[명복을 빕니다]故유진오 박사 부인 이용재 여사]])
== 평가와 비판 ==
{{빈 문단}}
== 역대 선거 결과 ==
{| class="wikitable"
|-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제7대 총선]]||[[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종로구)]]||7대||[[신민당]]||{{막대|녹|6|9|6|8}} 69.68%||55,703표||1위||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d/dd/%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25px-%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
|}
== 관련 항목 ==
{{Col-begin}}
{{Col-3}}
* [[김성수 (1891년)|김성수]]
*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 [[주요한]]
* [[정지용]]
* [[변영태]]
* [[변영로]]
* [[백관수]]
* [[유치진]]
* [[유치송]]
* [[유치환]]
* [[장면]]
* [[최두선]]
* [[최남선]]
{{Col-3}}
* [[동아일보]]
* [[보성전문학교]]
* [[현상윤]]
* [[한기악]]
* [[장덕수]]
* [[주요섭]]
* [[곽상훈]]
* [[박순천]]
* [[신익희]]
* [[윤보선]]
* [[조병옥]]
* [[장택상]]
* [[장준하]]
{{Col-3}}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 [[정일형]]
* [[이명래]]
* [[유진산]]
* [[김영삼]]
* [[이철승]]
* [[이상백]]
* [[한만년]]
* [[한홍구]]
* [[현민 유진오박사 생가터]]
{{Col-end}}
== 각주 ==
{{각주|2}}
== 관련 문헌 ==
* 임종국,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87)
* 임종국, 《친일문학선집》2 (실천문학사, 1987)
* 유진오, 《헌법기초회고록》 (일조각, 1980)
{{글로벌세계대백과}}
== 외부 링크 ==
* {{헌정회|1536}}
*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1179 유진오: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url=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1179 }}
* [https://archive.is/20130111082643/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207&Total_ID=330992 《중앙일보》(2004.5.2.)]
* [https://web.archive.org/web/20041015081851/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 (동정) 이용재 이명래고약 대표 《한국일보》(2000.5.19.)]
* {{서적 인용
|저자=반민족문제연구소
|제목=청산하지 못한 역사 3
|날짜=1994-03-01
|출판사=청년사
|출판위치=서울
|id={{ISBN|978-89-7278-314-5}}
|장=유진오 - 일본의 '영원한 승리'를 다짐한 한국현대사의 큰별 (김민철)}}
{{전임후임|
|전임자 = (초대)
|후임자 = [[신태익]]
|대수 =
|직책 = 초대 [[대한민국의 법제처장|법제처장]]
|임기 = [[1948년]] [[8월 4일]] ~ [[1949년]] [[6월 4일]]
}}
{{전임후임 국회의원|
|전임자 = [[전진한]]
|후임자 = [[권중돈]]
|대수 = 7
|직책 = [[종로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종로구)]]
|정당 = [[신민당 (1967년)|신민당]] → [[무소속]]
|임기 =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윤보선]], [[박순천]]
|후임자 = [[유진산]]
|직책 =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대표
|임기 = [[1967년]] [[2월 11일]] ~ [[1970년]] [[2월 17일]]
|대수 =
}}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자}}
[[분류:1906년 태어남]][[분류:1987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법학자]][[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법학자]][[분류:민주국민당 (1949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분류:국민의당 (1963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 당원]][[분류:신민당]][[분류:신한민주당 당원]][[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법제처장]][[분류:헌법학자]][[분류:사회주의자]][[분류:김성수 (1891년)]][[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재동초등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기계 유씨]][[분류:개신교도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