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정보
|이름= 유원식
|생애= [[1914년]]? ~ [[1987년]] [[1월 31일]]
|그림=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a/Yu_Won-sik_1961-may-16.jpg
|설명=
|별명=
|태어난 곳= [[경상북도]]
|죽은 곳= [[서울특별시]]
|본관= [[전주 류씨|전주]]
|복무=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복무 기간= ? ~ 1963년
|최종 계급= 만주군 대위/대한민국 육군 준장
|부대=
|지휘=
|주요 참전 전투/전쟁= [[태평양 전쟁]],[[한국 전쟁]]
|서훈 내역=
|기타 이력=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위원장
|}}
'''유원식'''(柳原植, [[1914년]]? ~ [[1987년]] [[1월 31일]][{{뉴스 인용
|제목=전 최고회의 재경위장 유원식씨 별세
|출판사=조선일보
|쪽=10면
|날짜=1987-02-01
}}])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장도영]]·[[박정희]]와 함께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였고 정변 후 혁명위원회 재경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며 독립운동가인 [[유림 (1894년)|단주 유림]]의 아들이다. [[경상북도]]출신이다.
그가 [[일본군]]에 입대하였다 하여 그의 아버지 [[유림 (1894년)|유림]]은 그와 의절하였다. [[5·16 군사정변]]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나 후에 스스로 공직을 사양하고 은퇴한다. 후에 그는 [[윤보선]]이 [[5·16 군사정변]]을 알고도 묵인했다 주장하여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 생애 ==
[[경상북도]]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항일 운동가 중 한 명인 [[유림 (1894년)|유림]]의 아들이다. 유림의 외아들이었으나, 유원식이 [[만주국 육군|만주군]] 장교가 되었다는 이유로 유림이 부자 관계를 단절하여 평생 다시 만나지 않았다.[{{저널 인용
|저자=김영천
|제목=전설의 아나키스트, 단주 유림의 불꽃 인생 - ‘최대한의 민주주의에서 다 같이 노동하고 사상하는 세계’를…
|url=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7/08/08/200708080500012/200708080500012_1.html
|저널 =신동아
|연도 =2007
|작성월 =8
|issue=제575호
|쪽=562~573쪽}}]
[[일제 강점기]]에 [[만주]]로 건너가 만주군 특임 군의 대위를 지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미군정]] 지역으로 내려왔다.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를 제8기로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군]] 장교가 되어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1960년]] [[육군본부]] 군 개발국 차장이 되었다.
[[1961년]] 육군 대령으로 복무 중 [[박정희]]의 권유를 받고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였고, 정변 직후 바로 청와대를 찾아갔다. 당시 대통령 [[윤보선]]은 [[박정희]]와 유원식을 보고 올 것이 왔다고 하여 사실상의 군사정변을 승인한 셈이 되었다.[[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1/29/200401290500021/200401290500021_2.html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이는 1년 뒤 유원식이 직접 증언한 바 있다.
5·16 군사정변 성공 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하여 재정경제위원장이 되어 활동했다. [[1963년]]에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군정 기간 동안 통화 개혁과 세제 개혁을 주도하고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에 오르는 등 경제 부문의 핵심 인물이었다. 당시 유원식은 "혁명정부의 진시황"으로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고, 그가 추진한 정책은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경제 정책의 밑거름이 되었다.[{{저널 인용
|저자=최낙동
|제목=혁명정부의 진시황 유원식이 털어놓는 통화개혁의 내막
|저널 =정경문화
|연도 =1983}}] 그러나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김종필]]의 부상을 공개적으로 비판[{{뉴스 인용
|제목=李厚洛공보실장과 尹胄榮신당대변인
|출판사=조선일보
|쪽=1면
|날짜=1963-01-17
}}] 하며 반김 라인을 이끌던 중[{{서적 인용
|저자=김삼웅
|제목=한권으로 보는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날짜=1999-01-01
|출판사=가람기획
|출판위치=서울
|id={{ISBN|8985466054}}
|장=36. '본연의 임무' 버리고 민정참여로 - 민주공화당 창당 (1963.1.18)}}], 곧바로 김종필의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가 적발한 증권파동에 연루되어 구속되면서 정변 세력에서 밀려났다.[{{뉴스 인용
|제목=의혹사건 관련자 15명을 구속
|출판사=조선일보
|쪽=1면
|날짜=1963-03-07}}] 한편 그의 꿈에 아버지인 단주 [[유림]]이 나타나 적당한 때에 물러나지 않으면 목을 보전하기 힘들 것이라는 예지몽을 꾸고 스스로 물러났고, [[박정희]]나 [[김종필]]이 주는 직책이나 회유를 스스로 사양했다고 한다.
이후 협화실업의 대표 등을 역임했다.
== 공방 ==
후에 유원식이 5·16 군사정변 직전에 대통령 [[윤보선]]과 만나 정변 계획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으며 정변 소식을 들은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주장을 내놓아 논란이 일었다.[{{저널 인용
|저자=김준하
|제목=[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40년 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상 5] 장면은 장도영의 이중플레이에 속았다
|url=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5/02/21/200502210500024/200502210500024_1.html
|저널 =신동아
|연도 =2001
|작성월 =11
|issue=제506호
|쪽=352~371쪽}}][{{저널 인용
|저자=윤보선
|제목=유원식 회고록에 할 말 있다
|저널 =정경문화
|연도 =1983}}]
[[윤보선]]의 정변 방조 의혹은 [[1962년]] [[5월]] 유원식의 진술로 밝혀졌다. 유원식은 인터뷰에서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고 주장하자,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 정부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국가원수 신분으로서 정치적 라이벌인 [[장면]]의 몰락을 바라며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붕괴를 방관했다는 이러한 주장은, 야당 지도자로 활동 중이었던 윤보선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윤보선 측은 5·16 군사정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이를 사실상 승인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여, 유원식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 사후 ==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포함되었다.
==함께 보기==
* [[5.16 군사정변]]
* [[박정희]]
* [[제 3공화국]]
== 저서 ==
* 《5.16 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인물연구소, 1987)
== 각주 ==
{{각주}}
== 참고 문헌 ==
* 유원식, 《5.16 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인물연구소, 1987)
* 이석제, 《각하,우리 혁명합시다》(1995, 서적포)
* 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990)
*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 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 (정경문화사, 1967)
[[분류:5·16 군사 정변 관련자]][[분류:1914년 태어남]][[분류:1987년 죽음]][[분류:전주 류씨]][[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병사한 사람]][[분류:경상북도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