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인/목록]] https://search.pstatic.net/common?type=a&size=120x150&quality=95&direct=true&src=http%3A%2F%2Fpeople.phinf.naver.net%2F20181026_250%2F1540538883925rbcPh_JPEG%2Fchosun_400006818.jpg 兪成煥 1931년 08월 20일 ~ [[2018년]] [[7월 24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호는 동선(東善)이다. 1931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성주고등학교]] 졸업 후 [[영남대학교]] 법정대학을 중퇴하였다가 1990년대에 복학하여 졸업하였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출범 후인 [[1960년 지방선거]]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경상북도 도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김영삼]], [[박준규(1925)|박준규]] 등 [[신민당(1960년)|신민당]] 국회의원들과 청조회에 속하여 신풍 운동을 주도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자 [[신민당(1967년)|신민당]]에 속하여 [[3선 개헌]] 운동 등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비판하는 민주화운동을 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여 친야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성주군-[[칠곡군]]-[[구미시]]-[[선산]]군-[[군위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신현확]] 후보와 같은 친야 무소속 [[김현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한 김영삼, [[이민우(1915)|이민우]], [[김동영(정치인)|김동영]] 등과 민주산악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중구(대구)|중구]]-[[서구(대구)|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이만섭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당시 이만섭 후보는 자신이 싫으면 고생하는 유성환 후보를 찍어 달라고 했다가 정작 자신은 [[민주정의당]] [[한병채]] 후보를 간신히 누르고 2등 당선되었다고 회고하였다. 1986년 [[대한민국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노신영]] [[국무총리]]에게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보다 [[남북통일|통일]]이어야 한다고 발언하였다가 [[유성환 국시론 파동]]으로 인해 면책특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 잠시 구속되었다.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최운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따라갔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 예비후보가 되었다. [[대법원]]에 의해 유성환 국시론 파동 사건에 대해 면책특권을 인정하는 취지로 공소기각이 내려졌다. 1993년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 [[김영수(1942)|김영수]]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에 임명되어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사임하면서 국회의원직을 승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박준규(1925)|박준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국민신당(대한민국)|국민신당]]에 입당하였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국민신당 후보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문희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국민신당이 [[새정치국민회의]]에 흡수되자 새정치국민회의에 속하였다. 정계은퇴 후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독소조항 개정에 그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성주군 출신 인물]][[분류:1931년 출생]][[분류:201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