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식'''([[1932년]] [[4월 5일]] ~ [[2006년]] [[9월 2일]]{{뉴스 인용 |제목=비전향장기수 오형식의 서거에 대한 부고 |출판사=조선중앙통신 |날짜=2006-09-03 }})은 [[대한민국]]의 [[비전향 장기수]]이다. == 생애 ==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시]]의 빈농 가정 출신이다. 어머니는 오형식이 어릴 때 [[중풍]]으로 쓰러져 몸이 불편하였고 가족이 모두 오두막에 거주하며 밥을 빌어 연명할 정도로 극도로 가난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인 [[1946년]]의 전신인에 입학하였다에 재학 중이던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며 [[인민의용군 (한국 전쟁)|인민의용군]]으로 입대하였다. 월북 후 [[서울특별시|서울]] 지방경비성 기술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여 [[1963년]]에 화학부를 졸업하고 [[원산농업대학]]에서 [[화학]]을 강의하는 상급 교원으로 채용되었다.{{뉴스 인용 |제목=북송 비전향장기수 오형식 사망 |출판사=통일뉴스 (연합뉴스 인용) |url=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7598 |날짜=2006-09-03 |확인날짜=2008-08-24 }} 상급교원은 대한민국 대학의 조교수에 해당한다. [[1969년]]에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남파되었으나 별다른 활동은 하지 못하고 남파된 지 열흘 만인 1969년 6월에 체포되었다. 재판에 회부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장기수가 되었다. 수감 중에 전향을 권유받았으나 전향하지 않았고 약 30년 동안 복역한 끝에 [[김대중 정부]]의 특사로 [[1999년]]에 석방되었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고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4년 후인 2006년에 송환된 장기수 가운데 일곱 번째로 죽었고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김만수 외 12인 |제목=신념과 의지의 강자들 - 비전향 장기수들의 수기 4 |날짜=2003 |출판사=평양출판사 |출판위치=평양 |장=조국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오형식) }} == 각주 == [[분류:1932년 태어남]][[분류:2006년 죽음]][[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학 교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렬사]][[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김일성종합대학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