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정보 |이름 = 오위영 |원어이름 = 吳緯泳 |사진 = https://search.pstatic.net/common?type=a&size=120x150&quality=95&direct=true&src=http%3A%2F%2Fpeople.phinf.naver.net%2F20181026_76%2F1540538444497wL8uH_JPEG%2Fyonhapnews_30299478.jpg |출생일 = {{출생일|1901|5|5}} |출생지 = {{국기나라|대한제국}}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울산시]]
(現 [[울산광역시]]) |국적 = {{국기나라|대한민국}} |본관 = [[해주 오씨|해주]] |사망지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78|10|2|1901|5|5}} |별칭 = 호 석운(石耘) |학력 = [[고베 대학|고베고등상업학교]] |직업 = 금융인, [[정치인]] |소속 = |종교 = |부모 = |배우자 = |자녀 = |상훈 = |웹사이트 = }} '''오위영'''(吳緯泳, [[1901년]] [[5월 5일]] ~ [[1978년]] [[10월 2일]], [[울산광역시|울산]])은 [[일제 강점기]]의 금융인이자 대한민국의 금융인, 정치인으로 제2·4·5대 국회의원이었다. 일본 고베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초계ㆍ진해금융조합이사, 조선신탁은행 두취(은행장), 제2대·4대 국회의원, 제5대 참의원, 자유당 중앙상임위원장, 민주당 중앙상위의장, 전원위ㆍ재경위ㆍ예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약력 == === 금융 활동 === [[경상남도]] [[울산시|울산]] 출신으로,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 1928년 일본 고베고상(神戶高商, [[고베 대학]]의 전신)을 졸업하고 바로 귀국하였다. 그해 금융조합이사에 선출되면서 금융계에 진출하였다. 그 뒤 초계군금융조합 이사, 진해군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했다. 금융계에서 활동하던 중 광복 직후 1945년 9월 [[미군정]]이 주둔하면서 금융계 경력이 인정되어 1947년 신탁은행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미군정 기간 중 신탁은행 이사로 있으면서 기반을 쌓아 이를 바탕으로 부산일원의 자산가로 급부상하였다. [[1949년]] 신탁은행 총재가 되고, 그해 [[미국]] 시찰 중 [[주미한국대사]] [[장면]]을 만났으며, 그의 청렴성에 감명받아 귀국후 [[대통령]] 이승만에게 이를 알리고, 후에 그를 총리로 천거하게 된다. === 정치 활동 === [[1950년]] 제2대민의원선거 때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었으며, 국회에서는 초선의원이면서도 자금력을 바탕으로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1951년 이승만이 새 총리를 물색할 때 그는 [[장면]]을 적극 추천하여 총리로 기용시키기도 했다. {{인용문|제 생각으로는 장면 박사가 제일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미국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6‧25 당시의 성공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지금의 시끄러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8 증보판) 373페이지}} 이어 자유당 중앙상임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2년]] 그는 [[장면]], 현석호 등과 원내 자유당에 있었으나 원내 자유당 인사들의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계획과 장면을 내각책임제하 국무총리로 추대하려는 시도 등 내부에서 이견이 갈렸고 모두 실패함에 따라 [[1954년]] 자유당을 떠나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고 후에 민주당 창당에 가담하여 신파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 생애 후반 === 민주당 중앙상위의장에 선출되고 이어 국회 전원위ㆍ재경위ㆍ예결위원장을 두루 거쳤다. [[1958년]] 제4대민의원이 되면서부터 같은 자유당 탈당파인 [[장면]] 등과 더욱 밀착되었다. 또한 [[장면]]과 민주당 신파 계열의 재정적 후견인 노릇도 겸하면서 그 정치자금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하였다. [[1960년]]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출범 후 입각이 유력시되었으나 구파의 집단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조각 당시 [[대한민국 국무원|국무원]]사무처장에 임명되었고, 1961년 초 개각 당시 무임소장관이 되었다. 그해 초 [[국무총리]] [[장면]]에게 데모 방지법 마련에 대한 건의를 하였으나, [[장면]]은 자유를 최대한 허용해야 된다며 그의 건의를 반대하였다. [[1961년]] [[5. 16 군사정변]]으로 은퇴했다가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 역대 선거 결과 == {| class="wikitable" |-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제2대 총선]]||[[울주군의 국회의원|국회의원(경남 울산군 갑)]]||2대||[[무소속]]||{{막대|무|3|7|5|2}} 37.52%||12,503표||1위|| |-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제3대 총선]]||[[울주군의 국회의원|국회의원(경남 울산군 갑)]]||3대||[[무소속]]||{{막대|무|0|0|0|0}} 0.00%||0표||-||낙선 |-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선거|제4대 총선]]||[[부산 동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부산시 동구 을)]]||4대||[[민주당 (1955년)|민주당]]||{{막대|녹|5|9|1|4}} 59.14%||19,468표||1위|| |-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제7대 총선]]||[[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목록|국회의원(전국구)]]||7대||[[민주당 (1967년)|민주당]]||{{막대|녹|0|3|0|0}} 3.0%||323,203표||전국구 1번||낙선 |} == 각주 == == 참고 자료 == * {{헌정회|929|오위영}} *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 외부 링크 == {{전임후임| |대수 = 8 |직책 = [[대한민국 국무원 사무처|국무원 사무처장]] |임기 = [[1960년]] [[8월 20일]] ~ [[1960년]] [[9월 11일]] }} {{전임후임| |대수 = 6 |직책 = [[대한민국 무임소장관실|무임소 장관]] |임기 = [[1960년]] [[9월 11일]] ~ [[1961년]] [[5월 20일]] }} {{전임후임 국회의원| |대수 = 2 |직책 = [[울주군의 국회의원|국회의원(울산군 갑)]] |임기 =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소속정당 = [[무소속]] →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 [[무소속]] |같은 지역구 의원 = (울산군 을) }} {{전임후임 국회의원| |대수 = 4 |직책 = [[부산 동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부산 동구 을)]] |임기 = [[1958년]] [[5월 31일]] ~ [[1960년]] [[7월 28일]] |소속정당 =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 }} {{전임후임 국회의원| |전임자 = (신설) |후임자 = (폐지) |대수 = 5 |직책 =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목록 (지역구별)#참의원 지역구별 보기|참의원(경상남도 제1부)]] |임기 =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소속정당 = 무소속 |분류 = 대한민국의 제5대 참의원 }} [[분류:1902년 태어남]][[분류:1978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금융인]][[분류:대한민국의 금융인]][[분류:대한민국의 무임소장관]][[분류:장면 내각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분류:울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해주 오씨]][[분류:고베 대학 동문]][[분류:호헌동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