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오세창 (1951년)|대한민국의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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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 오세창
'''오세창'''(吳世昌, [[1864년]] [[8월 6일]] ~ [[1953년]] [[4월 16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자 계몽 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화가, [[대한민국]]의 정치인, 서화가이다. [[조선]] 말기에는 개화파 정치인이었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서화와 고미술품 감정 등의 활동도 하였다. [[한국]]의 역대 왕조의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1928년)의 저자이다. [[1918년]] 설립된 [[조선]]인 미술가, 서예가, 조각가 단체인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이기도 하다.
개화파 중인 역관 [[오경석]]의 아들로 조선 말기에는 개화운동에 동참했고, [[을미사변]]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했으나 [[190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귀국 후 [[만세보]], [[대한민보]]의 대표이사로 언론 활동을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과 [[천도교]] 사역 활동에 종사하였으며 [[1918년]] 말부터는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 [[1919년]] [[3월]]의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예술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서예가이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독립촉성중앙회]], [[민주의원]] 등에 참여하였다. [[서예]]가로도 전서, 예서, 초서에 능하고 조각도 하였으며, 둥그스름한 형태의 독특한 서체를 창안하여 위창체, 오세창체라 부른다.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 자는 중명(仲銘), 아호는 위창(葦滄), [[천도교]] 도호는 한암(閒菴)이다.
== 생애 ==
=== 생애 초기 ===
==== 출생과 소년기 ====
위창 오세창은 [[1864년]](고종 1년) [[8월 6일]] [[한성부]] 출생으로, 중국어 [[역관]](譯官)이자 구한말의 선각자로 잘 알려진 [[오경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 아버지 역매(亦梅) [[오경석]]은 역관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 종일품)까지 올랐으며, 구한 말의 개화당의 이론적 지주이기도 했다. 그의 집안은 [[역관]] 가문으로, 대대로 외국어를 익혀 개화 사상에 일찍 눈을 뜬 중인 집안에서 자란 데다 개화파의 거두인 스승 [[유홍기]]의 영향까지 받아 자연스럽게 개화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박규수]]의 문인이자 아버지 [[오경석]]의 문하에도 출입하던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김옥균]], [[유길준]], [[윤치호]] 등과 교류하며 가깝게 지냈다.
==== 관료생활과 개혁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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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의 친필 서신
[[1879년]] [[과거 제도|역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는데, [[1885년]] [[박문국]]에 발령받아 [[박문국]][[주사]]시보로 주간 관보인 《[[한성주보]]》 기자가 되면서 언론인으로 입문했다. [[1886년]](고종 23년)에는 [[박문국]][[주사]]가 되어 《[[한성순보]]》 기자를 겸했다. 이후 [[군국기무처]], [[농상공부]], [[우정국]] 등을 거쳤고, [[1894년]](고종 31년) [[군국기무처]] 낭청총재 비서관(軍國機務處郎廳總栽秘書官)이 되었다가 관제 개정 이후 [[농상공부]] [[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정국]] 통신국장(郵政國通信局長) 등을 역임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 직후 [[권동진]], [[정난교]] 등과 함께 화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다.["生物進化論을 修正케한 世界的植物學者", 동아일보 1950년 01월 22일자 2면, 사회면] 그러나 그는 직접적인 혐의점이 없어 곧 귀국했다.
[[1896년]](건양 1년) [[일본 문부성]]의 외국어학교 교사 초빙 당시 초빙되어,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1897년]]에는 정식으로 [[토쿄외국어학교]]에 조선어과 교사로 파견되어 [[일본]]에서 1년 가량 교사 생활을 하면서 근대 문물을 직접 접했다.
==== 대한제국기 활동 ====
[[1902년]](광무 5년)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 후일 [[권동진]]은 [[삼천리]] 誌자에 당시 망명중이던 자신의 옛 동지를 소개할 때 한 사람으로 그를 소개하였다.
{{인용문2|청년시대의 제우(諸友)
먼저 청년시대의 나의 동무들을 말하면... 그때 동경에 망명하였든 인물들은 [[박영효]], [[조희연]](군부대신 다니든 분), [[장박]](대신 지난이), [[유길준]](수상 지낸 이), [[권영진]](나의 중씨로 [[경무사]]), 유세남(내무차관 다니든 이), [[김옥균]], 그러고 우리 동렬로는 [[조희문]], [[이범래]], [[우범선]], [[이두황]],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윤효정]], 오세창 또 우리보담 조금 늦어 들어온 소장파에 이신(李申), [[유동렬]], [[권석하]], [[이동휘]] 등 제인물이 있었다. 이 가운데는 1,2차 대면에 끈친 이도 있었지만은 대개는 여러 번 만났고 일도 도모하여 본 분들로 비교적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서정민, 《이동휘와 기독교》 (연세대학교출판부, 2007) 161페이지]}}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일본]] 조정에 계속 사람을 보내 망명객들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거절했다.
[[1902년]]부터 일본에 망명해 있던 중,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손병희]], [[양한묵]](梁漢默) 등의 거듭된 권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6년]] 천도교 기관지를 겸한 일간지 《[[만세보]] (萬歲報)》 사장으로 계몽 운동을 펼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1907년]] [[3월]]에는 [[의친왕]]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갔다가 천장절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해 [[7월 10일]]에 귀환하였다. [[11월]]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부찬의(中樞院副贊議) [[주임관]]2등(奏任官二等)에 임명되었다.
이후 [[대한협회]](大韓協會)의 부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909년]] [[대한협회]]가 창간한 일간지로서 반일 논조를 분명히 한 《[[대한민보]]》 사장도 맡았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권동진]]과 함께 개화에는 찬성하되 일본과의 합병에 반대하는 이른바 문명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합병 청원으로 개화할 것을 주장하는 [[일진회]] 계열과는 대립하여 결국 [[이용구]]를 몰아냈다.
=== 일제 강점기 활동 ===
==== 일제 강점기 초반 ====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남작]] 작위와 은사금이 내려졌지만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안중식]]의 동양화 〈탑원도소회지도〉([[1912년]])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오세창의 정원 누각에 천도교 문명파 인사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1917년]] 다시 《만세보》와 《대한민보사》를 창설하여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2년여 동안 투옥되었다.
==== 3.1 만세 운동 전후 ====
[[1918년]] [[1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손병희]], [[최린]](崔隣), [[권동진]](權東鎭)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우선 동지를 포섭하기로 한다. 또한 일부 [[천도교]] 연락원들이 [[기독교]] 지도자 일부와 합의하자, 범거족적인 만세 시위 개최에 동의한다.
[[1919년]] [[2월 10일]] [[최린]], [[최남선]] 등이 협의하고,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여 제출하자 그는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내용을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한다. [[2월 25일]] 오세창은 [[손병희]],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조선 고종|고종]] 국장에 참배할 목적으로 상경한 [[천도교]]도 박준승(朴準承),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리고 이들을 설득하여 찬동을 얻었다. 이때 오세창은 그는 [[천도교]] 월보과장 옥파 [[이종일]](李鍾一)을 설득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1919년]] [[2월 27일]] 오세창은 [[천도교]] 지도자들을 설득, 그들과 함께 [[경성부]] 재동(齋洞)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최종 확인하고 찬동, 민족대표자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 날인한다. 이어 그는 [[최남선]]의 독립선언서 용지 보급과 인쇄 등을 지원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오세창은 [[경성부]]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 요리집에 [[손병희]], [[최남선]] 등 민족대표자들과 함께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데 함께 서고, 대한독립 만세삼창을 외쳤다. 바로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성]]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 이후 항소하였으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
==== 일제 강점기 후반 ====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최종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투옥하였다. [[1923년]]에 석방되었다.
이후로는 서예가, 전각가(篆刻家) 및 서예학과 금석학 역사가로 주로 활동했다. [[1922년]] 초대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렸을 때 서예 부문에서 수상했고, 서화사 연구에도 뛰어들어 아버지 오경석과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역대 [[한국]]의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 (槿域書畫徵)》(1928)과 [[고려]]∙[[조선]]의 서화들을 직접 찾아서 사진촬영 및 자신이 소장한 고미술품을 합친 화보집 《근역서화휘(槿域書畫彙)》를 출간하였다. 근역서화징은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들을 총망라한 인명 사전이다. 그 밖에도 《근역서휘》, 《근역화휘》, 《근묵》, 《근역인수》, 등을 펴내었다.
일제강점기 중반 이후 자택에 칩거하며 서예, 서체, 서화가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밖에도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 서예가, 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낙관, 인장 혹은 관련 정보들을 모아 《근역인수 (槿域印藪)》를 편찬하였으며, 여러 서화가들의 다양한 낙관과 아호 연구의 자료가 되었다. 그는 [[1918년]]에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석하였으며, [[서화협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 생애 후반 ===
==== 해방 이후 ====
[[1945년]] [[8월]] 광복 직후 [[9월]] 창당된 우익 계열의 보수 정당 [[한국민주당]]도 창당때 그를 공동 당수로 영입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한민당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도 추대되었으나 거절했다. 이어 매일신보(每日申報)의 명예사장과 서울신문 명예사장으로 추대되자 이를 수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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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귀국환영식에 참석
(맨 왼쪽 테이블에 선 이가 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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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의원]] 회의에 참석 중([[1946년]] [[2월]]), 왼쪽에 앉은 이가 오세창, 가운데는 부의장 [[김규식]], 오른쪽은 의장 [[이승만]]
[[10월 16일]] [[이승만]]의 환국 때 [[김포공항]]을 방문하여 영접하였다. 이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조직되자 회장에 추대되었고, 전국애국단체총연협회 회장으로도 위촉되었다.
임정 환국 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
46년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일명 민주의원) 의원, [[서울신문]] 명예사장 등을 지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이후 남북협상과 단정수립론이 갈렸을 때는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에 참석하였다.
==== 한국 전쟁과 최후 ====
은퇴 후, 조용히 있다가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터지자 [[대전]]을 거쳐 [[대구]]로 내려가, [[1951년]] [[4월 16일]] [[나인협]]의 장례식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대구 대봉동 31번지의 집에서 병석에 누운 지 1년만에, [[1953년]] [[12월]] 대구 대봉동 자택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병사하여, 장례식은 사회장(社會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 사후 ==
*[[일제강점기]] 동안 친일하지 않은 독립운동의 원로였기에, 광복후 고령에도 불구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위원,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일명 민주의원) 의원, [[서울신문]] 명예사장 등에 위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가족 ==
* 아버지 : [[오경석]]
* 아들 : [[오일육]](吳一六, [[장면]] 비서관, [[경무대]]·[[이기붕]] 비서관 역임)
== 저서 ==
* 《근역서휘》
* 《근역화휘》
* 《근묵》
* 《근역인수》
* 《근역서화징》
== 기타 ==
그와 비슷한 시대에 활동하던 [[황해도]] [[옹진군]] [[마산면]] 출신의 유학자 [[오세창 (1901년)|오세창]](吳世昌, [[1901년]]생)도 존재하였다.
== 같이 보기 ==
*[[독립협회]]
* [[오경석]]
* [[유홍기]]
* [[권동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장을 수여받은 사람]]
== 각주 ==
== 외부 링크 ==
; 참고 자료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http://narasarang.mpva.go.kr/data/downloadFile.asp?filename=monthhero\3%BF%F9%20%BF%C0%BC%BC%C3%A2.hwp 이 달의 독립 운동가 상세자료 - 오세창]{{깨진 링크|url=http://narasarang.mpva.go.kr/data/downloadFile.asp?filename=monthhero%5C3%BF%F9%20%BF%C0%BC%BC%C3%A2.hwp }}, 2004년
* [https://web.archive.org/web/20131202235330/http://nationalculture.mcst.go.kr/person/data/person_view.jsp?cp_seq=126 2001년 8월의 문화 인물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 《계간 문화예술》 (2001년 8월호) [http://www.kcaf.or.kr/zine/artspaper2001_08/112_113.pdf 오세창]
*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200804160022528573&s_mcd=0422&s_hcd= YTN 역사속의 오늘]{{깨진 링크|url=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200804160022528573&s_mcd=0422&s_hcd= }}
{{2001년-이 달의 문화 인물}}
{{2004년-이 달의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건국훈장 대통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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