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3/3b/%EC%97%84%EC%A3%BC%EC%9D%B5.png/200px-%EC%97%84%EC%A3%BC%EC%9D%B5.png 엄주익 (1913년 이전) '''엄주익'''(嚴柱益, [[1872년]] [[6월 26일]] ~ [[1931년]] [[4월 1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군인 겸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교육인으로 호는 춘정(春庭), 본관은 [[영월군|영월]]이다. [[조선 고종|고종]]의 귀비인 [[순헌황귀비]], [[엄준원]]의 7촌 조카가 된다. [[대한제국]] 때에 관료생활을 하다가 [[1910년]] [[한일 합방 조약]] 이후로 관직을 사퇴하고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 [[2월 11일]] [[양정의숙]]과 [[양정여자고등보통학교]]([[양정고등학교 (서울)|양정고]]와 [[양정중학교]]의 전신)을 설립하여 초대 교장이 되고, [[1907년]] [[엄귀비]]로부터 경선궁과 영친왕궁에서 전라남도 무안, 광양과 경기도 이천, 풍덕 각 군(郡)소재 토지(주로 논)총계 약 200만평을 하사받아 교육활동에 투자하였다. [[1913년]] [[2월]]에는 재단법인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 생애 == === 출생과 가계 === [[1872년]](고종 9년) [[6월 26일]] [[한성부]]에서 엄인영(嚴仁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고종|고종]]의 후비이자 [[영친왕]]의 생모 [[순헌황귀비]] 엄씨의 7촌 조카로, 엄주익은 [[순헌귀비]]의 증조부 엄성복(嚴性復)의 장남 엄재화(嚴載和)의 증손자였다. 16대조 [[엄유온]](嚴有溫)은 [[조선]]초기에 좌군도총재를 지냈다. 6대조 만향재 [[엄한붕]](晩香齋 嚴漢朋)은 [[1728년]] [[이인좌]]가 일으킨 무신난 진압에 참여하여 [[원종공신]]이 되고, [[증직|증]] [[한성부]][[좌윤]]에 추증되었다. 5대조 엄계응은 관직이 없었으나 형제인 종5대조 엄계흥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 등에서 활동한 이름 있는 시인이었다. 고조할아버지 엄성복은 사후에 [[증직|증]] [[승정원]][[좌승지]] 벼슬에 [[추증]]되었는데, 이는 종증조부 엄재우의 아들이며, 엄주익의 큰 재종조부가 되는 [[엄진일]]의 출세에 의한 증직이었다. [[엄진삼]]은 그의 양 조부 엄진필, 친 조부 엄진국의 사촌 종형제간이었다. === 관료 생활 === [[1900년]] [[농상공부]](農商工部) 통신사 통신원 전화과(通信司 通信院 電話課)를 역임했으며 [[1901년]] [[내장원]](內藏院) 종목과장(種牧課長), [[1902년]] [[군부 (대한제국)|군부]](軍部) 포공국장(砲工局長), [[한성부판윤]], [[1903년]] [[군부]] [[협판]](協辦), 그해 [[4월]]에 [[보병]][[참령]]이 되었다. 군부 협판으로 재직 중이던 1904년 근대적인 군사 제도를 시찰하기 위한 차원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의 새로운 사조에 접한 당시 일본의 새 문물에 감명을 받았다. 당시 상황에서의 급선무는 교육의 보급임을 절감한 그는 귀국 이후에 안종원(安鍾元), 이철우(李哲宇), 윤정석(尹晶錫), 박용숙(朴容淑), 장현주(張炫周), 김진현(金鎭賢), 한만용(韓晩容) 등과 함께 [[양정의숙]](養正義塾)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904년]] [[5월]] [[육군]][[참령]]이 되고 [[일본]]을 방문, 군사제도 관련 시찰을 하고 귀국했다. 그해에 [[법부]](法部) 협판, [[대한제국 육군]] 참장(參將), 군부 협판, 군부대신서리 등을 역임했다. [[1905년]] [[2월]] 서리 교츅총감이 되었다. === 교육 활동 === [[1905년]] [[2월]] 올바르게 길러서 깨우쳐준다는 '몽이양정(蒙以養正)'의 기치를 내걸고 기부금과 사재로 양정의숙을 설립하고 숙장(塾長)에 취임하였다. [[1907년]] 7월에는 [[순헌황귀비]]로부터 경선궁(慶善宮), 영친왕궁(英親王宮)에 소속된 [[전라남도]] [[함평군]](咸平郡), [[무안군]](務安郡), 광양군(光陽郡), [[경기도]] [[이천시|이천군]](利川郡), 풍덕군(豊德郡) 등 약 200만 평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양정의숙을 설립한 뒤에도 교육부총감 사무서리, 군부대신서리, 평리원 재판장, 적십자사 부사장, 육군법원장,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 11월에는 [[통감부]]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의민태자]]를 배종하기도 했다. 그 밖에 [[규장각]] 지후관(祗候官), [[경선궁]] 감무(監務) 등을 역임하는 동안 서구의 신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1910년]] [[10월 2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부터는 사망할 때까지 교육 사업에만 전념했으며 [[1913년]] 재단법인 [[양정의숙]] 의사장, 1913년 10월에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선임되었다. === 최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3/38/%EC%97%84%EC%A3%BC%EC%9D%B5_%EC%9E%A5%EB%A1%80%EC%8B%9D.png/200px-%EC%97%84%EC%A3%BC%EC%9D%B5_%EC%9E%A5%EB%A1%80%EC%8B%9D.png 엄주익 장례식 (경성부 종로구 광희정 구 훈련원 광장)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다가 [[1931년]] [[4월 26일]] 오후 9시 45분경 [[경성부]] [[종로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사망 직전 [[만주]] 동포에 구호, 위문품으로 바지 등을 기부했는데, 그가 사망하고 7개월 만에 [[만주]] 현지에 전달되었다. 장례식은 [[4월 22일]] [[양정고보]] 학교장으로 거행되어 오후 8시 관철동 자택을 나와 [[광희정]](光熙町)의 구 [[훈련원]] 광장에서 노제를 거쳐 장지로 향하였다."故 嚴柱益氏 葬儀", 동아일보 1931년 04월 23일자 2면, 사회면 학교장 장례식에는 양정고보 학생 6백여명,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의 대표 학생들, 그밖에 [[조선총독부]] 조선군 사령부에서 특별히 보내준 의장대 2백 명이 장례식을 호송하였다. 시신은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군]] (현 [[서울특별시]] [[강동구]])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 가족 관계 == 아버지 엄인영은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 엄진필의 양자가 되었다. * 고조부 : 엄성복(嚴性復) ** 종증조부 : 엄재우(嚴載祐), [[순헌황귀비]]의 친정 할아버지 *** 재종조부 : [[엄진일]] *** 재종조부 : [[엄진삼]] **** 7촌 종고모 : [[순헌황귀비]] * 증조부 : 엄재화(嚴載和) * 양 할아버지 : 엄진필(嚴鎭弼) * 친 할아버지 : 엄진국(嚴鎭國) * 친 할머니 : 경주 석씨 ** 친 삼촌 : 엄하영(嚴夏永) 호적상으로는 5촌 ** 친 삼촌 : 엄두영(嚴斗永) 호적상으로는 5촌 ** 친 고모 : 2명, 호적상으로는 5촌 * 아버지 : 엄인영(嚴仁永) ** 형 : 엄주승(嚴柱承) * 부인 : 이름 미상 ** 아들 : [[엄경섭]](嚴敬燮, [[1906년]] ~ [[1979년]] [[9월 6일]]) *** 손자 : 엄규백 ** 아들 : 엄동섭 ** 아들 : 엄태섭 ** 딸 1명 == 각주 == {{각주}} == 관련 항목 == {{Col-begin}} {{Col-2}} * [[순헌황귀비]] * [[양정의숙]] * [[엄준원]] * [[엄주명]] * [[영친왕]] * [[민원식]] * [[엄진일]] {{Col-2}} * [[양정고등보통학교]] * [[양정고등학교 (서울)|양정고등학교]] * [[양정중학교]] * [[엄진삼]] * [[이방자]] {{Col-end}}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1872년 태어남]][[분류:1931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사]][[분류:한국의 장군]][[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민원식]][[분류:영월 엄씨]][[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