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필요|날짜=2014-12-31}} '''어유구'''(魚有龜, [[1675년]] [[4월 18일]] ~ [[1740년]] [[1월 16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외척으로 [[조선 경종|경종]]의 비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학자 [[어유봉]](魚有鳳)의 동생이다. 본관은 [[함종 어씨|함종]](咸從). 자는 성칙(聖則), 호는 긍재(兢齋).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서인]] 당원이었으나 서인의 분당 이후 [[노론]]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딸은 경종비가 된 이후 [[소론]]성향으로 돌아선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조선의 공신|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경종의 장인이면서 조카사위 홍상한을 통해 사도세자빈 [[혜경궁 홍씨]]와도 인척간이 된다. == 생애 == [[1675년]](숙종 1) [[4월 18일]]에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양주시|양주군]]으로 이주하였다. [[1699년]](숙종 25) 생원, 진사 사마양시에 합격, [[태릉]](泰陵)의 참봉을 거쳐 [[1707년]] [[과거 제도|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수찬,응교 등을 지냈다. 괴원 소속으로 천거를 받아 [[성균관]]전적으로 승진하였다. [[1713년]] [[홍문록]](弘文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기성 낭청으로 옮겼다가 [[사간원]]정언, [[시강원]]사서, 시강원문학 등을 거쳐 외직으로 [[경기도]][[도사]]로 나갔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사헌부]]지평에 제수되고, [[홍문관]]수찬과 교리, 응교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를 역임하였다. 동시에 겸임으로 춘방과 [[한학]][[교수]], [[남학]][[교수]]를 지냈고, 암행어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1718년]]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로 특별히 제수되었다가, 승지 등을 거쳐 [[1718년]] 병조참지로 있을 때 딸이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이때 형 [[어유봉]]에 의하면 그는 불안하게 여겼다 한다. 곧 승선과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이후 [[호조]][[참의]]와 [[예조]][[참의]]를 여러번 역임하고 [[강화부]]유수로 발령되었다. 유수 재직 중이던 [[1720년]] [[6월]] [[조선 숙종|숙종]]이 죽고 [[조선 경종|경종]]이 즉위하자 [[돈령부]]영사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 1) 호위대장을 겸직하고, [[1721년]] 사직 [[김일경]](金一鏡) 등이 상소를 올려,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이 역모라고 규탄하여 4대신이 파직되자, 그는 오히려 노론 4대신을 옹호하며 김일경 등의 상소를 비판했다. 그 해 어영대장(御營大將) 겸 훈련대장, 22년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이때 유생 황욱(黃昱), 김수구(金壽龜) 등이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 부자의 사면과 복권을 상소하자, 그는 [[윤증]]에 대해 스승을 배반한 죄를 지적하며 이들의 복권을 반대하였다. [[1722년]](경종 3) [[목호룡]]의 고변 사건에 참여한 부사공신(扶社功臣)을 녹훈할 때, [[김일경]]이 공신으로 어유구도 포함되어야 된다고 하자 이를 불편하게 여겨 [[양주시|양주군]]으로 내려갔다. [[조선 경종|경종]]이 [[소론]]에 기울었던 것에 반해 어유구는 [[신임사화]] 때 [[노론]](老論)을 극력 옹호하였고 유생들이 건의한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 부자의 신원과 복직에 반대하였다. [[1722년]](경종 3)에는 [[사간원]]사간 정해(鄭楷)가 그가 [[노론]]을 비호한다며 논죄하였다. 그 뒤 경기도 [[양주시|양주]](楊州)에 낙향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 [[조선 영조|세제]]가 영조로 즉위하자 [[노론]] 일각에서 그가 [[신임사화]] 때 내통했다며 심문하자는 건의를 하였으나 영조가 이를 거절, 무마시켰다. [[영조]] 때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조선의 공신|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735년]] 훈련대장, [[1736년]] 수어사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다시 어영대장에 임명되어 세번을 어영대장을 역임했다. 문집에 《긍재편록 (兢齋編綠)》, 《농암사단칠정변 (農巖四端七情辨)》 등이 있다. [[1739년]] 가을에 병에 걸려 여러번 사직을 청하여 [[어영대장]]에서 물러났다. [[1740년]] [[1월]] [[감기]]에 걸렸다가, [[감기]]가 악화되어 그해 [[1월 16일]]에 사망했다. 사후 [[증직|증]] [[의정부시|의정부]]에 추증되었다. 묘비문은 그해 [[6월]] 형 [[어유봉]]이 지었는데, 그의 사망 원인을 [[1740년]] [[1월]] [[감기]]에 걸려 1월 16일에 사망했다고 상세히 기록하였다. == 저서 == * 《긍재편록 (兢齋編綠)》 * 《농암사단칠정변 (農巖四端七情辨)》 == 가족관계 == * 고조부 : 어몽린(魚夢獜) ** 증조부 : 어한명(魚漢明) *** 할아버지 : [[어진익]](魚震翼) **** 아버지 : [[어사형]](魚史衡) **** 어머니 : 유씨(柳氏) - 유거의 딸 ***** 형 : [[어유봉]](魚有鳳) ***** 형수 : [[김수증]]의 딸 ****** 조카 : 어석윤(魚錫胤) **** 장인 : 이하번(李夏蕃) - [[조선 중종|중종]]의 5세손 ***** 본인 : [[어유구]](魚有龜) - [[조선 경종|경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 처 : 완릉부부인(完陵府夫人) [[전주 이씨]] ****** 장녀 :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 ****** 사위 : [[조선 경종|경종]] ****** 차녀 : [[함종 어씨]] ****** 사위 : [[청송 심씨]] 심이지(沈履之, 1720년 ~ 1780년, 이조참판) - 호조판서 [[심이지 (1735년)|심이지]](沈頤之, 1735년 ~ 1796년)의 사촌, 이조판서 [[심수 (조선)|심수]](沈鏽, 1707년 ~ 1776년)의 조카, 광주목사 · 증 이조참판 심탁(沈鐸)의 아들, 담양부사 · 증 좌찬성 심계현(沈啓賢, [[심택현 (조선문신)|심택현]]의 형)의 손자 ******* 외손자 : 심능필(沈能弼, 정주목사) - 좌의정 [[홍인한]](洪麟漢, 1722년 ~ 1776년)의 사위 ****** 장남 : 어석정(魚錫定) ****** 며느리 : [[청송 심씨]] - [[조선 영조|영조]]의 [[의빈부|부마]] 청성위 [[심능건]](靑城尉 沈能建, 1752년 ~ 1817년)의 고모, 삭녕군수 · 증 영의정 심정지(沈鼎之)의 여동생, 해주목사 · 증 좌찬성 심규(沈규)의 딸, 이조판서 · 좌참찬 · 판돈녕부사 청헌공 [[심택현 (조선문신)|심택현]](淸獻公 沈宅賢, 1674년 ~ 1736년)의 손녀 *** 종조부 : 어진열(魚震說) == 기타 == * 그의 형 [[어유봉]]의 문하생이자 사위가 [[홍상한]]이다. 홍상한의 삼촌 홍현보의 아들이 [[홍봉한]], [[홍인한]], 홍용한, 홍준한 4형제이다. 조카사위 [[홍상한]]을 통해 [[혜경궁 홍씨]]와도 인척간이 된다. * [[어유구]]의 외손자 심능필은 [[어유구]]의 사위 심이지의 아들이고, 심능필은 [[홍인한]]의 사위이다. == 함께 보기 == * [[어유봉]] *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 * [[희빈 장씨]] * [[조선 경종|경종]] * [[심호]] * [[단의왕후]] * [[심유현]] * [[심택현 (조선문신)|심택현]] * [[심수 (조선)|심수]] * [[심이지 (1735년)|심이지]] * [[심능건]] {{토막글|조선|한국 사람}} [[분류:1675년 태어남]][[분류:1740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 숙종]][[분류:조선 영조]][[분류:조선 장조]][[분류:조선의 공신]][[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함종 어씨]][[분류:조선의 부원군]][[분류:감기로 죽은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