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덕'''(安商悳, 일본식 이름: 安國商悳, [[1880년]] [[7월 22일]] ~ [[1950년]] [[11월 23일]])은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천도교]] 지도자이다. == 생애 == [[서울특별시|서울]] [[용산구]] 출신이다. 30세이던 [[1919년]]에 [[3·1 운동]]에 [[천도교]] 신자로서 가담했다.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사람으로 참가한 [[이종일 (1858년)|이종일]]은 [[기미 독립 선언서]]의 인쇄를 담당했다. 안상덕은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인수받아 천도교 지방 조직을 이용하여 [[함경도]]와 [[강원도]] 지역에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전국적인 만세시위로 자신감을 얻은 항일 세력은 임시정부의 수립을 계획했다. 안상덕은 천도교 대표로서 그해 [[4월 2일]] [[인천]]에서 [[기독교]]의 [[이규갑]], [[불교]]의 [[이종욱 (승려)|이종욱]] 등과 함께 국민대회에 이은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했고, [[4월 19일]]에 거사 자금을 거출한 뒤 [[4월 23일]]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었다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1920년대 이후 천도교는 오랜 내분 사태에 휘말렸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최린]]은 합법적 자치운동이나 문화운동과 같은 타협적인 노선을 내세워 신파를 형성했고, 이에 반대해 [[신간회]]에 참여한 세력은 구파가 되었다. 안상덕은 [[이종린 (1883년)|이종린]] 중심의 구파 계열 교역자로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일제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강압적인 전시체제가 구축되면서 천도교단은 [[1939년]]에 효율적인 전쟁 지원과 국방헌금 모금을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안상덕은 이 단체의 이사를 지냈고, 이듬해 조직이 개편되어 국민총력천도교연맹이 출범했을 때는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3·1 운동 관련 공적으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독립유공자이다. == 같이 보기 == * [[한성임시정부]] * [[조선임전보국단]] == 참고자료 == * {{독립유공자|4223|안상덕}} * {{서적 인용 |저자=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제목=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날짜=2004-12-27 |출판사=민족문제연구소 |출판위치=서울 |id={{ISBN|8995330724}} |페이지=390,595,626쪽 }} [[분류:1880년 태어남]][[분류:1950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천도교 교역자]][[분류:대한민국의 천도교 교역자]][[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