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학'''(沈相學, [[1830년]]/[[1845년]] ~ [[1890년]] [[5월 10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 관료이자 외교관이다. [[승문원]]과 [[홍문관]] 등에 근무할 때 겸직으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임명되어 [[대한제국 순종|세자 척]](뒷날의 [[대한제국 순종|순종]]을 가르쳤다. [[순원왕후]]의 외종손이고[순원왕후의 외삼촌 심능적(沈能迪)이 심상학의 증조부, 심영의 5대조가 된다.], [[연극]][[배우]] 겸 [[영화]][[배우]], 탤런트인 [[심영 (1910년)|심영]](沈影)의 할아버지이다. 그러나 [[심영 (1910년)|심영]]의 아버지 심완섭은 심상학의 서자였다. 자(字)는 덕초(德初), 본관은 [[청송 심씨|청송]](靑松)이다.
1863년(철종 13년)부터 [[조선 철종|철종]]이 친히 주관하는 응제에 2등으로 합격한 이후, 고종이 정기적으로 주관하는 각종 응제에 3등 이상의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음서 제도]]로 관직에 올라 잠시 [[의금부]]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초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직부전시 자격을 받고 [[과거 제도|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1873년(고종 10년) 문과에 급제, [[규장각]], [[승정원]], [[홍문관]] 등에서 근무하고 [[승지]], [[이조]][[참의]], [[예조]][[참의]], [[호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881년]](고종 18)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파악하라는 밀명을 받고 [[어윤중]] 등과 함께 [[신사유람단]](조사 시찰단)원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파견, 근대적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귀국했으며, 귀국 직후 [[동래부]]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감찰을 하고 귀경했다. 이후 [[예조]][[참판]], 동지성균관사 등을 거쳐 [[1886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부사로 다녀왔으며, 전라우도[[암행어사]]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협판교섭통상사무와 [[호조]][[참판]](戶曹參判), 안악군수를 역임했다.
외교관 경력으로는 일본의 조사시찰단원 파견 4개월, 독일 등 유럽 주5개국 주차파견전권대신, [[1886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동지부사 등을 수행하였다.
== 생애 ==
=== 생애 초반 ===
[[1830년]](순조 30) 또는 [[1845년]](헌종 12년)에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나 생일은 미상이며, 본적지는 [[경기도]] [[시흥시|시흥군]]이었다. 본관은 청송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효정공 [[심경택]](沈敬澤)이고, 어머니는 양주조씨로 현령과 목사(牧使)를 지낸 조이순(趙臣+頁淳)의 딸이다. 할아버지 심의복은 현감(縣監)이며, 고조부는 [[심건지]]로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장인이며, [[조선 순조|순조]]비 [[순원왕후]]의 외할아버지였다.
그는 이순익(李純翼)의 딸 연안이씨와 결혼했지만, 본부인 연안이씨에게서 자녀를 1명도 얻지 못하여 결국 14촌 친척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했다. 첩에게서 얻은 아들은 심완섭으로, 심완섭은 초기에 날품팔이로 생활하다가 뒤늦게 재산을 모아 [[철원군|철원]][[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심영은 심완섭의 아들이다.
[[1863년]](철종 14) [[9월]] 철종이 친히 주관하는 칠석제(七夕製)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바로 직부전시의 자격이 주어졌지만 과거에 응시하지는 않았으며, [[1865년]](고종 2) [[1월]] 고종이 춘도기(春到記) 강(講), 부, 치사를 시험할 때 치사 부분에서 2등을 하여 직부회시(直赴會試)의 명을 받았다. [[음서 제도|음서제]]로 관직에 출사하여 [[의금부]] 금오랑이 되었다.
[[1867년]](고종 4) 식년시(式年試)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1868년]](고종 5) [[3월]]고종이 친히 주관한 인일제에 4등을 하여 고종으로부터 친히 《규장전운(奎章全韻)》을 하사받았다.
=== 과거 급제와 관료생활 ===
[[1873년]](고종 10) [[7월]] 고종이 경무대(景武臺)에서 친히 주관한 칠석제(七夕製)에 3등으로 합격하여 바로 과거에 직부전시할 자격이 부여되었으며, 그 해의 [[과거 제도|문과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 30등으로 급제하였다. 바로 [[권지]][[승정원]]가주서가 되고, [[7월 19일]] 부사정, [[7월 21일]]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가 되고 그해 [[12월]]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했으며, [[1874년]](고종 1) [[1월]] 좌직주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승정원]]좌직주서직과 [[춘추관]]기사관으로 사관의 일을 맡아보았으나 그해 [[3월]]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곧 복직하여 다시 좌직주서와 춘추관기사관으로 사관 일을 1875년까지 수행하였다. 그밖에 경연관이 되어 [[경연]](經筵)에도 참여하였다.
[[1875년]] [[규장각]]에 들었고 바로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받았지만 직각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듬해 본관록과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이후 동벽(東壁)에 올라 [[홍문관]]과 [[승정원]] 승지 등을 거쳐 [[이조]][[참의]], [[예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또한 겸직으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겸하여 [[대한제국 순종|세자 척]](후일의 순종)에게 [[성리학]] 학문을 보도하였다.
[[1876년]] 부교리와 교리에 임명되고 중학교수직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을 청하여 중학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1877년]] [[홍문관]]부수찬에 임명되고 바로 겸임 [[어영청]]종사관직을 겸임하였다. 이 해 [[3월]] 잠시 부사과로 전직되었다가 다시 부수찬 겸 어영청종사관이 되고, 그해 [[6월]] [[병조]][[정랑]], 12월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1880년]](고종 17) [[홍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부교리 등을 역임했다. [[1880년]](고종 17) [[8월]] [[조선 고종|고종]]이 진전(眞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때의 제관인 상례(相禮)로 참여, 찬례(贊禮) 이하 제관들에게 시상할 때 상을 받고 [[당상관]]으로 가자되었다. [[1881년]](고종 18)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정식 전문위원으로 선발, [[어윤중]] 등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어 4개월간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적 문물과 행정 제도를 시찰, 연수하고 돌아왔다. 귀국 직후 바로 동래부 [[암행어사]](東萊府暗行御史)에 임명되어 [[경상남도]] [[동래부]]와 [[부산부]] 지역을 암행하고 [[한성]]으로 입경하였다. [[1881년]] [[12월]] [[평안남도]] 성천부사(成川府使) 겸 성천진관(成川鎭管)으로 부임했다가 얼마 뒤 다시 되돌아왔다. 그 뒤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어 7사(司) 가운데 [[경리통리기무아문]]의 부[[경리통리기무아문]]사(副經理統理機務衙門事)에 임명되어, 개화 정책의 실무 업무를 맡게 되었다.
=== 생애 후반 ===
[[1884년]](고종 21) 관제 개편 시 [[예조]][[참판]]에서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 전직되었으며[예조는 외무아문으로 개편되었다.], 같은 해 [[영국]], [[독일]], [[프랑스]], [[벨기에]], [[러시아]] 등 5개국의 주[[유럽]] 5개국 [[특파전권대신]](特派全權大臣)로 임명, 파견되었다가 병으로 사퇴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었으나, 재직 중 신병이 생겨서 사퇴하였다. 이 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7월]] 부호군, 첨지 등을 역임하고 다시 그해 [[8월]] 부호군에 임명되어 전라우도암행어사로 파견, [[1885년]] [[2월]]에 귀환했다. [[1886년]](고종 23) [[4월]] [[이조]][[참의]]를 거쳐 그해 [[7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었다. [[1886년]] [[10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행에 선발되어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임명되어 [[청나라]]를 방문하고 그해 [[11월]] 귀국하였다. [[1887년]] 전라북도 [[암행어사]](全羅右道暗行御史)로 파견되었다가 그해 [[4월]] 귀경하였다. 귀경 직전인 [[1887년]] [[4월]] 동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며칠 뒤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병조]][[참판]]으로 임명, 도착하자마자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 해 [[7월]] [[홍문관]][[제학]]에 임명되고, 그해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 병으로 사퇴하였다. 이후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 해 [[8월 15일]] 정부당상(政府堂上)에 임명되고, [[9월 7일]] 고종이 전강에서 유생들을 시험할 때 시험의 고관(考官)으로 참여하였다.
[[1887년]](고종 24) [[11월 7일]] [[승정원]][[좌승지]]에 임명되어 [[12월 24일]] [[한성부]]좌윤, [[1888년]](고종 25) [[1월 4일]]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2월 3일]] 다시 [[승정원]][[좌승지]]가 되었다. [[1888년]](고종 25) [[12월 9일]]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임명되어 가던 중 [[12월 13일]] [[안악군]]이 자리가 비었다 하여 [[안악군|안악]][[군수]](安岳郡守)로 발령되었다. [[1890년]](고종 27) [[5월 10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 사후 ===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시흥군]](현,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시]]) 산 좌쪽 언덕의 자좌(子坐)에 있다. 그의 서자 심완섭의 묘는 시흥군 건좌에 있다.
== 가족 관계 ==
* 할아버지 : 심의복(沈宜復, [[1788년]] ~ ?)
* 할머니 : 전주이씨, 이정규(李鼎圭)의 딸
* 아버지 : 심경택(沈敬澤, [[1809년]] ~ [[1869년]] [[5월 10일]])
* 어머니 : 양주조씨(楊州趙氏 [[1808년]] ~ [[1877년]]), 조이순(趙頤淳)의 딸
* 부인 : 연안 이씨([[1847년]] ~ [[1913년]] [[6월 8일]]), 자녀 없음
** 양아들 : 심기섭(沈琦燮, [[1878년]] ~ [[1932년]] [[2월 16일]])
* 첩 : 이름 미상
** 서자 : 심완섭(沈琬燮, [[1886년]] ~ [[1908년]] 혹은 [[1968년]] [[12월 14일]])
** 서며느리 : 강릉 김씨([[1886년]] ~ ?), 군수 김병섭(金秉燮)의 딸
*** 서손자 : [[심영 (1910년)|심영]](沈影, [[1910년]] 또는 [[1909년]] ~ [[1971년]])
* 외할아버지 : 조이순(趙頤淳, [[1786년]] ~ ?)
* 외할머니 : 광산김씨(光山金氏), 김상휴(金相休)의 딸
== 기타 ==
[[효명세자]] 익종은 그의 증대고모 청양부부인 심씨의 외손자로서, 그에게는 내재종숙부가 된다.
정확한 출생년대가 전하지 않아 [[1908년]]생 또는 [[1909년]]생 설이 있으며, 족보에는 [[1910년]]생으로 등재된 그의 서손자 [[심영 (1910년)|심영]]은 그가 죽은지 한참 뒤에 태어났다.
== 관련 항목 ==
* [[심영 (1910년)|심영]]
* [[통리기무아문]]
* [[암행어사]]
* [[심환지]]
* [[심건지]]
* [[김조순]]
* [[조선 순조|순조]]
* [[조선 문조|익종]]
* [[순원왕후]]
* [[어윤중]]
* [[신사유람단]]
== 참고 문헌 ==
* 고종실록
* 승정원일기
* 비변사등록
* 일성록
* 청선고
== 각주 ==
{{각주}}
[[분류:생년 미상]][[분류:1890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통역]][[분류:조선 순조]][[분류:조선 문조]][[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조선의 작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청송 심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