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정보
| 이름 = 우창 신석우
| 원래 이름 = 于蒼 申錫雨
| 국적 = {{KOR}}
| 출생일 = {{출생일|1895|9|2}}
| 임기 = 1949년 3월 ~ 1950년 1월
| 대통령 = [[이승만]]
| 부통령 = [[이시영 (1868년)|이시영]]
| 총리 = [[이범석 (1900년)|이범석]]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53|3|5|1895|9|2}}
| 사망지 = {{KOR}} [[부산광역시|경상남도 부산]]
| 거주지 = {{KOR}} [[서울특별시]]
| 본관 = [[고령 신씨|고령]](高靈)
| 직책 = 前 중화민국 타이완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
| 학력 = [[일본]] [[와세다 대학|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과 [[학사]][ [http://www.snmb.mil.kr/cop/cyberWorship/selectCyberWorshipPop.do?siteId=snmb&category=3&burialDev=1&typicalNum=234185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위패 목록]]
| 종교 = [[개신교]]([[침례교|침례회]])
| 배우자 = 이범숙(초취), 강익주(후취)
| 친인척 = [[이문하 (1872년)|이문하]](장인)
강회진(장인)
이범호(처형)
[[이범석 (1900년)|이범석]](처남)
| 자녀 = 슬하 3남 2녀
| 정당 = [[무소속]]
| 경력 =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상임위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하이 주재 대한 임정]] 교통총장
[[한국독립당]] 교통도시행정위원
[[한국독립당]] 국방외교행정위원
| 서훈 = 1995년 {{KOR}}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웹사이트 = [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3998&ipp=10000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c/cf/Lee_Beom-seok_194809.jpg/230px-Lee_Beom-seok_194809.jpg
신석우 前 타이완 주재 대사의 처남인 철기 이범석 前 대한민국 국무총리
'''신석우'''(申錫雨, [[1895년]] [[9월 2일]] ~ [[1953년]] [[3월 5일]])는 [[한국의 독립 운동|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의 국호를 발의한 인물이기도 하다.
[[본관]]은 [[고령 신씨|고령]](高靈). 호(號)는 우창(于蒼)이다. 그의 상배 전처는 [[이범석 (1900년)|철기 이범석]] 선생의 동복 둘째 누나이다.
== 생애 ==
신석우는 [[상하이 시|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통총장을 지냈으며,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의 첫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의 국호를 발안했다. 국호를 정하기 위해 회의를 할 때 신석우가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국호를 정하자고 하니 [[여운형]]이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또 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그러자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고 부연 설명을 하자 다들 좋다고 만장일치[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자는 신석우의 제안에 대해 만장일치가 아니라 표결에 부쳐 다수결로 정했다는 주장도 있다.]로 결정이 되었다고 한다.[송승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385157 《우리가 몰랐던 우리 역사: 나라 이름의 비밀을 찾아가는 역사 여행》], 학민사, 2013년 12월 10일.]
신석우는 1924년 30세의 나이에 만석꾼 부친을 설득해 8만 5천원을 주고 [[조선일보]]를 인수하였다. 만성적인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는 신석우의 인수로 재도약 계기를 마련했으며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신석우는 1927년 2월 15일 오후 7시 경성 종로 기독교 청년회 대강당에서 열린 [[신간회]](新幹會) 창립총회에서 사회를 맡았고 이상재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되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신석우는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에게 조선일보 사장직을 물려주고 상해로 탈출했다.
광복 후 신석우는 [[1949년]] [[중화민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논란 ==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三千里)]]》는 1936년 6월호 기사에서 장안의 유명 인사들이 타고 다니던 자동차 가격표를 공개한 적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신석우가 조선일보 사장 시절에 타고 다니던 승용차 1대의 가격은 7,000원으로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8억 4천만원에 이른다.
== 각주 ==
== 외부 링크 ==
* [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3998&ipp=10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 신석우]
{{중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
[[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분류:1895년 태어남]][[분류:1953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사람]][[분류:한국독립당의 당원]][[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조선일보]][[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중화민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고령 신씨]][[분류:대한민국의 침례교도]][[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러시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자유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