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필요|날짜=2013-08-21}} '''성원묵'''(成原默, [[1785년]] ~ [[1865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인이자 학자, 서예가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829년]] 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바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어, [[1831년]](순조 31년)의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대사간, 대사헌 등을 거쳐 1851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참판, 공조판서, 부호군, 의정부우참찬, 한성부 판윤,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창녕 성씨|창녕]]으로 자는 계연(季淵) 또는 중연(仲淵)이고,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 생애 == [[1785년]](정조 9년) 성노주(成老柱)와 최창걸(崔昌傑)의 딸 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계 [[성혼]]의 후손으로, [[성문준]]의 7대손이며 증조부는 성광석(成光錫)이고 할아버지는 성덕유(成德游)이다. 부인은 이운빈(李運彬)의 딸이다. [[음서 제도|음보]]로 관직에 올라 [[동궁]]에서 근무하던 중 [[1829년]](순조 29)에 [[조선 문조|효명세자]]가 [[성균관]]에서 친히 주관한 감시(柑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소과와 대과를 거치지 않고 바로 1831년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모사도감도청(模寫都監都廳)이 되고 이후 [[조선 헌종|헌종]] 초에 [[홍문관]]과 [[사간원]], [[사헌부]]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843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 행안변도호부사(行安邊都護府使)로 부임하였다. [[1846년]](헌종 12년) [[사간원]]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1849년]](철종 즉위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동반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강등되었다. [[1851년]](철종 2년) [[2월]] [[경연]][[참찬관]]이 되었다가 [[7월]] 다시 [[가선대부]]가 되어 [[호조]][[참판]](戶曹參判) 겸 [[성균관]]동지사가 되었다. 그해 말,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로서 [[베이징]]에 갔다가 [[1852년]] 귀국했다. 그뒤 공조판서, 행용양위부호군, 의정부우참찬,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856년]](철종 7년)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그해 [[11월]]에는 예조판서로 [[비변사]]유사당상을 겸직하였다. [[1858년]]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大護軍) 으로 전임되고 1865(고종 2년)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 관련 항목 == * [[성재구]] * [[성재기 (조선 사람)|성재기]] [[분류:1785년 태어남]][[분류:1865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음서]][[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창녕 성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