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정보 | 이름 = 석금성 | 본명 = 석정의 또는 석정희 | 출생일 = {{출생일|1907|12|3}} | 출생지 = {{국기|대한제국}} [[한성부]]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95|9|3|1907|12|3}} | 사망지 = {{국기|대한민국}} | 다른이름 = | 배우자 = 이충진,[[최승일 (1901년)|최승일]] | 웹사이트 = }} '''석금성'''(石金星, [[1907년]] [[12월 3일]] ~ [[1995년]] [[9월 3일]])은 [[한국]]의 [[배우]]이다. 본명은 석정의(石丁義) 또는 석정희(石丁羲)이다. == 생애 == [[한성부]] 출신으로, 어릴 때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기생]]이 되었다. 관객으로 극장에 갔다가 극작가 [[이서구 (1899년)|이서구]]에게 발탁되어 [[토월회]]에 입단하면서 배우로 데뷔하였다. 데뷔작은 [[1925년]]에 공연된 《추풍감별곡》이다. 여배우가 희소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곧 토월회의 간판급 배우로 성장하였으나, 데뷔하던 해 연말에 [[충청남도]] [[서산군]]의 부호 이충진과 결혼하면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결혼 생활이 3년 여만에 파탄을 맞아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복귀 후 영화에도 출연하고 토월해 재기공연에 출연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크게 흥행한 토월회의 연극 《아리랑고개》에서 봉이 역으로 주목받았다. 토월회 해체 후에는 [[미나도좌]] 신극부에 합류하고 [[신흥극장]] 창립에다 가담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파적 경향의 문예운동가이자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인 [[최승일 (1901년)|최승일]]과 만나 두 번째로 결혼하게 되었다. [[1932년]]에 토월회의 후신인 [[태양극장]]이 창립되자 이 곳에서 활동하면서 [[신민요]]나 촌극 음반을 출반하는 가수 활동도 병행했다. 영화에도 간헐적으로 출연했으나, 딸 [[최로사]] 등 자녀들을 키우며 육아에 전념하느라 종전과 같이 "조선의 대표적인 여배우"로서의 활동은 줄어들었다. 석금성에게 주어지는 배역도 점차 주연에서 조연으로 변화해갔다. [[1948년]]에 최승일이 사남매를 데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을 때 시부모를 모시느라 따라가지 못했다가 인생의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한국 전쟁]] 후부터 다시 개성이 강한 조연으로 영화계와 텔레비전 드라마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80대까지 연기를 계속하여 한국 연계계의 산 증인로 불렸다. 맏딸 최로사는 한국 전쟁을 거치며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막내아들 [[최호섭 (무용가)|최호섭]]은 고모 최승희를 따라 무용가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석금성은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북조선으로 간 자녀들과 다시 만나기를 원했으나, 1995년에 노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 외부 링크 == * {{KMDb 사람|00004509|석금성}} * {{IMDb 이름|1167565|Geum-seong Seok}}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제목=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id={{ISBN|9788990626264}} |페이지=167~170쪽}}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1995년 죽음]][[분류:기녀]][[분류:일제 강점기의 연극 배우]][[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배우]][[분류:일제 강점기의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진명여자고등학교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