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정보
| 이름 = 서광제
| 본명 =
| 출생일 = [[1901년]]
| 출생지 = {{국기나라|대한제국}} [[한성부]]
| 국적 =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사망일 = ?
| 사망지 =
| 다른이름 =
| 직업 = [[영화 감독]], [[영화 각본|각본가]], [[평론가]]
| 종교 =
| 활동기간 =
| 배우자 =
| 자녀 =
| 웹사이트 =
| 수상 =
}}
'''서광제'''(徐光霽, [[1901년]][{{저널 인용
|저널=삼천리
|volume=제13권
|issue=제6호
|연도=1941|제목=제1기 영화인 등록자, 영화인 58명 등록
}}][{{서적 인용
|저자=김재용 외
|제목=재일본 및 재만주 친일 문학의 논리
|날짜=2003-06-20
|출판사=역락
|출판위치=서울
|id={{ISBN|8955563132}}
|장=보론 - 3. 친일 영화의 분류와 자발성}}][{{서적 인용
|저자=강옥희, 이영미, 이순진, 이승희
|제목=식민지 시대 대중 예술인 사전
|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id={{ISBN|9788990626264}}
|페이지=159쪽}}] ~ ?)는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한국]]의 [[영화 감독]]이자 [[영화 각본|각본가]], [[평론가]]이다. 본관은 [[달성 서씨|달성]]이다.
== 생애 ==
[[한성부]] 출신으로 [[남대문상업학교]]를 졸업했다.[[[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 대학]]에서 수학했다는 기록도 있다. {{서적 인용
|저자=강옥희, 이영미, 이순진, 이승희
|제목=식민지 시대 대중 예술인 사전
|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id={{ISBN|9788990626264}}
|페이지=159쪽
|인용문=동대문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와 메이지 대학에서 수학했다.}}] 이후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생을 거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참가하면서 영화계에서 활동했다.
[[1928년]] 김유영이 연출한 경향파 영화 《유랑》에 출연했다. 《유랑》은 식민지의 비참한 현실을 묘사한 작품으로, [[임화]]도 배우로 출연했다. [[강호 (1908년)|강호]]가 연출한 《지지마라 순이야》에도 출연했다. 한편, 조선영화예술협회가 서울 키노로 개칭하고 제작한 영화 《화륜》에서는 각본과 편집을 맡았다.
영화 평론가로서는 조선 영화 비평과 경향파 영화 이론의 소개에 집중하였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을 소개하기도 했다. 1929년 김유영과 함께 [[신흥예술가동맹]]을 설립한 뒤 카프의 강경파인 임화와는 대립하면서 카프를 탈퇴하였다. [[1932년]]에는 역시 김유영과 함께 [[도쿄]]로 건너가 영화 공부를 했다. 1933년 10월 5일 [[윤백남]]의 주례로 연극 배우 [[김선초]]와 결혼했다.[{{뉴스 인용
|제목=演藝界 消息, 徐光霽 金仙草 兩氏 結婚
|출판사=동아일보
|날짜=1933-10-05
|쪽=6면
}}]
[[1938년]] 데뷔작으로 《군용 열차》를 연출했는데, 군수품을 나르는 군용 열차의 조선인 직원들과 이들을 매수하려는 [[중국인]] 스파이가 등장하는 내선일체 홍보 영화이다. 《군용 열차》 발표를 기점으로 [[태평양 전쟁]] 종전 때까지 친일 영화가 다수 제작되기 때문에 선구적인 친일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당시 높은 인기를 누리던 배우 [[문예봉]]이 여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친일 영화인 모임인 [[조선영화인협회]]의 이사를 맡았고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에도 참가했다. 1940년 발표한 〈신체제와 영화〉는 [[조선 영화령]]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서적 인용
|저자=편집부
|제목=한국영화사연구
|날짜=2003-02-03
|출판사=새미
|출판위치=서울
|id={{ISBN|8956280614}}
|페이지=243쪽}}]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는 경향파 영화 이론에, 1930년대 중반부터는 [[할리우드]]의 고전적 리얼리즘 영화 미학에 입각한 평론 활동을 벌였다. 전향 이후의 작품인 《군용 열차》는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의 문법을 차용했다.
광복 후에는 카프 경력을 바탕으로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다. 1945년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을 맡았고[{{서적 인용
|저자=편집부
|제목=한국 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
|날짜=1999-12-22
|출판사=시공사
|출판위치=서울
|id={{ISBN|895270522X}}
|페이지=194~198쪽}}], 좌익 강경파를 대표하는 [[추민]]과 맞서 현실론을 주창하여 간접 논쟁을 벌였다. 추민과 서광제는 해방 공간에서의 영화 운동을 이끌어가는 양대 축이었다.[{{서적 인용
|저자=편집부
|제목=한국 영화사 연구
|날짜=2003-02-03
|출판사=새미
|출판위치=서울
|id={{ISBN|8956280614}}
|페이지=245쪽}}] 추민이 영화 동맹의 정치적 역할을 강조한 반면, 서광제는 《[[신천지 (잡지)|신천지]]》에 발표한 〈조선 영화론〉(1946)을 통해 좌익소아병과 정치소아병을 비판하고 영화 예술과 정치의 분리를 통한 영화 동맹의 개조가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미군정]] 시기에 소군정 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정현웅 (화가)|정현웅]]이 장정을 맡은 《북조선 기행》(1948)이라는 책을 남기기도 했으며, 이 무렵인 1948년경에 월북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나리오 위원회에 소속되어 《위대한 역사》 등의 시나리오를 썼다.[{{저널 인용
|제목=씨나리오 위원회 상반기 사업
|저널=영화 예술
|연도=1949
|작성월=3
|쪽=50쪽}}] [[한국 전쟁]] 이후 [[남로당]] 계열이 숙청당하던 1950년대 후반에 이색분자로 비난 받은 기록이 있다.[{{뉴스 인용
|저자=신고송
|제목=라운규와 아리랑
|출판사=문학신문
|날짜=1957-07-25
}}]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참조 ==
{{각주}}
* {{서적 인용
|저자=강옥희, 이영미, 이순진, 이승희
|제목=식민지 시대 대중 예술인 사전
|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id={{ISBN|9788990626264}}
|페이지=159~160쪽}}
== 외부 링크 ==
* {{KMDb 사람|00014473|서광제}}
[[분류:1901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배우]][[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감독]][[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각본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평론가]][[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 배우]][[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 감독]][[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 각본가]][[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 평론가]][[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분류:달성 서씨]][[분류:조선영화동맹의 인물]][[분류: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