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뜻|[[완풍군]]}}
{{출처 필요|날짜=2016-6-3}}
{{왕족 정보
| 이름 = 상계군
| 원래 이름 = 常溪君
| 본명 = 이담
李湛
| 출생일 = [[1769년]] [[1월 21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786|11|20|1769|1|31}}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강화군|강화유수부]]에서 병사(의문점을 남긴 음독 절명)
| 작위 = [[군 (작위)|군]](君)
| 왕조 = {{국기나라|조선}}
| 별호 = [[아명|초명(初名)]]은 '''이준'''(李濬)· '''이식'''(李湜)
처음 [[작위]]는 '''완풍군'''(完豊君)
| 배우자= [[군부인 신씨 (상계군)|상계군부인 신씨]]
| 자녀= [[이희 (1824년)|익평군 이희]](양자)
| 종교= [[유교]]([[성리학]])
| 아버지= [[조선 정조|정조]](양부)
[[은언군]](생부)
| 어머니 = [[원빈 홍씨]](양모)
[[효의왕후|효의왕후 김씨]](양적모)
[[군부인 송씨|상산군부인 송씨]](생모)
| 친인척 = [[조선 영조|영조]](증조부)
[[영빈 이씨]](친증조모)
[[정빈 이씨]](양증조모)
[[정성왕후|정성황후 서씨]](적증조모)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계적증조모)
[[조선 장조|사도장헌세자]](친조부)
[[숙빈 임씨]](친조모)
[[헌경왕후|혜경궁 헌경의황후 홍씨]](적조모)
[[조선 진종|효장세자]](양조부)
[[효순왕후|효순황후 조씨]](양조모)
[[의소세손]](큰아버지)
[[은신군]](작은아버지)
[[은전군]](작은아버지)
송낙휴(친외조부)
[[홍국영]](양외숙부)
[[풍계군]](동복 아우)
이창순(동복 아우)
이창덕(동복 아우)
[[이성득 (조선 왕족)|이성득]] (이복 동생)
[[이철득]](이복 동생)
[[전계대원군]](이복 동생)
[[조선 철종|철종]](이복 조카)
}}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 [[1769년]] [[1월 21일]] ~ [[1786년]] [[11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초명(初名)은 '''이준'''(李濬)이다. 그는 [[조선 정조]]의 이복 조카이자 [[조선 철종]]의 백부가 된다.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 초명은 준(濬)이며 뒤에 담(湛)으로 개명하였다. 다른 이름은 '''식'''(湜)이다.
그는 [[조선 영조]]의 서증손자(庶曾孫子)이기도 하며 [[조선 영조|영조]]의 차남(次男)인 [[조선 장조|사도장헌세자]]의 서손자(庶孫子)이자 [[은언군]](恩彦君)의 장남(長男)이다. [[1779년]] [[원빈 홍씨]]의 상에 빈전 대전관과 수묘관으로 참여하고 소의대부 완풍군(完豊君)에 임명되었으며, [[홍국영]] 등에 의해 [[원빈 홍씨]]의 양자가 되었다. 한때 왕의 잠재적 후계자로 지명되어 가[[동궁]](假東宮)으로도 불렸다. [[1780년]] 다시 상계군으로 개봉되고 이름은 준에서 담으로 개명되었다.
[[조선 정조|정조]]가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연령이었으나 원빈이 자녀 없이 사망하여 [[홍국영]], [[송덕상]] 등에 의해 이복 백부 [[조선]] [[조선 정조|정조]]의 양자로 내정되고, 이것이 결국 화근이 되어 역모로 몰리게 되었다. [[1786년]](정조 10) [[11월]] 신오의 딸 군부인 신씨와 혼례를 치른 뒤 의문의 음독 사망하는데, 자살설 외에도 [[은언군]]에 의한 독살설과 [[홍국영]] 일파에 의한 독살설이 존재한다. [[조선 철종]]의 이복 백부로,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1849년]](철종 즉위) [[6월 17일]] 복권되고, [[1858년]](철종 9) [[11월 9일]] [[증직|증]] [[현록대부]]에 추증되었다. 묘소의 위치는 실전되었다.
==생애==
=== 생애 초반 ===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처음 봉작명은 '''완풍군'''(完豊君). [[조선 장조|사도장헌세자]]의 서손자로 아버지는 [[은언군]] 인이며, 어머니는 [[송낙휴]](宋樂休)의 딸로 상산군부인 진천 송씨(常山郡夫人 鎭川 宋氏)이다. [[조선 영조|영조]](英祖)의 서증손자(庶曾孫子)였는데 증조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의 살아 생전에 태어났다. 아래로 친동생으로 이창순, 이창덕, 이당, [[한각신]]에게 시집간 여동생 1명이 태어났다. 이 중 이당은 또 아버지 은언군의 다른 첩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그밖에 1821년에 사망한 이름 미상의 서모에게서 [[이성득 (조선왕족)|이성득]], [[이철득]]이 태어났고, 다른 서모 [[전산군부인]] 전주 이씨에게서 요절한 이복동생과 [[조선 철종|철종]]의 생부인 이복동생 [[전계대원군|이광]]이 태어났다.
생부(生父) [[은언군]] 이인에게는 장남으로 증조부(曾祖父)인 [[조선 영조|영조]](英祖)의 생전인 [[1769년]](영조 45) [[1월 21일]]에 [[한성부|한성]]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준(濬)이다. 부인은 [[통덕랑]]을 지낸 [[신오]](申王+奧)의 딸로 군부인 [[평산 신씨]](郡夫人 平山 申氏)이다. 유년기와 소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미상이다.
일설에는 그의 생모가 [[상산군부인 송씨]]가 아니라 [[은언군]] 인과 어느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상계군 역시 궁녀에게서 자손을 보았으나, [[조선 철종|철종]] 때와 [[조선 고종|고종]] 때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은언군 가족, 상계군 관련 기록들을 대량으로 세초해버려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입양과 파양 ===
[[종친부]]의 법전에 의해 [[왕세자]]의 손자, 서손들에게 봉작되는 군작위와 도정의 작위가 내려졌어야 했으나, [[조선 영조|영조]] 때 봉작이 내려졌다는 기록은 없다.
[[1779년]] 혹은 그 이전에 [[원빈 홍씨]]가 자녀를 낳지 못하자, [[홍국영]]에 의해 중부(仲父) [[조선 정조|정조]](正祖) 임금과 그의 후궁 [[원빈 홍씨]](元嬪 洪氏)의 양자로 입양, 출계되었다. 당초 은언군은 [[홍국영]]의 제의를 사양했지만, [[홍국영]]의 거듭된 부탁으로 이담을 일단 양자로 보냈다. 홍국영이 왜 은언군의 아들을 선택했는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있다. [[1779년]](정조 3) [[5월 7일]] 수빈관(守殯官)에 임명되었다.
[[1779년]](정조 3) [[5월 7일]] [[세자]]의 중손의 예에 따라 종2품 소의대부(昭義大夫)에 임명되고, 같은 날 완풍군(完豊君)에 봉작되었다. 완풍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과 [[홍국영]] 자신의 본관인 풍산에서 한글자씩 따온 것이라 한다. 많은 기록들이 이 완풍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홍국영]](洪國榮)임을 지적하고 있다. [[원빈 홍씨]]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고 병사하자, 홍국영은 상계군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들이고 그를 자신의 외조카라 칭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다른 후궁에게서 자녀를 생산할 수 있음을 들어 일각에서는 반대하였다. 같은 날인 [[5월 7일]] 이복 둘째 큰아버지 [[조선 정조|정조]](正祖) 임금의 후궁인 [[원빈 홍씨]](元嬪 洪氏)가 갑자기 사망했다. 당일 정조에 의해 원빈의 빈전 수빈관(守殯官)에 임명되고 수묘관(守墓官)에 내정되었다.
그는 [[원빈 홍씨]]의 상중에 빈전 수빈관(守殯官)과 대전관(代奠官)으로 참여하였고, 탈상 후 [[6월 2일]] [[인명원]]수원관(仁明園守園官)에 임명되었다.
[[홍국영]]은 그를 자신의 생질이라 칭하였지만, 상계군은 홍국영과 마음이 맞지 않아 갈등하였다. 당시 정조는 20대의 나이였고 완풍군을 양자로 들인 일과 가동궁으로 부르게 한 일로 결국 역적으로 지목되어 [[1779년]] [[음력 9월 26일]] [[홍국영]]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흑두봉조하가 되었다. 이후 [[김치인]]은 홍국영과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송시열의 후손인 송덕상의 처벌도 주장하면서 [[노론]] 대신들은 완풍군을 반역자로 공격하였으나 정조는 듣지 않았다. [[1780년]](정조4) 8월 15일 [[의정부]][[우의정]] [[이휘지]](李徽之) 등의 청으로 [[인조반정]] 공신 [[완풍군]]에 봉군된 [[이서]]와 작호가 중복된다는 이유로, 작호는 완풍군(完豊君)에서 상계군(常溪君)으로 고쳤고, 이름도 준에서 담으로 개명하였다.
[[1784년]](정조 8) [[1월 5일]]부터 [[조선 정조|정조]]는 친히 상계군의 혼처를 찾았다. 그러나 [[1월 21일]]까지도 신하들은 회피하며, 상계군의 혼처를 찾는 [[조선 정조|정조]]의 명에 쉽게 응하지 않았다. 사대부 안광집(安光集)의 딸이 결정되었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통덕랑 신오의 딸이 낙점되었다. 1784년 [[7월 2일]] [[사옹원]]부제조(司饔院副提調)가 되고 [[8월 3일]] 특명으로 숭헌대부(崇憲大夫)로 가자되고 [[9월 24일]] 다시 가덕대부(嘉德大夫)로 승작되었다.
=== 의문의 최후 ===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가 연달아 죽은 해에, 그는 혼례를 올린 직후 [[11월 20일]] [[독약]]을 마시고 음독사했는데, 자살설과 [[홍국영]]의 독살설, 생부 [[은언군|은언군 이인]]이 독살했다는 설 등이 있다. 외조부 [[송낙휴]]에 의하면 사망 직전에도 그는 건강했는데 갑자기 사망했다 한다. 최종 관직은 [[가덕대부]] 상계군이었다. 한편 그의 혼례를 주관하던 김우진(金宇鎭)은 상계군 사후, 상계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그밖에 영조, 정조 때 [[훈련대장]]을 지낸 [[구선복]](具善復[그에게는 외외재종증조부가 된다.]) 등도 평소 원한을 샀다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다. [[예조판서]] [[서유린]]은 상계군이 죽었다는 보고를 꺼렸으나, 결국 상계군의 사망 소식이 궁궐에 알려지게 되었다. 장례식은 [[조선 정조|정조]]의 특명으로 친왕손의 예대로 예장(禮葬)하였다.[예조에서는 그의 친왕손 장례를 반대하였으나 정조는 [[낙천군]](洛川君)의 전례를 들어 친왕손의 예로 장례를 치루도록 하였다.]
한편 그의 외할아버지 [[참봉]] [[송낙휴]]는 상복을 입고 상계군이 파양된 것에 대해 원망, 앙심을 품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그리고 사망 직전 "[[김상철]]이 살면 나도 살고 김정승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라는 말을 한 뒤 며칠 후 급사했다는 것이었다. 송낙휴는 또 "구이겸(具以謙)이 황해 병사로 있을 때 후히 선물을 바치고 편지에 소인(小人)이라고 지칭한 것을 일찍이 목격하였습니다. 담은 평소에 병이 없었는데, 김 정승에 대해 말한 후 며칠 있다가 갑자기 죽었으니, 의심스럽습니다."하고 고변했다. [[영의정]]을 지낸 [[김상철]]이었다. 송낙휴는 또 상계군을 추대하는데 자신의 처당숙인 무관 [[구선복]]이 가담했다고 고변, [[구선복]]과 그의 아들 [[황해도]][[병마절도사]] [[구이겸]], 송낙휴의 처남이며 6촌동생 구이겸에게 자기 아들을 양자로 보냈던 [[충청도]][[병마절도사]] [[구명겸]] 등이 체포되어 추국당한 뒤 처형되었다. 이어 [[노론]], [[남인]], [[소론]] 내에서 모두 홍국영에 대한 노륙을 청하는 상소와 함께 그에게도 죄를 줄 것을 청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이어 [[12월 1일]] [[정순왕후 김씨|정순왕후]]가 [[언문]]교서를 직접 발표하여 상계군과 [[홍국영]]을 역적으로 지목하고, 처분을 요구하는 언문 하교문을 [[승정원]]에 내렸다. 정조 3년 당시 상계군이 [[홍국영]] 등에 의해 완풍군에 봉작된 일과 가동궁 또는 왕위 후계자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일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그의 작위는 즉시 폐작되어 그때부터 "역적 담"으로 불리게 된다.[동시에 그의 아버지 은언군 인은 역적 인, 어머니 송씨는 송성(宋姓)으로 격하된다.] 정순왕후가 역적의 가족들도 처분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은언군 일가는 [[강화도]]로 유배된다. 삼사는 합계하여 상계군의 일가를 공격했고, [[조선 정조|정조]]는 계속 거부하였으나 삼사의 합계에 밀려 은언군 인 일가의의 유배를 승인하였다. 이후 정조는 직접 상계군 사건에 대한 언급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상계군에 관련된 일을 언급하지 말도록 신하들에게 계속 부탁하였다.
=== 사후 ===
시신은 [[한성부]] 북부 [[연희방]] [[연희궁]]좌 근처(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2호선 [[신촌역 (지하)|신촌역]] 2, 3번 출구와 [[연세대학교]] 정문 주변)에 매장되었으며, 후에 사사된 부인 [[군부인 신씨]]도 합장되었다.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1854년]](철종 5) [[2월 1일]]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으나, 후일 그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생모 [[상산군부인]] 진천송씨(鎭川宋氏)와 아내 평산군부인 신씨(申氏)는 양제궁 나인 서경의의 외할머니 조씨 노인의 권고로 [[주문모]] 신부의 입국 전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주문모]] 입국 후 세례를 받고 모두 마리아라는 교명을 받았다. 이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활동 중 [[1801년]](순조 1) [[2월]]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실이 적발되어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고, 아버지 [[은언군]]도 그해 [[5월 29일]] 사사령을 받고 [[6월 30일]] [[강화군|강화]] 배소에서 사사되었다.
[[1849년]](철종 즉위년) [[6월 17일]] 이복 조카인 [[조선 철종|원범]]이 [[조선 순조|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면서, 철종의 즉위를 주관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상계군(常溪君) 내외가 복작(復爵)되고, 이해 [[6월 23일]] 가덕대부(嘉德大夫)로 복작되었다. [[1858년]](철종 9) [[11월 9일]]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증작(贈爵)되었다. 이때 [[순원왕후]]의 명으로 과거 상계군 사건에 대한 기록이 대거 세초, 각자, 말소되었다. 이후 철종 때와 고종 때 상계군 일가 관련 기록 및 은언군 관련 기록이 대량으로 세초되어 유실되었다.
한때 [[1801년]](순조 즉위년) [[5월]] [[은언군]]이 야밤에 함께 [[강화도]]를 탈출하려던 철득(鐵得)이 한때 그의 아명으로 여겨졌지만, 후일 [[1970년]]대 [[조선왕조실록]]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1801년에 은언군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하려다가 체포된 다른 인물로 확인되었다. 이는 상계군의 사후 15년 뒤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가족 관계==
정조 때의 정승 [[서용보]]는 상계군의 외할아버지 [[송낙휴]]의 외조카가 된다. 궁녀에게서 아들을 얻었으나 일찍 죽었고, 후사가 없어서 결국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그의 동생 [[풍계군]]의 서자 [[익평군]] 이희를 사후양자로 입양하게 되었다.
'''왕가(王家)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조부 : 추존 [[조선 장조|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 ~ 1762)
* 조모 : [[숙빈 임씨]](肅嬪 林氏, ? ~ 1773)
** 양부 : [[조선 정조|정조]]
** 양모 : [[원빈 홍씨]]
** 생부 : [[은언군]](恩彦君, 1754 ~ 1801)
** 생모 : [[상산군부인 송씨]](常山郡夫人 宋氏, 1753 10 15, ~ 1801 03 17), [[천주교]] 세례명 마리아
*** 동생 : 이창순(李昌順, 생물년 미상)
*** 동생 : 이창덕(李昌德, 생물년 미상)
*** 동생 : [[풍계군|이당]](豐溪君 李瑭, 1783 ~ 1826)
*** 여동생 : 이씨(李氏, ? ~ 1872년), 참봉(參奉) [[한각신]](韓覺新)에게 출가.
** 생 서모 : [[전산군부인 이씨]](全山郡夫人 李氏, 1764 ~ 1819), 전주인(全州人) 이덕희(李德喜)의 딸.
*** 이복 동생 :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1785 ~ 1841)
** 생 서모 : 이름 미상
*** 이복동생 : [[이성득]](李成得, 1775 ~ 1817 11 27[순조실록 20권, 17년(1817 정축 / 청 가경(嘉慶) 22년) 11월 27일(병인) 1번째기사, 의금부에서 강화 죄인 성득이 물고되었으니, 금부 도사를 보내 검험하라고 하다])
*** 이복동생 : [[이철득]](李鐵得, 1780 ~ ?)
'''상계군 담(常溪君 李湛, 1769 ~ 1786)'''
* 부인 : [[군부인 신씨 (상계군)|군부인 신씨]](郡夫人 申氏, [[1769년]] [[6월 13일]] - [[1801년]] [[3월 17일]]), 평산인(平山人) 통덕랑(通德郞) [[신오]](申王+奧)의 딸.
** 양자 : [[익평군]] [[이희 (1824년)|이희]](益平君 李曦, 1824년 - 1863년), 생부는 그의 서제 [[풍계군]] [[이당 (왕족)|이당]](豊溪君 李瑭).
* 첩 : 이름 미상, 궁인 출신
** 아들 : 이름 미상, 요절
* 외조부 : 송낙휴(宋樂休, 생물년미상)
* 외조모 : [[능성 구씨]](綾城 具氏, 생물년 미상)
** 외외증조부 : 구선원, [[구선복]]의 사촌
== 기타 ==
상계군과 관련된 기록들은 철종 때와 고종 때 대부분 편집, 세초, 실전되어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홍국영]] 등이 상계군을 가[[동궁]]으로 추대하려던 사건, 부인인 [[평산군부인 신씨]]와 어머니 [[상산군부인 송씨]]의 [[천주교]] 관련 사건, 형문 관련 자료들은 후일 철종 즉위 후 [[순원왕후]]의 명으로 대부분 인멸, 세초되었고, 남은 부분도 고종 때에 가서 편집되거나 먹줄, 혹은 인위적으로 삭제 편집되거나 인멸되었다. 일성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도 대부분 철종, 고종때 가서 세초되거나 인멸되었다.
== 대중문화에 나타난 상계군 ==
* 《[[이산 (드라마)|이산]]》(2007, 배역: [[최원홍]]), [[MBC]]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 (드라마)|파문]]》(1989, 배역: [[김알음]]), [[MBC]] 드라마
== 함께 보기 ==
{{Col-begin}}
{{Col-2}}
* [[홍국영]]
* [[상계군부인 신씨]]
* [[원빈 홍씨]]
* [[조선 정조|정조]]
* [[은언군]]
* [[상산군부인 송씨]]
* [[신유사옥]]
* [[김상철]]
* [[구선복]]
* [[구명겸]]
* [[전계대원군]]
{{Col-2}}
* [[평산군부인 신씨 (상계군)|군부인 신씨]]
* [[양제궁]]
* [[강화도]]
* [[조선 장조|사도세자]]
* [[이성득 (조선 왕족)|이성득]]
* [[풍계군]]
* [[숙빈 임씨]]
* [[송덕상]]
* [[순원왕후]]
* [[조선 순조|순조]]
* [[조선 철종|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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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조선의 왕자}}
[[분류:1769년 태어남]][[분류:1786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운현궁]][[분류:조선의 왕자]][[분류:독살된 사람]][[분류:의문사한 사람]][[분류:범죄 피해자]][[분류:조선 정조]][[분류:조선 철종]][[분류:유교 신자|이담]][[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 장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