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hemund I de Hauteville''', '''Bohémond de Tarente''' [[비잔티움 제국]]령이던 남이탈리아를 침략해 아풀리아 공국을 세웠던 [[로베르 기스카르]]의 장남이자, 안티오크, 타란토의 공작. 그가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땅을 따, '''타란토의 보에몽'''이라고도 불렸다. == 생애 == === 내가 영지를 받지 못한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가 나빠! === 그는 로베르의 장남으로, 그의 전처 알베리다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로베르 기스카르는 1081년에 비잔티움을 침공하면서 그를 데려가고, 그의 영지인 아풀리아를 동생인 루지에로에게 상속하는 대신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하면 그곳의 영지를 상속해주겠다고 한다. 이후 보에몽은 아버지가 남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러간사이 분열된 군대를 이끌고 계속 제국과 맞서지만, 테살로니카에 라리사란 곳에서 알렉시오스 1세에게 격퇴당하고 쫓겨난다. 이후 1084년에 아버지가 다시 비잔티움을 침략할때 따라가지만, 듬해 아버지가 원정도중 전염병으로 인해 케팔로니아 섬에서 병사하면서 결국 아풀리아나 칼리브리아등 주요영지는 루지에로등 동생들에게 돌아가고, 그에게 그나마 남은 영지는 선심껏 던져주는 형식으로 받은 타란토지방 뿐이었다. === 십자군, 그리고 재기에 성공 === [[안습]]의 길로 떨어질뻔한 보에몽을 재기에 성공하게 한건 십자군 원정이었다. 교황 우르비노 2세가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에게서 지원 요청을 받고 십자군을 선포하자마자, 그는 조카인 탕크레드와 함께 500명의 기사를 이끌고 참전해,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오죽하면 1차 십자군의 주요 지휘관을 셋 꼽으라고 할때, 다른 쟁쟁한 주요 귀족들을 제치고 그가 그중 하나로 뽑힐 정도. [* 다른 둘은 예루살렘의 초대 지배자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 툴루즈 백작이자 트리폴리 백국의 창립자인 레몽 드 생질.] 이후 그는 안티오크 공작위에 오른뒤, 이슬람세력과 대립하다가 그들에게 잡혀 당시 그와 대립하던 알렉시오스 1세에게 이송될뻔했기도 했으나, 군사적 협약을 미끼로 풀려나 다시 공작위를 되찾는다. 이후 그는 조카 탕크레드를 섭정으로 임명한뒤, 프랑스로 건너가 그의 아버지가 해내지 못한 비잔티움 제국 정복을 준비한다. === 패배, 그리고 비참한 죽음 === 거기서 그는 프랑스 왕에게로 가 그에게 군사적 지원을 얻어낸 뒤, 남이탈리아 영주들에게 황제가 십자군을 배신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해 그곳의 영주들이 자신을 돕게 공작을 한뒤, 남부 이탈리아에서 디라키움에 상륙해, 그곳을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가려고 시도한다.[* 이는 그의 아버지인 로베르 기스카르가 비잔티움 침공을 시도할때 거친 경로와 흡사, 아니 똑같다. ~~그리고 둘다 털렸다.] 그러자 알렉시오스 1세는 그에 대응해 남이탈리아에 자신은 십자군을 배반한적이 없다면서 보에몽의 공작을 최대한 무마한 후, 베네치아 공화국을 끌어들여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자유무역을 미끼로 보에몽의 보급선들을 공격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그의 아버지만큼 교활하고 위험한' 보에몽의 군대와 직접맞붙는걸 피하면서 최대한 농성을 하는 전략으로 나섰고, 보급이 차단되면서 진격이 지지부진해지자 보에몽군의 사기는 날로 떨어져간다. 결국 보에몽은 알렉시오스에게 패배했고, 그에게 안티오크의 비잔티움 속국화와 안티오크의 확장을 사실상 저지하는 조약을 맺게 됀뒤, 1111년 실의속에 죽는다 == 총평 == 알렉시오스 1세의 딸 안나 콤네나가 그의 아버지를 소재로 한 연대기에 '그는 그의 아버지만큼이나 교활하고 위험한 인물이다.'라고 적었듯이, 그의 군사적 능력은 출중한게 확실하다. 한편으로는, 그의 아버지를 닮아 알렉시오스 1세가 십자군의 봉신서약을 요청했을때 이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이를 뒤통수쳐서 안티오크 공국을 독자적으로 형성한 교활함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매우 안타깝게도 그의 목표이자 야망이었던 비잔티움 제국과 그곳의 지도자인 알렉시오스 1세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고 인물이었고, 결국 그가 그의 야망을 충족시킬만한 상황이 되지못했다. <> == 참조 == == 분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