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 남가수]][[분류:1915년 출생]][[분류:1980년 사망]][[분류:성주군 출신 인물]] https://search.pstatic.net/common?type=a&size=120x150&quality=95&direct=true&src=http%3A%2F%2Fsstatic.naver.net%2Fpeople%2F171%2F200908101835343121.jpg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6/67/Baek_Nyeon-seol_interview.jpg/200px-Baek_Nyeon-seol_interview.jpg 白年雪, [[1915년]] [[5월 19일]] 출생 ~ [[1980년]] [[12월 6일]] [[사망]] [목차] == 개요 ==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던 [[가수]]. --[[만년설]]이 아니다.--본명은 원래 이갑룡(李甲龍)이었지만, 늘 이창민(李昌珉 혹은 李昌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 결국 1964년에 정식으로 개명했다. 1950년대에 작사가로 활동할 때엔 향노(鄕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8.15 광복]] 이전의 작품이 현재 80여 곡 가량 확인되고 있다. [[남인수]]와 같은 시대에 인기를 누렸다. == 생애 == 1915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성주 성밖숲에 백년설 노래비가 있다.] 1922년 성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8년에 졸업했다. 1929년 성주농업보통학교에 입학해 1931년에 졸업했다. 이후 경성으로 가서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은행과 신문사에서 잠시 근무했다고 한다. [[1938년]]에 시험삼아 녹음한 <유랑극단>이 다음해에 발매되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가수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1941년]]까지 태평 레코오드사 전속으로 있으면서 <두견화 사랑>, <눈물의 수박등>, <복지 만리>, <대지의 항구>, <일자 일루>, <나그네 설움> 등을 불러 당대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8.15 광복]] 이후에는 가수로 활동하는 것보다 사업체 운영과 [[고아원]] 운영에 몰두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다시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가수 활동이 부진했다. 1963년 7월에 은퇴공연을 하며 공식적으로 가수 생활을 끝냈다.[* 은퇴공연 이후 1973년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부탁해서 <백년설 독집>을 냈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지사장을 맡았다. 1970년 이후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1978년,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80년 12월 6일에 타계했다. 2002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다. == [[일제강점기]] 활동 == 백년설은 1941년 [[태평양 전쟁]]에 지원병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이 위키의 [[친일인명사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문화예술인의 경우 판단의 근거로 사용되는 자발성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있다. 더군다나 대중 예술인의 경우 당시엔 기획사에 묶인 처지였기 때문에 자발성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백년설이 몸담은 [[오케레코드]]도 비록 설립자인 [[이철]]이 친일파 인맥으로 큰 것은 사실이나 그 역사를 보면, 일본인 앞에선 '을'의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백년설이 친일 가요를 녹음했을 때는 이철이 권한을 잃고 일본인의 간섭이 심해졌던 시기다. 따라서 소속 가수들은 '을' 못되는 '병', '정'이었을 것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98868&cid=4491&categoryId=4491|#]] 그런 점에서 백년설 같은 당시 가수들의 친일 행적을 [[일본]]의 [[리샹란]][* [[중국인]]으로 위장해 [[군국주의]] 선전 활동을 펼친 [[일본인]] 여가수. [[히키아게샤]].]이 했던 그것과 같다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전두환|29만 원님]] 시절에 '아 대한민국' 같은 관제 가요를 부른 [[정수라]] 같은 가수의 사례와 비슷하다 보아야 할지, 혹은 일종의 [[강제징용]]이거나 [[북한]] 김씨 왕조 치하 연예인의 경우와 유사하다 볼 수 있는지는 좀 더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정부기관은 공식적으로 백년설을 친일 인명 사전에서 삭제하였다. 백년설이 실제로 친일파였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보다 그 근본적인 정황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 이 글을 읽는 위키러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분들의 [[흑역사]]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 유명한 곡 == * 나그네 설움 * 번지없는 주막 * 알성급제 * 복지 만리 * 대지의 항구 * 눈물의 수박등 * 고향설 * 산 팔자 물 팔자 * 만포선 길손 * 삼각산 손님 == 여담 == 가수 배금성 씨가 이 분의 외손자다.[[https://www.google.co.kr/amp/amp.asiae.co.kr/2008/03/26/2008032609455543023.amp.html|출처]] 비교적 늦은 나이인 32세에 가수로 데뷔했으나 지금까지 활발히 활동 중. [[가요무대]]를 보면 라인업에 자주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