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인/목록]], [[불교/인물]] https://search.pstatic.net/common?type=a&size=120x150&quality=95&direct=true&src=http%3A%2F%2Fpeople.phinf.naver.net%2F20140602_90%2F1401704813945DcLLD_JPEG%2Fchosun_400003521.jpg 白南檍 [[1914년]] [[11월 11일]] - [[2001년]] [[1월 15일]]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국회의원에 다섯번 당선되었으며, 민주공화당 의장을 지냈다. 송산 [[박준규(1925)|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자형(姉兄)이 된다. [[종교]]는 [[불교]]이다. == 생애 == 1914년 11월 11일 [[경상북도]] [[김천시|김천군]]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과]]를 1936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1939년 [[큐슈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1939년 조선총독부 철도국(鐵道國)에 근무를 시작하였다. 그 후 1946년 대구대학교(청구대학교와 통합된 현 [[영남대학교]]) 법학과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14년 동안 법학교수로 활동하며 [[형법]] 과목을 담당하였고, 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4.19]] 이후 치러진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참의원]](경상북도)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던 박준규, [[김재순]], [[민관식]]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내리 당선되었다. 이때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과 당무의원을 지냈다. 1960년대까지는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등 ‘바른말 잘하는’ 소신파로 불리었다. 그러나 결국 [[김성곤]], [[김진만(정치인)|김진만]], [[길재호]] 등과 반 김종필 4인 체제를 형성하였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연합하여 1969년 [[3선 개헌]]을 주도하였다. 1971년에는 민주공화당 의장을 지냈다. 그 후 1971년 6월 김종필이 [[국무총리]]가 된 후에 [[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사건]] 등이 일어나자, 야당인 신민당과 협조하여 친김종필계였던 오치성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장관의 해임안 가결을 주도하였다. 야당과 손잡고 박정희가 직접 임명한 장관 해임에 찬성하는 항명 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10.2 항명 파동]] 참조. 항명파동으로 박정희의 분노를 사면서 자연스레 4인체제는 무너졌고, 백남억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지만 쫓겨나지는 않았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상주시|상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김윤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박정수(정치인)|박정수]] 후보와 정휘동 후보에 밀려 3위 이하 득표로 낙선하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 후 1988년부터 1996년까지 [[동부화재|동부화재해상보험]]의 전신인 한국자동차보험 회장을, 1991년부터 5년간 (재)성균관대학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2001년 1월 15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유족으로는 백종현(白種玹) 국민대 경상대학장 등 3남 1녀가 있다. == 저서 == 저서로는 '단독범의 이론', '형법총론'이 있다. == 기타 == [[허경영]]의 저서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의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법학자]][[분류:김천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