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승'''(白樂承, 일본식 이름: 白川樂承 시라카와 라쿠쇼, [[1886년]] [[6월 25일]][{{국사편찬위원회 인물|106_01469|백낙승|白樂承}}] ~ [[1956년]] [[10월 12일]][{{뉴스 인용
| 제목 = 알림
|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610150020920302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10-15&officeId=00020&pageNo=3&printNo=10422&publishType=00020
| 출판사 = [[동아일보]]
| 날짜 = 1956-10-15
}}])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비디오 아트 예술가 [[백남준]]의 아버지이다. 본관은 [[수원 백씨|수원]]이다.
== 생애 ==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자본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포목상 [[백윤수]]의 막내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924년]]에 대창직물주식회사가 창설될 때 주주로 참여하고 취체역에 취임하면서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창직물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인조견 직물을 생사하면서 직물 사업을 경영했다. 당시 백낙승은 일본의 [[니혼 대학]]과 [[메이지 대학]]에서 수학한 엘리트였다.
1930년대 말부터는 경영권을 이어받아 사업을 확장시켰고,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일본 관동군사령부헌병대와 교섭하여 태창직물의 제품을 만주로 밀수출하는 방식으로 큰 이득을 취했다. 이때는 일본의 대형 기업도 태창을 수출 창구로 통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떨쳤다. 태창의 상표는 벚꽃 무늬에 '泰(태)'자를 넣은 것이었다.
섬유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모은 백낙승은 [[중일 전쟁]] 이후부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거액의 국방헌금은 물론 [[1938년]]과 [[1939년]]에 군용 비행기를 '애국기'라는 이름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박흥식 (기업인)|박흥식]]이 설립한 군수 기업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에는 대주주로 참여했다.
광복 후에도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정경유착을 계속해 국가 귀속 재산을 불하받는 등 여러 특혜를 통해 계속 성장했다. 친일 전력이 있던 백낙승은 [[여운형]]과 [[박헌영]] 계열에까지 손을 뻗치는 등 해방 정국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을 때는 [[이종형]] 등이 반공구국총궐기 국민대회를 열어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백낙승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곧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주력 업종인 섬유업 외에도 기업을 계속 확장하여 태창공업주식회사, 해전직물공업주식회사, 조선기계주식회사, 태창직물주식회사 등의 사장을 맡으면서 최초의 '[[재벌]]'이라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백낙승의 사업은 [[한국 전쟁]] 후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정권과의 지나친 유착으로 잦은 스캔들[{{뉴스 인용
|url = http://gginews.gg.go.kr:8080/Life/editorials_view.jsp?mS=490&fid=495&cid=2321
|제목 = 연계자금대출 4분의1이 자유당 선거자금으로 - 자유당정권의 권력형 부정대출사건 (하)
|출판사 = 주간경기
|저자 = 윤광원
|날짜 = 2006-12-21
|확인날짜 = 2008-04-13
}}{{깨진 링크|url=http://gginews.gg.go.kr:8080/Life/editorials_view.jsp?mS=490&fid=495&cid=2321 }}] 을 양산하다가 몰락했고, 1956년 정릉 [[경국사]]에서 사망하였다.
== 사후 ==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군수산업 관련자 부문에 들어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에는 경제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가족관계 ==
* 조부 : [[백경현 (181년)|경현]](白擎鉉, [[1841년]] ~ ? )
** 부 : [[백윤수|윤수]](白潤洙, [[1855년]] ~ [[1921년]]) 대창무역주식회사 설립자, 초대 사장
*** 형 : [[백낙원 (1883년)|낙원]](白樂元, [[1883년]] ~ [[1903년]]) 대창무역 2대사장
**** 조카 : [[백남정|남정]]([[1903년]] ~ ? ), [[백남흥|남흥]], 남희, 남숙, [[백남철|남철]], [[백남극|남극]]
*** 형 : [[백낙중|낙중]](白樂仲, [[1889년]] ~ ? ) 대창무역 3대사장
**** 조카 : [[백남훈 (백낙중)|남훈]], [[백남국|남국]], [[백남하|남하]]
*** 형 : [[백낙삼 (1892년)|낙삼]](白樂三, [[1892년]] ~ ? ) 대창무역 중역
**** 조카 : [[백남웅|남웅]](南雄, 1920년 ~ ), 흥순(興順, 1922년 ~ ), 영숙(英淑, 1924년 ~ ), [[백남진|남진]](南震, 1928년 ~ ), 남순(南淳, 1930년 ~ )
*** 본인 : 백낙승(白樂承) [[1896년]] ~ [[1956년]]) 태창직물 2대 사장
**** 아들 : [[백남일|남일]](南一, 1925년 ~ ? ) 태창방직 3대 사장, 1962년 일본 귀화.
***** 손자 : [[하쿠다 켄|건]](健, 1951년 ~ )
**** 아들 : [[백남헌|남헌]]
**** 아들 : [[백남준|남준]](白南準, [[1932년]] ~ [[2006년]]) 행위예술가, 비디오 아티스트
==참고자료==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7KOR_A1886_1_0005026|백낙승|白樂承}}
* {{뉴스 인용
|url = http://www.sisafile.co.kr/news/read.php?idxno=7115
|제목 = 두 얼굴의 백남준 Ι - 백남준의 부친, 백낙승 이야기 ① - “백낙승은 명백한 반민족행위자였다”
|출판사 = 시사파일
|저자 = 이창훈
|날짜 = 2006-05-09
|확인날짜 = 2008-04-13
}}{{깨진 링크|url=http://www.sisafile.co.kr/news/read.php?idxno=7115 }}
* {{뉴스 인용
|url = http://www.sisafile.co.kr/news/read.php?idxno=7206
|제목 = 두 얼굴의 백남준 ΙΙ - 백남준의 부친, 백낙승 이야기 ② - 믿기지 않는 해방...‘최초의 재벌’로 재도약하다
|출판사 = 시사파일
|저자 = 이창훈
|날짜 = 2006-05-17
|확인날짜 = 2008-04-13
}}{{깨진 링크|url=http://www.sisafile.co.kr/news/read.php?idxno=7206 }}
== 각주 ==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60년 죽음]][[분류:한국의 일제 부역자]][[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메이지 대학 동문]][[분류:백씨]][[분류:수원 백씨]][[분류:친일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