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정보 | 이름 = 박영희 | 사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f/f5/%EB%B0%95%EC%98%81%ED%9D%AC.jpg/270px-%EB%B0%95%EC%98%81%ED%9D%AC.jpg | 출생일 = [[1901년]] [[12월 20일]] | 출생지 = [[서울]] | 사망일 = [[1950년]] | 사망지 = | 직업 =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언론인 | 국적 = {{국기나라|일제 강점기 조선}}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장르 = 문학평론, 시, 소설 }} '''박영희'''(朴英熙, 일본식 이름: {{lang|ja|芳村香道|요시무라 고도}}, [[1901년]] [[12월 20일]] ~ [[1950년]])는 [[일제 강점기 조선]]의 [[친일 사회주의]]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언론인이다. 1920년대 대표적인 [[카프]] 문학가로 활동했지만 [[1933년]] 카프에서 탈퇴, 이후 순수 문학과 예술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 [[중일 전쟁]] 발발과 함께 사상 전향을 발표하고 친일 문학가로 변절했다. 호는 회월(懷月), 송은(松隱), 본명은 '''박거복'''(朴巨福)이며,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이다. == 생애 == === 출생과 성장 === [[1901년]] [[12월 20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공옥(功玉) 소학교 졸업 후, [[배재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1919년]] [[3월 5일]]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 때 함께 체포되었으나 훈계 방면되었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나도향]], [[안석주]], [[김복진]], [[김기진]]과는 만나 친교를 맺었다. 그 가운데, [[김기진]]은 동창으로 뒷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서 함께 활동한다. [[1920년]] 3월 배재고보를 수료한 뒤 [[일본]] 도쿄의 [[정칙영어학교|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6월, [[최승일 (1901년)|최승일]],[[나도향]] 등과 《신청년》을 발간, 《목동의 적(笛)》이란 시를 실었다. 이듬 해 [[1921년]] 귀국했다. === 문단 등단과 낭만주의 문학 ===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21년]] 귀국한 뒤, [[박종화]],[[황석우]]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시 동인지 《[[장미촌]]》을 발행하며 창간호에 〈적(笛)의 비곡(悲曲)〉, 〈과거의 왕국〉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같은 해 《[[신청년]]》에 동인으로 참가했고, [[1922년]]에는 《[[백조 (잡지)|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감상적인 내용을 담은 낭만주의적 시를 썼다. '병적 낭만주의'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현실 도피적이고 유약한 감상에 도취된 〈월광으로 짠 병실〉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 카프 결성과 경향파 문학 === [[1923년]] 김기진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개벽 (잡지)|개벽]]》에 입사한 후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서구식 낭만주의풍의 작품 경향에도 변화가 왔다. [[도쿄]]에 유학한 친구 김기진이 일본에서 유행한 프로문학에 먼저 입문하면서 박영희의 감상적 낭만주의를 강력히 비판한 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백조》를 와해시키고 프로문학을 한국에 소개했다. 파스큘라는 [[1925년]] [[염군사]]와의 통합을 통해 카프로 발전하였으며, 박영희는 카프 창립부터 지도적인 위치를 맡았다. 이 시기부터는 시 창작보다는 소설과 평론 작업으로 관심도 옮겨갔다. 1925년 발표한 단편소설 〈사냥개〉는 박영희의 의식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도덕하고 인색한 지주인 구두쇠 노인이 기르던 사냥개에게 물려 죽는다는 줄거리의 〈사냥개〉는 우화적 수법으로 쓴 신경향파 소설로, [[이기영 (소설가)|이기영]]의 〈쥐 이야기〉, 김기진의 〈붉은 쥐〉와 유사하게 동물을 등장시키고 있다. [[1926년]] 프로문학 반대 진영의 대표적 작가인 [[염상섭]]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그해 말부터는 김기진과 계급문학과 카프의 노선을 놓고 내용과 형식 중 어떤 것을 우선시할 것이냐는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김기진이 다소 유화적인 입장으로 포괄적 계급문학을 주창한데 반하여 박영희는 강경 노선을 택하여 이데올로기 우선을 내세웠다. 역시 강경파인 [[임화]]가 박영희 편에 가세하고 김기진을 공박했고, 이어진 [[아나키즘]] 논쟁을 거쳐 [[방준경|김화산]] 등 아나키스트 분파를 제명하면서 카프의 제1차 방향 전환이 일어났다. ===신간회 활동과 카프 문학에 대한 회의===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박영희는 [[신간회]]의 활동이 활성화 됨에 따라 기존의 계급 운동, 즉 인텔리 계층에 국한된 기존의 계급문학운동에 반성하고 실천적 노력이 부족했음을 자인하게 된다. 즉 대중적 조직과 기반 조성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이념 논쟁을 거듭했다는 비판을 스스로 내렸던 셈이다. 이를 확인한 박영희는 '목적의식론'을 주창하며 계급의식의 추종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실천적 구체성을 획득해야 함을 강조했다.박영희 <문예운동의 방향전환>, 1927년 4월, <조선지광> 65쪽) 이러한 목적의식론'이 제기되자 [[카프]] 내부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야기되었다. [[1927년]] 이후 카프는 경성 지부(박영희 등)와 동경 지부([[이북만]], [[임화]] 및 제3전선파)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논쟁의 쟁점 대부분은 '계급문학운동의 방향 전환과 그 실천방향'에 대한 것이 주류였다. 요점은 '계급문학운동이 대중적 정치 투쟁의 전면에 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박영희와 경성지부는 '의식 투쟁으로 그 한계를 정해둔 것'을 주창한 반면, 이와 반대로 [[이북만]] 및 동경지부에서는 정치적 진출과 대중 투쟁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카프]]는 질적으로는 성장하지 못하였으나 양적으로는 성장해서 전국에 지부를 결성하고 조직을 확대하게 된다. [[1928년]] 2월과 7월에 [[조선공산당|공산당 검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각각 3차, 4차 공산당 사건이라 불리는데 이 두 차례의 검거 사건으로 모든 사회 운동은 위축되고 만다. 심지어 '민족 단일당'이라고 불리던 [[신간회]]조차도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공산당원들의 검거로 활력을 잃게 되었다.그리고 뒷날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터짐으로써 신간회는 이후 개량주의자들 난입등으로 점점 균형을 잃어가게 된다. 그리고 동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에서는 [[조선공산당]]의 재조직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나중에 이것을 '12월 테제'라고 한다. 그리고 이 '12월 테제'에 [[카프]]의 동경 지부가 반응하면서 박영희 등이 결정하고 있던 [[신간회]] 노선 지지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공산당이 힘을 잃어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신간회]]를 지지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1929년]] 5월, 독자적으로 《무산자사》(無産者社)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정치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29년]] 11월에 카프 동경 지부 해체를 정식으로 발표하게 된다. 이들이 외치는 것은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론이었다. 이때부터 박영희는 카프에서의 입지가 점차 약화되어갔고, 박영희 자신은 카프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5/52/1934%EB%85%84_1%EC%9B%94_2%EC%9D%BC_%EB%8F%99%EC%95%84%EC%9D%BC%EB%B3%B4.jpg/360px-1934%EB%85%84_1%EC%9B%94_2%EC%9D%BC_%EB%8F%99%EC%95%84%EC%9D%BC%EB%B3%B4.jpg 1934년 1월 2일자 동아일보. 박영희가 기고한 글로 카프 탈퇴 선언 및 공개 전향 선언을 했다. [[카프]]도 박영희의 손에서 떠나 무산자사를 세운 기존 동경지부의 주장대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먼저 [[신간회]]가 1931년에 해체되었고 [[평양]] 등에서 파업을 선동하여 노동 계급의 조직과 투쟁 역량을 확대시킨다. 그리고 공산당 재건 운동의 기반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일본 경찰이 주목하기 시작한다. [[1931년]] 5월, [[신간회]] 본부가 해체될 때 경성지부 해소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6월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제1차 카프 검거 사건) === 전향과 순수 문학 === [[1931년]] [[제1차 카프 검거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봄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나 석방되었다. 이후 카프의 좌경향에 회의를 품던 중 [[1933년]] [[12월 10일]] 카프를 탈퇴했다. 그리고 박영희는 이듬해 [[1934년]] [[1월 2일]], 《[[동아일보]]》에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이라는 사설을 기고하여 공개적으로 [[카프]] 탈퇴 선언과 전향 선언을 발표하고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이후 극단 신건설 창립을 계기로 [[1935년]] [[5월 20일]]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신건설(新建設)사건, 전주 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이 사건으로 카프 출신 문학가 38명 구금.) 이 발생하면서 체포되어 약 1년가량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출옥한 뒤에도 사상범으로 보호관찰소에 수용되어 감시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과 예술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 시기의 평론은 초기와 같은 신비주의적이고 심미적인 경향을 보인다. 초기 시를 묶어 시집 《회월시초(懷月詩抄)》(1937)도 발간했다. === 태평양 전쟁 시기의 친일 문학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2/27/%EC%9E%84%ED%95%99%EC%88%98_%EA%B9%80%EB%8F%99%EC%9D%B8_%EB%B0%95%EC%98%81%ED%9D%AC.jpg/350px-%EC%9E%84%ED%95%99%EC%88%98_%EA%B9%80%EB%8F%99%EC%9D%B8_%EB%B0%95%EC%98%81%ED%9D%AC.jpg 1939년 4월 8일자 매일신보. 오른쪽부터 박영희,김동인,임학수. 이들은 1939년 4월 자발적으로 황군위문단으로 중국 전선에 파견했다. [[1938년]] 전향자 대표로 선출되어 [[도쿄]]에서 열린 시국대응전국위원회라는 행사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귀국한 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하였고,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냈다. [[김동인]], [[임학수 (시인)|임학수]]와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에 포함되어 [[중국]] 전선에 파견된 뒤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총 18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으며{{저널 인용 |저자=김재용 |제목=친일문학 작품목록 |저널 = 실천문학 |연도 = 2002 |작성월 = 8 |issue = 67호 |쪽=123~148쪽 |url=http://www.artnstudy.com/zineasf/Nowart/penitence/lecture/03.htm}}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매일신보》에 실은 〈국민문학의 건설〉(1940) 등 주로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문학의 역할을 강조하는 논설들이다. === 광복과 한국 전쟁 === 광복 후 친일 경력 때문에 잠시 [[강원도]] [[춘천]]으로 낙향, 1945년 12월 춘천공립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46년]] 12월 사직했다. [[1948년]] 3월부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민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에서 강사를 지냈다. 이후 [[좌익]] 경력을 가진 전향자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선도위원으로 [[정백]]과 함께 간부로 활동했다. [[한국 전쟁]] 개전 초기에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을 피해 피신하다가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된 것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납북된 것으로 추정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 [http://www.kwari.org/sub2a_info.php?num=126058 박영희 (朴英熙)] 되나 북한에서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권영민 |제목=한국현대문학대사전 |날짜=2004-02-25 |출판사=서울대학교출판부 |출판위치=서울 |id={{ISBN|8952104617}} |페이지=348~350쪽}} * {{서적 인용 |저자=반민족문제연구소 |제목=친일파 99인 (3) |날짜=1995-07-01 |출판사= 돌베개 |출판위치=서울 |id={{ISBN|8971990139}} |장=박영희 :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임규찬)}} == 각주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창립 발기인}} [[분류:1901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파스큘라 동인]][[분류: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작가]][[분류:밀양 박씨]][[분류:납북자]] [[분류: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