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정보 | 이름 = 박승희 | 사진 = https://search.pstatic.net/common?type=a&size=120x150&quality=95&direct=true&src=http%3A%2F%2Fpeople.phinf.naver.net%2F20181026_260%2F1540540053828rlhIB_JPEG%2Fyonhapnews_28441851.jpg | 출생일 = [[1901년]] [[음력 8월 17일]] | 출생지 = [[한성부]] [[서울특별시]] | 사망일 = [[1964년]] [[7월 15일]] | 사망지 = | 직업 = 작가,연출가 | 국적 = {{국기나라|대한민국}} | 장르 = 희곡,연극연출 }} '''박승희'''(朴勝喜, [[1901년]] [[음력 8월 17일]] ~ [[1964년]] [[7월 15일]])는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극작가 겸 연출가이다. 호가 춘강(春崗)이라 '''박춘강'''이라고도 부른다. == 생애 ==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고관이었던 [[박정양]]의 셋째 아들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중구]] 장교동에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1919년]]에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의 [[정칙영어학교]]를 거쳐 [[1921년]]에는 [[메이지 대학]] 고등과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도쿄 유학생들을 모아 [[토월회]]를 조직하여 한국 신극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동인 성격이었던 토월회가 점차 전문 극단으로 변신하면서 극작과 연출에 전념하게 되었다. 토월회는 박승희의 운영 방식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나오면서 내분에 휩싸여 두 차례 분규가 발생하였고, [[1926년]]에 처음으로 해산되었다. 토월회가 해산되면서 토월회 운영에 재산을 투자했다가 날리게 된 박승희는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결국, 신극을 버리고 통속 연극 공연에 매달리면서 [[1928년]]에 재기 공연을 올리기도 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다가 토월회는 [[1931년]]에 완전히 해산되었다. 토월회 해산 후에도 여러 극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 [[1932년]] 결성한 [[태양극장]]만이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하였다. 태양극장 공연은 흥행극 성격이 뚜렷하였기 때문에 박승희는 연극계에서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한국 전쟁]] 후 [[경상남도]] [[마산시|마산]]으로 피난하였고, 이후 연극계에서 활동하지 못하는 가운데 10여 년 동안 불우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63년]]에 [[한국연극상]]이 제정되었을 때 제1회 수상자가 되어 신극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았다. 총 연출작이 200편이 넘고, 각색작을 포함하여 연극 대본도 200편을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가운데 현전하는 작품은 4편뿐이다. == 같이 보기 == * [[박정양]]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제목=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id={{ISBN|9788990626264}} |페이지=120~123쪽}} {{토월회 창립회원}} {{1994년-이 달의 문화 인물}} [[분류:1901년 태어남]][[분류:1964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극작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반남 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