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정보
|이름= 박세채
| 원래 이름 = 朴世采
| 사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7/75/Park_Se-che01.jpg
| 출생일 = [[1631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695년]] (65세)
| 국적 = [[조선]]
| 본관 = [[반남 박씨|반남]](潘南)
| 별명 = 자 화숙(和叔)
호 남계(南溪), 현석(玄石)
| 학력 = 1648년(인조(仁祖) 26년) 진사시 합격
| 경력 = 문관
| 정당 = 서인 출신 소론 세력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원주 원씨]] 부인
| 자녀 =
| 부모 = 아버지 박의(朴漪)
| 군주 = [[조선 숙종|조선 숙종 이순]]
| 친인척 =
| 임기 = 1694년 ~ 1695년
| 직책 = 前 조선국 좌의정
}}
'''박세채'''(朴世采, [[1631년]] ~ [[1695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남계(南溪), 현석(玄石)이다. 현석은 그가 살았던 한양의 지명(마포구 [[신수동 (서울)|현석동]])에서 따온 것이다.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김집]]과 함께 [[조선]]시대 [[문묘]]와 [[종묘]]에 종사된 6현 중 하나이다. 시호는 문순(文純).
청음 [[김상헌]], [[김집 (1574년)|김집]]의 문인이다. 회니시비(懷尼是非)를 계기로 [[송시열]]과 [[윤증]]이 갈등하자 양자를 화해시키려 노력했으나 실패한다. [[1694년]]부터는 [[대동법]]의 재실시를 주장하여 전국으로 확대시켰다. [[서인]]이었다가 허새(許璽)의 옥사를 계기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자 [[소론]]을 결성하고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보통 노론의 정치적 입장에 우호적이었으며, [[유학]]자들의 학통을 서술,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집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 [[유학]]자들의 계보를 [[신라]]시대까지로 소급, 파악하였다. 이는 유학의 뿌리를 [[송나라]] 이후로 보려는 조선후기의 통상적인 견해와 다른 것이었다.
== 생애 ==
=== 생애 초반 ===
[[1631년]] [[한성부]] 창동우제(倉洞寓第)에서 [[형조판서]] [[박동량]]의 손자이자 교리(校理) 박의(朴猗)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두추]](元斗樞)의 사위이며 [[원두표]]는 처가 일족이었다. 같은 [[서인]] [[소론]]인 [[박세당]]의 친족이다. [[김상헌]], [[김집 (1574년)|김집]]의 문인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명문세족으로 증조부 [[박응복]](朴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박동량]]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또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문제가 된 [[박세당]]이나, 박태유(朴泰維),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하다 화를 당한 [[박태보]] 등은 박세채와 당내간의 친족이었다. 또한 우암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宋淳錫)은 그의 사위였고, [[윤선거]]와 [[윤증]] 역시 사돈간이었다. 그는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국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후대의 연암 [[박지원]]과 [[박명원]], [[박규수]], [[박영효]] 등도 그의 일족으로 남계의 방계 후손들이었다.
=== 수학 ===
그는 일찍이 [[이이]]를 사숙,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했으며 평생 [[이이]]를 존경하였다. [[1638년]](인조 16) 아버지 박의에게 글을 배우며 가학을 수학하다가 [[김집 (1574년)|김집]]과 청음 [[김상헌]]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그 뒤 18세 때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성균관 유생 시절에 [[이이]]와 [[성혼]]의 [[문묘]](文廟) 종사(從祀)와 추대를 주장,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박세채는 유직의 상소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내었는데,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이 [[남인]] 유생을 옹호하는 것이었으므로 이에 분개하였다. 그 뒤 [[허목]] 등 [[이이]]·[[성혼]]의 문묘 종사에 대하여 반대하는 세력들을 비판, 공격하다가 [[조선]] [[조선 효종|효종]]의 꾸지람을 듣고서 [[성균관]] 수학 2년만에 과거를 단념하고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그 뒤 [[성균관]]을 나와 다시 청음 [[김상헌]]의 문하에 찾아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송시열]], [[송준길]]과도 학문 교류를 하였다. 그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될 때 [[소론]]으로 당쟁에 끼여들었으나 황 극 탕평설을 주장하면서 중립과 당쟁의 근절에 노력하였다. 그는 당대의 유종(儒宗)으로서 특히 예학에 밝았다.
=== 예송 논쟁 ===
{{참고|예송}}
[[1659년]](효종 11년) 봄에 학행으로 천거받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어 출사하였다.
[[1659년]] [[조선 효종|효종]]이 죽고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놓고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기년복설을 주장한 [[서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는 당초 [[허목]]과 [[윤휴]]의 견해도 일단 수용하자는 입장이었으나 [[윤선도]]의 상소 이후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을 무조건 지지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파직당하고 [[양근]]으로 유배되었다.
=== 유배 생활과 복권 ===
이후 6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저술과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으나 배소가 여러번 옮겨지면서 지평(砥平), 원주, 금곡(金谷) 등지를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유배생활 중 그는 소학, 근사록, 대학, 중용 등 사서육경의 본문 구절 중 어려운 부분을 쉽게 풀이해서 해설한 《독서기》(讀書記)를 저술하였다. 이어 『춘추』에 대한 [[정자]](程子), [[주희|주자]]의 해설을 토대로, 20여 문헌에서 보충자료를 수집, 추가한 춘추보편(春秋補編)을 출간하였고, 성리학의 수양론 가운데 가장 핵심개념인 경(敬)에 대한 선유(先儒)의 제설(諸說)을 뽑아 엮은 《심학지결》(心學至訣)등의 책을 집필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복관, 등용되어 [[사헌부]]집의(執義), 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숙종 초기에 귀양에서 돌아와서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노·소 분열 이후에는 윤증(尹拯)을 두둔하고 나아가 소론계 학자들과 학적 교류와 활동을 하였다.
=== 소론의 영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8/88/%EB%B0%95%EC%84%B8%EC%B1%84_%ED%95%84%EC%A0%81.jpg/160px-%EB%B0%95%EC%84%B8%EC%B1%84_%ED%95%84%EC%A0%81.jpg
박세채 필적
그 뒤 [[허새의 옥사]]를 계기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자 [[나량좌]] 등과 함께 [[소론]]을 결성하고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1684년(숙종 10년) [[윤선거]]의 묘갈명 때문에 벌어진 회니논쟁(懷尼論爭)에서 그는 [[송시열]]과 [[윤증]]의 화해를 주선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정에서 박세채는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해 [[서인]] 내부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허영 허새의 옥사]]가 무고, 날조로 밝혀지자 그는 사건을 무고, 확대시킨 [[김익훈]], [[김석주]]의 처벌을 주장했다. [[1683년]] [[김익훈]], [[김석주]]의 처벌문제를 놓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자 [[윤증]], [[나량좌]], [[최석정]](崔錫鼎), [[박세당]], [[남구만]] 등과 [[소론]]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려는 [[남인]]에 대한 적개심은 버리지 않았고, [[1694년]] [[노론]]의 [[김춘택]] 등에 협력하여 [[남인]] 축출을 지지한다.[남인에게 화해하자는 윤증과도 이견대립을 하게 되었다.]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소론]]이 주도권을 잡게 되자 [[의정부]][[좌의정]]에 발탁되었다. [[소론]]의 힘으로 [[좌의정]]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시비명변(是非明辨) 후의 탕평론(蕩平論)'과 '벽이단(闢異端)'을 강조하는 [[노론]]의 정치적, 학문적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가 교유한 인물과 초기의 문인들은 대부분 [[소론]]이었고, [[송시열]] 등 일부 노론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노론]]의 입장을 지지한 것을 두고 그가 죽은 뒤에 [[김간]](金幹), [[김구 (1649년)|김구]], [[어유구]], [[어유봉]], [[김상로]] 등 그의 문하생 대부분이 [[소론]]을 탈당하고 [[노론]]으로 이탈하는 원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694년]] 그는 [[남구만]], [[윤지완]] 등과 함께 [[이이]], [[성혼]]에 대한 [[성균관]] 문묘종사 문제를 문묘종사 쪽으로 확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김육]]의 [[대동법]]의 재실시를 적극 주장하여 전국 확산에 기여하였다.
=== 생애 후반 ===
숙종 후반에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윤증도 출사하지 않자 조정에서 산림학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붕당간의 조정에 힘을 기울여 탕평론을 적극 개진하였다. 일부 [[소론]]으로부터 [[노론]]의 주장에 지나치게 영합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탕평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탕평론은 선조대에 이이가 주장한 조제보합설(調劑保合說)을 모범으로 한 것으로서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로 구체화되었으며, 영조·정조대에 이르러 탕평책을 시행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가 [[송시열]]과 사돈간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 [[소론]]계 인사들도 있었다.
저서로는 《남계집》이 있다. 성리학 이론에 해박하여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중기까지 [[유학]]자들의 학통을 서술,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집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 [[유학]]자들의 계보를 [[신라]]시대까지로 소급, 파악하였다. [[예학]] 지식에도 해박하여 《남계예설》(南溪禮說) 《삼례의》(三禮儀) 《육례의집》(六禮疑輯) 등 많은 예학서를 저술하였다.
=== 사후 ===
그가 죽자 문인(門人)들 중 상복을 입고 3년상과 시묘살이를 한 이들이 2백여인이나 되었다. [[윤증]]이나 [[박세당]]과는 달리 [[송시열]]과 크게 충돌하지 않았으므로 사후에도 별 탈이 없었다. 바로 [[조선 숙종|숙종]]의 묘정에 종사되었으며, [[1764년]](영조 40년) 집권 [[노론]]의 반대와 여러 논란 끝에 [[조선 영조|영조]]에 의해 [[성균관]]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 저서 ==
많은 저술 외에 70여 권의 문집, [[논어]]·[[맹자]]의 찬요, 유현들의 사우 연원을 수록한 책 등 후진들에게 귀중한 문헌을 남겼다.
* 《[[범학전편]]》
* 《[[남계집]] (南溪集)》
* 《[[삼례의]]》
* 《남계수필록 (南溪隨筆錄)
* 《남계설 (南溪說)
* 《[[동유사우록]] (東儒師友錄)》
* 《범학금편 (範學金編)》
* 《육례의집 (六禮疑輯)》
* 《삼례의 (三禮儀)》
* 《남계독서기 (南溪讀書記)》
* 《시무만언봉사 (時務萬言封事)》
* 《숭효록 (崇孝錄)》
* 《춘추보편 (春秋補篇)》
* 《반양이선생유고 (潘陽二先生遺稿)》
* 《삼선생유화 (三先生遺畵)》
* 《심학지결 (心學至訣)》
* 《주자대전습유 (朱子大全拾遺)》
* 《자록규해 (自鹿規解)》
* 《우계속집 (牛溪續集)》
* 《염락풍아 (濂洛風雅)》
* 《퇴계어록 (退溪語錄)》
* 《율곡속외별집 (栗谷續外別集)》
== 가족 관계 ==
* 고조부 : 박소(朴紹)
** 증조부 : 박응복(朴應福)
*** 할아버지 : [[박동량]](朴東亮)
**** 백부 : 박미(朴瀰)
**** 백모 : [[정안옹주 (선조)|정안옹주]] - 선조의 서녀
***** 사촌형님 : 박세교(朴世橋)
****** 조카 : 박태만(朴泰萬)
****** 조카 : 박태두(朴泰斗)
****** 조카 : 박태길(朴泰吉)
**** 숙부 : 박유(朴濰)
**** 숙부 : 박자(朴澬)
**** 고숙 : 이명한(李明漢)
**** 고숙 : 홍처심(洪處深)
**** 고숙 : 유성오(柳誠吾)
**** 아버지 : 박의(朴猗)
**** 어머니 : 신흠(申欽)의 딸
**** 처부 : 원두추(元斗樞)
***** 부인 : [[원주 원씨]](原州元氏)
****** 장남 : 박태회(朴泰晦)
******* 손자 : 박필위(朴弼渭) - 박태은(朴泰殷)에게 양자로 감
****** 장녀 : 신성하(申聖夏)에게 출가
******* 외손자 : 신방(申昉)
******* 외손녀 : 심정신(沈廷紳)에게 출가
== 기타 ==
같은 [[소론]]에 속하는 [[박세당]], [[박태보]] 등은 그의 일족이었다. 그의 아호 중 현석은 그가 태어난 [[한성부]]의 한 지명에서, 남계는 그가 만년에 기거한 [[경기도]] [[파주]](坡州)의 한 시내 이름에서 각각 따온 것이다.
== 각주 ==
== 관련 항목 ==
{{Col-begin}}
{{Col-2}}
* [[노론]]
* [[소론]]
* [[박세당]]
* [[윤증]]
* [[송시열]]
* [[송준길]]
* [[김익훈]]
* [[윤휴]]
{{Col-2}}
* [[서인]]
* [[경신환국]]
* [[김집 (1574년)|김집]]
* [[이경석 (조선)|이경석]]
* [[박태보]]
* [[남계 박세채 영정]]
{{Col-end}}
=== 종묘·문묘 배향 6현 ===
*[[이언적]]
*[[이황]]
*[[이이]]
*[[김집]]
*[[송시열]]
*[[박세채]]
== 박세채를 연기한 배우 ==
* [[박종관]] - [[1988년]] [[조선왕조 오백년]] [[인현왕후 (드라마)|인현왕후]], [[문화방송|MBC]] 드라마
* - [[1995년]] [[장희빈 (1995년 드라마)|장희빈]], [[SBS]] 드라마
* [[맹호림]] - [[2002년]] [[장희빈 (2002년 드라마)|장희빈]], [[KBS 2TV]] 드라마
== 참고문헌 ==
* 현종실록
* 숙종실록
* 연려실기술
* {{글로벌세계대백과}}
{{종묘배향공신}}
[[분류:1631년 태어남]][[분류:1695년 죽음]][[분류:반남 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문신]][[분류:사상가]][[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송시열]][[분류:김육]][[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서예가]][[분류:조선의 성리학자]]
[[분류:소론]][[분류:서인]][[분류:병사한 사람]][[분류:종묘배향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