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f/Seongbin_Park.jpg || ||||<:><-3><#005ba6>'''{{{#FFD700 조선국 정9품 효력부위(朝鮮國 正九品 效力副尉)}}}'''|| ||<#005ba6> '''{{{#FFF 본관}}}''' ||[[고령 박씨]] || ||<#005ba6> '''{{{#FFF 호(號)}}}''' ||산남(山南) || ||<#005ba6> '''{{{#FFF 출생}}}''' ||[[1871년]] 4월 19일, [[[대조선국]] [[경상북도]] [[칠곡군]] || ||<#005ba6> '''{{{#FFF 사망}}}''' ||[[1938년]] 9월 4일, [[일제강점기|일본령 조선]]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 ||<#005ba6> '''{{{#FFF 부모}}}''' ||[[아버지]] 박영규, [[어머니]] 불명 || ||<#005ba6> '''{{{#FFF 역임한 직위}}}''' ||정9품 효력부위(正九品 效力副尉) || ||<#005ba6> '''{{{#FFF 형제자매}}}''' ||형제 : 박일빈, 박용빈|| ||<#005ba6> '''{{{#FFF 배우자}}}''' ||[[백남의]] || ||<#005ba6> '''{{{#FFF 남자 자녀}}}''' ||장남 : 박동희, 차남 : 박무희, 삼남 : [[박상희]], 사남 : 박한생, 오남 : [[박정희]] || ||<#005ba6> '''{{{#FFF 여자 자녀}}}''' ||장녀 : 박귀희, 차녀 : 박재희 || 박성빈(朴成彬, [[1871년]] [[6월 6일]]~[[1938년]] [[9월 4일]])은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양반]]이다. 그냥 이렇게 써 놓으면 왜 나무위키에 등재했는지 어리둥절하겠으나, 이 사람의 삼남이 [[박상희]], 막내아들은 다름아닌 '''[[박정희]]'''이고, 손녀가 [[박재옥]], '''[[박근혜]]''', [[박근령]], 손자가 [[박지만]]이기 때문에 등재된 것이다. == 생애 ==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7대 방계 후손이다. 어렸을때는 약간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몰락한 양반에 속했다. 전답을 팔아 서울에 관직을 하러 자주 올라가면서 가세가 기울게 되었으며.구한말 무관직 정9품 효력부위(오늘날의 [[육군]] [[소위]])라는 벼슬을 받았다. 여기까지였으면 나름대로 떵떵거렸을 인물이 되었을 법하지만 하지만 실무에 투입되지는 못하면서 한량으로 지냈는데 이때 당대의 부패상에 대해서 일찌감찌 환멸을 느꼈던 것도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다.[* 여하튼 그 덕택에 박정희도 동학농민운동과 [[천도교]]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천도교에 건물도 기부한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되면서 역적으로 처형될 처지에까지 내몰렸다. 당시의 사정은 알 수가 없지만 이때 300명의 동학군 포로들은 처형되고 박성빈만 천운으로 살아나왔다. 달변이였다는 말이 있는데, 재판관이 보기에 박성빈은 뭔가 다른사람들과는 다르게 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때 처형당했다면 박정희는 태어날 수 없었다. 재밌는 것은 훗날 박정희도 한때 군대에 몸담았던 적이 있고, 이후로는 사회에 대한 환멸과 불만으로 [[남로당]]에 가담했다가 처형으로 인생이 끝장날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운명이 흡사하다. 이 때문에 집안에서 [[의절]]당하다시피하면서 처가집의 도움으로 겨우 먹고사는 신세가 되었던데다가 [[일제강점기]]까지 오면서 세상에 나서는 것을 포기하고 처가인 [[수원 백씨]] 집안의 논마지기나 부쳐먹으면서 소일거리하는 몰락 양반으로 지내게 되었다. [[칠곡군]] 약목면에서 살면서 [[백남의]]와 결혼해 6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 넷째아들을 일찍 잃어서 최종적으로 5남 2녀가 남았다.] 그 중 막내아들이 [[박정희]]이다. 하지만 집이 가난해서 박정희를 키우기 어려워, [[백남의]]는 박정희를 [[임신]]했을 때 낙태를 하려고 뒷산에서 뛰어 내리거나 간장을 퍼마시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세상에 태어났고 이 영향으로 미숙아로 태어나는 바람에 어른이 되고 나서도 체구가 작았다. 여하튼 세상에 나서는것을 포기한데다가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한량스러운 기질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에게는 그리 존경받는 아버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박정희]]가 19살이던 1936년, 박성빈은 박정희를 16살의 [[김호남]]과 억지로 결혼시켰다. 죽기전에 늦둥이 아들이 장가가는 것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여성과의 결혼을 원했던 박정희는 어른들의 강요로 결혼한 김호남에게 정을 주지 않았고, 나중에 [[이현란]]이라는 여대생과 동거했다. 1950년, 박정희는 이현란과 헤어진 후에야 [[김호남]]과 이혼하고, 곧이어 [[육영수]]와 재혼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동학혁명에 참여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탄압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12478§ion=sc29|링크]] ] [[이낙선]] 소령이 쓴 박정희 신상비망록에는 '''"1894년 동학란이 경북에 침입하였을 때 박성빈은 용감히 [[의병]]을 일으켜 성공, 그 공이 지대하여 무과. 영월군수"'''라고 적혀 있다. 1967년에 한국일보 정광모기자가 쓴 '청와대' 에도 박성빈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는 관군편에 섰던 것으로 되어 있다. 1971년에 세워진 박성빈의 묘비에는 '영변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시국의 어려움으로 부임하지 않고 동학란을 피해서 선산에 왔다'는 요지의 설명이 있다. [* [[http://www.chogabje.com/premium/book/view.asp?sCidx=71|링크]]] == 기타 == 박성빈의 장녀 박귀희가 은지원의 친할머니이며 그래서 박성빈 에게는 [[진외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분류:칠곡군 출신 인물]] [[분류:1871년 출생]] [[분류:193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