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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1871)


개요


조선국 정9품 효력부위(朝鮮國 正九品 效力副尉)
본관 고령 박씨
호(號) 산남(山南)
출생 1871년 4월 19일, [[[대조선국]] 경상북도 칠곡군
사망 1938년 9월 4일, 일본령 조선 대구광역시 중구
부모 아버지 박영규, 어머니 불명
역임한 직위 정9품 효력부위(正九品 效力副尉)
형제자매 형제 : 박일빈, 박용빈
배우자 백남의
남자 자녀 장남 : 박동희, 차남 : 박무희, 삼남 : 박상희, 사남 : 박한생, 오남 : 박정희
여자 자녀 장녀 : 박귀희, 차녀 : 박재희
박성빈(朴成彬, 1871년 6월 6일~1938년 9월 4일)은 구한말~일제강점기양반이다.
그냥 이렇게 써 놓으면 왜 나무위키에 등재했는지 어리둥절하겠으나, 이 사람의 삼남이 박상희, 막내아들은 다름아닌 박정희이고, 손녀가 박재옥, 박근혜, 박근령, 손자가 박지만이기 때문에 등재된 것이다.

생애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7대 방계 후손이다. 어렸을때는 약간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몰락한 양반에 속했다. 전답을 팔아 서울에 관직을 하러 자주 올라가면서 가세가 기울게 되었으며.구한말 무관직 정9품 효력부위(오늘날의 육군 소위)라는 벼슬을 받았다.
여기까지였으면 나름대로 떵떵거렸을 인물이 되었을 법하지만 하지만 실무에 투입되지는 못하면서 한량으로 지냈는데 이때 당대의 부패상에 대해서 일찌감찌 환멸을 느꼈던 것도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다.[1]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되면서 역적으로 처형될 처지에까지 내몰렸다.
당시의 사정은 알 수가 없지만 이때 300명의 동학군 포로들은 처형되고 박성빈만 천운으로 살아나왔다. 달변이였다는 말이 있는데, 재판관이 보기에 박성빈은 뭔가 다른사람들과는 다르게 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때 처형당했다면 박정희는 태어날 수 없었다.
재밌는 것은 훗날 박정희도 한때 군대에 몸담았던 적이 있고, 이후로는 사회에 대한 환멸과 불만으로 남로당에 가담했다가 처형으로 인생이 끝장날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운명이 흡사하다.

이 때문에 집안에서 의절당하다시피하면서 처가집의 도움으로 겨우 먹고사는 신세가 되었던데다가 일제강점기까지 오면서 세상에 나서는 것을 포기하고 처가인 수원 백씨 집안의 논마지기나 부쳐먹으면서 소일거리하는 몰락 양반으로 지내게 되었다.
칠곡군 약목면에서 살면서 백남의와 결혼해 6남 2녀를 두었는데[2] 그 중 막내아들이 박정희이다. 하지만 집이 가난해서 박정희를 키우기 어려워, 백남의는 박정희를 임신했을 때 낙태를 하려고 뒷산에서 뛰어 내리거나 간장을 퍼마시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세상에 태어났고 이 영향으로 미숙아로 태어나는 바람에 어른이 되고 나서도 체구가 작았다.

여하튼 세상에 나서는것을 포기한데다가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한량스러운 기질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에게는 그리 존경받는 아버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박정희가 19살이던 1936년, 박성빈은 박정희를 16살의 김호남과 억지로 결혼시켰다. 죽기전에 늦둥이 아들이 장가가는 것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여성과의 결혼을 원했던 박정희는 어른들의 강요로 결혼한 김호남에게 정을 주지 않았고, 나중에 이현란이라는 여대생과 동거했다. 1950년, 박정희는 이현란과 헤어진 후에야 김호남과 이혼하고, 곧이어 육영수와 재혼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동학혁명에 참여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탄압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3] 이낙선 소령이 쓴 박정희 신상비망록에는 "1894년 동학란이 경북에 침입하였을 때 박성빈은 용감히 의병을 일으켜 성공, 그 공이 지대하여 무과. 영월군수"라고 적혀 있다. 1967년에 한국일보 정광모기자가 쓴 '청와대' 에도 박성빈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는 관군편에 섰던 것으로 되어 있다. 1971년에 세워진 박성빈의 묘비에는 '영변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시국의 어려움으로 부임하지 않고 동학란을 피해서 선산에 왔다'는 요지의 설명이 있다. [4]

기타

박성빈의 장녀 박귀희가 은지원의 친할머니이며 그래서 박성빈 에게는 진외증조할아버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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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여하튼 그 덕택에 박정희도 동학농민운동과 천도교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천도교에 건물도 기부한다.
  • [2] 그 중 넷째아들을 일찍 잃어서 최종적으로 5남 2녀가 남았다.
  • [3] 링크
  • [4]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