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6/67/Park_Sang_Hee.JPG/250px-Park_Sang_Hee.JPG 朴相熙 [[1906년]] [[9월 10일]] ~ [[1946년]] [[10월 6일]]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경상북도]] [[칠곡군]] 출생. '''[[박정희]]([[1917년]]생)의 친형(11살 차), [[김종필]]([[1926년]]생)의 [[장인]],''' 그리고 [[박준홍]], 박영옥, 박계옥의 아버지이자 김종필과 박영옥의 아들, 딸인 김진과 김예리 남매에게는 [[외할아버지]], [[박재옥]],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의 큰아버지이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 박재옥은 박상희가 죽기 전인 9년전인 [[1937년]]에 태어났고,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10.1 대구폭동 사건]]에서 경찰의 총탄에 맞아죽었을 당시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이였다.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은 박상희가 사망한 이후인 [[1950년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들 박정희의 자녀 4남매들에게는 큰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박성빈]]에게는 셋째아들이다. [[1920년]]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1929년]], 처음으로 개교한 대구사범 제1회 입학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경성사범, 평양사범, 대구사범 단 3곳의 사범학교만이 존재했다. 월사금 등을 일절 받지 않는데다, 용돈조로 격려금까지 지급되고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 발령이 났다. 따라서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사범학교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무지막지한 경쟁률을 자랑했다. [[경성제국대학]]이 있었지만 [[제국대학]]답게 식민지에선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었으며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는 사립학교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3년 뒤, 막내 동생인 박정희가 대구사범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1927년]], [[신간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1931년]] 신간회 해소 이후 박상희는 [[1934년]] [[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이듬해인 [[1935년]]에는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활동했다. 일제말기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건국동맹]]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수감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다. [[8.15 광복|해방]] 후 [[구미시|구미]]에서 그의 정치적 인기는 대단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인망이 높아,[* 심지어 대구경찰서장이 "'''박상희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고 신원을 보증한다'''"고 했으니 말 다했다.] 대구가 좌익들에 대한 호감도가 높았던 지역이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구미지역에서 좌우익을 막론하고 지식인,독립운동가 그룹의 리더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국준비위원회]] 구미 지부를 창설하고 건준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듬해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았으며, 후에는 [[조선공산당]] 선산군당 총책이 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박상희는 반탁운동을 지도하였으나, [[박헌영]]이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고 좌파들이 신탁통치 지지의 입장으로 돌아서버리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당시 민족주의적 좌파에게는 꽤 흔한 일이었다.[* 여담으로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일으킨 기레기는 동아일보 소속인데, 한때 박상희가 몸담은 곳이었다.] [[1946년]] [[대구 10.1 사건]]으로 [[경상북도]] 일대에 시위가 확산되자, 그는 선산-구미 지역 시위에서 중요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대구를 진압한 뒤 선산으로 진입한 경북도경 - 경기도경 연합부대에게 총을 맞고 숨진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1906년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