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정보 |이름 = 금계 박관수
琴溪 朴寬洙 |출생일= [[1897년]] |출생지= {{국기나라|조선}}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울산]] |사망지= {{국기나라|대한민국}}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 |사망일= [[1980년]] (84세) |의원 선수 = 無 |경력 = 대한민국 민주공화당 특임고문 |국적= {{국기나라|대한민국}} |학력= 일본 [[도쿄 대학|도쿄 제국대학교]] 철학과 학사
[[국방대학교|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1956년) |직업= 교육자, 보수주의 운동가, 시민단체인 |정당 = 무소속 |본관 = 밀양(密陽) |배우자= 울산 김씨 부인 |부모= |웹사이트= }} '''박관수'''(朴寬洙, 일본식 이름: 琴川寬, [[1897년]] ~ [[1980년]])는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이자 [[대한민국]]의 교육자, 사회사업가, 보수주의 운동가이다. 박정희의 고등학교 시절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반공 우익 시민단체에서 활동하였다. [[한국반공연맹]] 제1대 이사장과 [[대한노인회]] 제3~4대 회장, [[공산권문제연구소]] 제2대 이사장 등을 지냈다.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密陽)으로 호는 금계(琴溪). [[울산광역시|울산시]] 출신. == 생애 == === 청소년기 ===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울산]]의 [[밀양 박씨]]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생활이 빈한했으나, 울산 지역 유지인 김홍조(金弘祚)의 도움으로 학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김홍조는 지역의 인재들에 대한 장학사업을 하였고, [[일본]] 등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후에 박관수는 김홍조의 누이동생과 결혼했다. 지금의 울산초등학교인 [[울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부]]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9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제국대학]]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 도중 유학생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한때 투옥당하기도 했다.{{서적 인용 |저자=윤형복 |제목=하늘은 그리도 높고 푸르렀는데 |날짜=2007-09-23 |출판사=한국문학도서관 |출판위치=서울 |id= |페이지=195쪽}} [[1922년]] [[도쿄 제국대학]] 철학과를 수료했다. === 귀국 이후 === 귀국한 뒤 교사로 임관되어 [[대구사범학교 (1923년)|대구사범학교]]에서 교육학 교사와 심리학 교사로 일했다. 이때 [[대구사범]]에 재학 중이던 박정희를 가르쳤다. [[수원고등농림학교]] 강사를 거쳐, [[조선총독부]] 소속의 교육 관료인 시학관으로 오래 근무했다. [[1939년]]에 [[경기공립고등여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궁성요배를 하며 교직원들에게 전시체제에 대한 훈시를 했다 한다.{{서적 인용 |저자=이이화 |제목=한국사 이야기 22: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 바람 |날짜=2006-07-27 |출판사=한길사 |출판위치=서울 |id= |페이지=294-295쪽}} [[경기고등여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1941년]]에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을 맡았다.{{서적 인용 |저자=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제목=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날짜=2004-12-27 |출판사=민족문제연구소 |출판위치=서울 |id={{ISBN|89-953307-2-4}} |페이지=387-400쪽}} 이후 [[춘천고등학교]] 교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 광복 이후 === [[1945년]] [[8월]] 광복 후 잠시 은거하다가 다시 교육계에 투신하였으며 [[1952년]]에 [[경북대학교]] 교수로 임용되고, 이후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학장 겸 교학처장 등을 지냈고, 52~57년 경북대학교 교수와 대전고등학교 교장, [[울산농업고등학교]]와 [[대전고등학교]], [[옥천여자고등학교]] 교장 등을 거쳐 [[1961년]] [[한양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가 집권한 이후 여러 반공 우파 단체와 시민단체의 수장으로 초빙되어 활동했다. [[1965년]] 단군정신선양회 회장, 신라오릉보존회 총재, 등을 거쳐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이사장, [[1966년]] [[한국반공연맹]] 제1대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67년]] 전국노인단체연합회창립준비위원회 명예총재에 추대되었다.[http://www.n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924 노년시대신문 - 어르신들의 최고의 선택] [[1970년]] 월남인 출신 공산권문제연구소 이사장 한재덕이 사망하자, 제2대 공산권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초빙되어 부임하였다. 이를 놓고 윤형복은 박정희의 은사라서 한자리 마련해 주지 않았나며 의혹을 제기하였다.{{서적 인용 |저자=윤형복 |제목=하늘은 그리도 높고 푸르렀는데 |날짜=2007-09-23 |출판사=한국문학도서관 |출판위치=서울 |id= |페이지=196쪽}} 공산권문제연구소 이사장 이후 [[1971년]] 현정회(顯正會) 이사, [[1972년]] 전북매일신문 회장, 1972년 [[8월]] 제3대 [[대한노인회]] 회장 등을 지냈다. 이후 여러 반공 우파 단체들을 지도하며 반공 강연활동을 하기도 했다. [[1978년]] [[8월]] 제4대 [[대한노인회]] 회장에 재선되었으나 1980년 9월 사퇴했다. 저서로 《인간혁명론》, 《북한의 농민》, 《북한의 노동자》, 《북한의 가정과 부녀자》, 《위대한 시대에의 도전》, 《현대한국반공투쟁사》, 《국민독본》 등이 있다. 특히 1966년부터 [[1980년]]까지 14년 동안 [[반공연맹]] 이사장으로 계속 연임되면서,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과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정권의 통치원리인 안보논리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 사후 ===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상훈 == * 홍조근정훈장 == 참고자료 ==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7KOR_A1897_1_0004213|박관수|朴寬洙}} * {{뉴스 인용 |url=http://www.ksilbo.co.kr/ksib_nws.php?action=read&t_mcategory=4&t_scategory=1&t_no=210082 |제목=[울산의 선각자] 35. 육영사업 - 추전 김홍조 |출판사=경상일보 |저자=신춘희 |날짜=2008-03-12 |확인날짜=2008-04-13 }}{{깨진 링크}} == 각주 ==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80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대한민국의 중등학교 강사]][[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분류:민주공화당 (대한민국)]][[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울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경기중학교 동문]][[분류:울산초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밀양 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