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종만'''(李鍾萬, 일본식 이름: 月城鍾萬, {{표준어|이종만}}, [[1885년]] [[1월 14일]] ~ [[1977년]] [[1월 19일]])은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며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울산시]] (현재의 [[울산광역시]]) 출신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제 부문, 친일단체 부문에 수록된 인물이다. == 생애 == [[1912년]] 일제가 [[토지조사령]]을 공포한 직후에 농림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37년]] 6월 당시 평안북도 초산군, 자성군, 태천군, 강계군, 함경남도 정평군, 영흥군, 단천군, 회령군, 무산군, 갑산군, 경상북도 의성군, 경상남도 울산군 소재 광산 등 전체 면적 760,000,000평에 달하는 750광구를 소유할 정도로 "광산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37년 6월 6일 대동광업(大同鑛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같은 날에 대동광산중앙조합(大同鑛山中央組合)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37년]] [[6월 17일]] [[재단법인]] 대동농촌사(大同農村社), 대동출판사(大同出版社)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했으며 대동농촌사 이사장 재직 시절 전체 수확물의 7할을 농민이, 나머지 3할을 재단이 소유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30년 뒤에 농민이 수확물 전체를 갖는 대신 재단이 소유권만을 갖는 제도였다. [[1937년]] [[7월 19일]] [[애국부인회]] 조선본부에 북지황군위문품대의 일원으로 1,000원을 기부했고 1937년 10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1,200,000원에 인수했다. [[1938년]] 1월 잡지 《농업조선(農業朝鮮)》을 창간했으며 [[1938년]] 6월 사립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 경영했다. [[1939년]] 4월 조선산금협의회(朝鮮產金協議會)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39년 6월 28일 일본군 위문대 대금으로 1,000원을 헌납했다.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역임했으며 [[1940년]] 7월 잡지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에 〈지원병(志願兵)과 혈(血), 한(汗), 사랑(愛)의 인(人))〉을 기고했다. [[1941년]] 9월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 명치정대에 참여했고 같은 달에 [[조선임전보국단]] 경성 지역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역임했으며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제 부문, 친일단체 부문에 수록되었다. [[1946년]] 5월 1일 《[[독립신보]](獨立新報)》를 창간했으며 1946년 8월 23일 조선산업건설협의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월북 이후인 [[195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광업부 고문을 역임했으며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및 상무위원을 역임했다. [[조국통일상]]을 수상했으며 김일성은 그를 "애국적 기업가"로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자본가로는 유일하게 [[애국렬사릉]]에 매장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민족문제연구소 |제목=친일인명사전 3 (ㅇ ~ ㅎ)|연도=2009 |id= |출판위치=서울 |쪽=131 ~ 132 |장=이종만 (1) |장url= }} [[분류:1885년 태어남]][[분류:1977년 죽음]][[분류:한국의 일제 부역자]][[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울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공산주의자]][[분류:대학 설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