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 정보 | 이름 = 능창군 | 원래 이름 = 綾昌君 | 배우자 = 적실 부부인 [[능성 구씨]]
그 외 측실 1명 | 작위 = 수(守)
[[군 (작위)|군(君)]]
[[추증|증]] [[대군 (작위)|대군(贈 大君)]] | 시호 = 효민(孝愍) | 본명 = 이전
李佺 | 왕가 =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 아버지 = [[신성군|신성군 이후]](양부)
[[조선 원종|정원대원군 원종 이부]](생부) | 어머니 = 군부인 [[평산 신씨]](양모)
[[인헌왕후|인헌왕후 구씨]](생모) | 자녀 = 친서녀 이영온(李英溫)
양적자 [[인평대군|인평군 이요]](麟坪君 李㴭) | 친인척 = 허서(사위)
[[평운군|평운군 이구]](양아우)
[[조선 인조|인조 이종]](동복 친형)
[[오강군|오강군 이건]](양조부)
[[조선 선조|선조 이연]](친조부)
[[신립|신입]](양외조부)
[[구사맹]](친외조부) | 출생일 = {{출생일|1599|7|16}}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성서 새문리 [[조선 원종|정원군]] 사저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615|11|17|1599|7|16}}[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ob&pos=1&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8A%A5%EC%B0%BD+%EC%A3%BD 능창군 이전의 졸기]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강화도|강화]] [[교동면|교동군]] 유배 배소에서 자진(自盡) | 능묘 = {{KOR}} [[경기도]] [[하남시|하남]] 춘궁동 고골 궁안 마을 뒷산 | 종교 = [[유교]]([[성리학]]) }} '''능창군 이전'''(綾昌君 李佺, 또는 '''증 능창대군 이전'''(贈 綾昌大君 李佺), [[1599년]] [[7월 16일]] ~ [[1615년]] [[11월 17일]])은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이다. == 이력 == 그는 가계상 [[대한제국 고종|고종]] 친조부 [[남연군]]의 생7대조가 된다. 성은 [[전주 이씨|이]](李)이며 이름은 전(佺)이고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시호는 효민(孝愍)이다. [[조선 선조|선조]]의 다섯째 서자 [[조선 원종|정원군]]과 그의 적실 부인 능성 구씨의 아들로 동복 큰아버지 [[신성군]]의 양자가 되었다. 생전에는 능창군이었으나 인조 10년 대군으로 추존되어서 능창대군으로 불린다. 승마(말타기)와 무예(특히 활쏘기)에 능했다. 형 [[조선 인조|인조]]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 이요를, 아들 없이 죽은 동생 능창대군의 사후양자로 입양되었다. 따라서 [[인평대군]]의 후손들이 그의 제사를 받들었고, 그의 묘소에는 인평대군의 손자 의원군 이혁의 묘가 같이 있었다. [[남연군]]의 호적과 [[일제 강점기]] 당시 [[흥친왕]], [[이준용 (1870년)|영선군 이준용]]의 호적에는 능창대군부터 시작되는 능창대군의 후손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는 적실 [[능성 구씨]] 부인과 결혼(1615년 음력 3월 결혼)한지 불과 1년도 채 아니 되어 사망하였지만 여자 노비에게서 딸 이영온을 두었고, 서녀 이영온은 인조가 [[남인]] 당수 미수 [[허목]]의 동생 [[허서]]에게 시집보냈다. == 생애 == === 생애 초기 === [[한성부]] 성서(城西) 새문리(塞門里)에서 태어났다. [[조선 인조|인조]], [[능원대군]]과 형제간이며, [[능풍군]]은 이복 형이었다. 어머니는 [[구사맹]]의 딸 [[인헌왕후|계운궁]] 구씨(具氏)이다. 생부가 정원군이었으나, 아들 없이 사망한 선조의 넷째 서자이자 동복 큰아버지인 [[신성군]]의 양자가 되어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군부인 신씨가 그를 양육하였다. 따라서 [[신립|신입]]은 양외조부가 되고, [[신경진]], [[신경희]]는 양 외삼촌이 된다. [[조선 원종|정원군]]과 [[신성군]] 모두 인빈 김씨 소생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외모도 훤칠하였으며 궁마술(弓馬術)에 능해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했다 한다.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별칭은 현공자(賢公子)였다 한다. 1601년 3세 나이로 '''능창수'''(綾昌守)에 첫 책봉되었으며 11년 후 1612년 14세 나이로 겨울에 '''능창군'''으로 개봉되었으며 광해군(光海君) 때 왕위를 위협한다 하여 왕이 되고자 한다는 고변이 있은 뒤 역모로 몰려 교동(喬桐)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된 후 스스로 목매 자진(自盡)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ob&pos=1&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8A%A5%EC%B0%BD+%EC%A3%BD 능창군 이전의 졸기]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조선의 공신|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임해군]]의 옥사 직후 [[익사공신|익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 신경희의 옥사와 최후 === [[1615년]](광해군 7) [[8월 14일]] 능창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 고변이 있자, 양사와 [[홍문관]]에서는 능창군을 국문할 것을 계속 청했다. [[8월 22일]] [[광해군]]은 능창군을 잡아다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직접 친히 국문을 한 뒤 옥에 가두었다가 [[강화]] [[교동도]]로 유배보냈다. 체포된 이들 중 소명국(蘇鳴國)은 능창군이 의붓외삼촌 신경희(申景禧)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증언했다. [[소명국]]에 의하면 신경희는 윤길 등과 사람을 모아 흉모와 은밀한 계책을 몰래 서로 의논했으며, 임금의 관상과 명운, 국운 길흉을 멋대로 점을 치고는 능창군이 40년간 치평할 임금이라는 점괘가 나왔다는 것이다. 주모자로 지목된 [[신경희]]는 사형당했고, 능창군을 비롯한 양시우(楊時遇), 소문진(蘇文震), 김정익(金廷益), 김이강(金以剛), 오충갑(吳忠甲) 등은 유배되었다. 그는 배소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고, 구시백(具峕伯)은 그의 목에 칼을 채웠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지만 [[정숙옹주]] 등이 그를 찾아 위문하였다. [[광해군]]은 지역 주민 고봉생(高封生)을 지정하여 하여금 위리 안에 같이 거주하게 하고, 밖에서 [[석회수]]로 밥을 지어서 위리안치된 집으로 들여보내게 했다. 그러나 고봉생은 날마다 제 밥을 덜어서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밖에 [[강화군청]]의 사동인 수생(壽生) 역시 배소로 유배된 능창군을 돌보았고, 자신의 밥을 그에게 주었다. 이를 확인한 수문장은 수생에게 [[위리안치]]된 곳에서 밥을 먹지 못하게 했다. [[1615년]](광해군 8) [[11월 17일]] 관청의 사동 수생에게 부모에게 고하는 글을 써서 전해준 뒤 자결하였다. [[수생]]은 그의 편지를 바로 정원군 내외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사합(沙盒)에 넣어 흙속에다 묻어 두었다가, [[1623년]] [[3월]] [[인조 반정]] 이후 인조에게 올렸다. 그가 자결한 것을 알지 못한 [[광해군]]은 [[11월 19일]] 의원을 보내 그의 병구완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가, 그의 자결 소식을 접하게 된다. 광해군은 [[현감]]과 [[별장]] 등을 처벌하였다. [[술]]을 좋아하던 [[정원군]]은 이 일로 [[홧병]]을 얻어 [[술]]을 더 마시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1623년]](광해군 15) [[3월]] [[인조 반정]] 이후 [[3월 15일]] [[김제시|김제남]], [[영창대군]], [[진릉군]] 이태경 등과 함께 복권되었고, 처음 [[증직|증]] [[가덕대부]](贈嘉德大夫)에 [[추증]]되었다가 [[1629년]](인조 7년) [[10월 15일]] 인조의 특명으로 다시 [[증직|증]] [[현록대부]](贈顯祿大夫)로 가증(加贈)되었으며, [[1630년]] 정원대원군이 논란 끝에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1632년(인조 10년) [[5월 4일]] 능창대군으로 추봉되었다. 따라서 그의 묘비는 증 능창대군 묘라 이름하게 되었다. === 사후 === 바로 [[경기도]] [[양주시|양주군]] ([[남양주시]]에 편입)에 처음 장사지냈다가 다시 [[1629년]](인조 6년) [[10월 29일]] [[경기도]] [[광주시|광주군]] (古治面) 근처 혁동(鞘洞) 난지원(卯之原)으로 이장되었다가 후일 다시 회곽관에 담겨 [[광주시|광주군]] 고골 궁안마을 뒷산으로 이장되었으며, [[1999년]]에 양증손자이혁의 시신과 함께 [[경기도]] [[포천시|포천군]] [[인평대군]] 묘역 인근으로 이장되었다. [[인평대군]]의 묘는 바로 그의 묘 옆에 조성되었다가 35년 만에 [[경기도]] [[포천시|포천]]으로 이장된다. [[1658년]] [[5월 13일]] 양자 [[인평대군]]이 사망하여 그해 7월 13일 발인하고 8월 2일 [[광주군]] [[동부면]] 춘궁리에 있던 그의 묘소에 안장되었지만, [[조선 숙종|숙종]]의 지시로 [[1693년]] [[7월 17일]] [[포천]] [[왕방산]]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묘소 바로 아래에는 그의 9대손 [[이재극]] 내외의 묘와, 그의 증손자 [[의원군]]의 4대손이자 그의 7대손인 [[이낙중]]의 부인 대구서씨의 묘소가 있었다. 좌측에는 [[의원군]] 이혁 내외의 묘소가 조성되고, 의원군 이혁 내외의 묘 바로 아래에 [[이연응]] 내외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그의 집은 [[광해군]]이 몰수하여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다. 사후 [[1623년]] 3월 형이 반정을 일으켜 [[조선 인조|인조]]로 즉위하면서 3월 15일 복권되었고, 가덕대부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현록대부로 추증되었다. [[조선 인조|인조]]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을 능창대군의 사후 양자로 지명하였다. 이로서 후대에 왕실로 입양되는 [[남연군]] 등의 호적에는 능창군의 7대손으로, 능창군부터 가계가 시작된다.능창군-인평대군-복녕군-의원군-안흥군-이진익-이병원-이채중(남연군) == 가계 == * 할아버지 : 조선 14대 임금 [[조선 선조|선조]] * 아버지 : 정원군 * (법적) 아버지 : [[신성군]] * 양어머니 : 군부인 신씨, [[신립]]의 딸 * 어머니 : [[인헌왕후]] 구씨, [[구사맹]]의 딸 ** 형 : 조선 16대 임금 [[조선 인조|인조]] ** 형 : [[능원대군]] * 부인 : 능성 구씨, 자녀 없음 ** 조카, 양자 : [[인평대군]] 요(麟坪大君 㴭, 1622년-1658년) - 조선 인조의 3남 ** 양며느리 : 복천부부인 동복 오씨 ([[1622년]] [[4월 22일]] - [[1658년]] [[8월 6일]]) - 증 영의정 오단(吳端)의 딸 : 6남 4녀를 낳았으나 차남, 4남과 딸 둘은 요절했다. 인평대군이 죽었을 때 임신 중이었는데 남편의 죽음 후 건강이 악화되어 낳지 못하고 죽었다. 이 때 장남과 삼남인 복녕군과 복창군은 군호를 받고 결혼한 상태였으나 나머지 2남 2녀는 어렸는데 현종이 고아가 된 사촌 형제들을 궁궐에 들여서 키웠다. * 첩 : 이름 미상, 여종 출신 ** 서녀 : 향주 이영온(李英溫) == 기타 == 그의 서녀 이영온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다가 택당 [[이식 (1584년)|이식]]의 택당집, 미수 [[허목]]의 [[미수기언]]에 능창군이 여종을 첩으로 삼고 딸 하나를 두었다는 내용이 실려있어 후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허목]]은 자신의 부인, 제수, 며느리에게도 일일이 묘비문을 짓고 직접 써주었다. 그러나 셋째 동생인 [[허서]]의 부인인 능창대군의 서녀 이영온에 대해서는 비문도, 추도하는 글도 남기지 않았다. [[조선 선조|선조]]의 다른 서자인 [[인성군]] 이공의 증손자 [[능창군 이숙]](綾昌君 李橚, ? ~ [[1768년]] [[11월 30일]])과는 동명이인이다. [[해원군]] 이건의 손자이며, 화산군 이연(花山君 李渷)의 아들인 [[능창군 이숙]]은 능창군 이전에게 재종손이 된다. == 미디어에서 == * [[왕의 여자]] - 이석민 == 같이 보기 == * [[조선 원종|원종 정원대원군]] * [[신성군]] * [[인헌왕후]] == 각주 == {{조선의 왕자}} [[분류:1599년 태어남]][[분류:1615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자]][[분류:운현궁]][[분류:자살한 정치인]][[분류:사형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강화군의 역사]][[분류:조선 선조]][[분류:조선 인조]][[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원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