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성'''(盧昌成, 일본식 이름: 八幡昌成, [[1896년]] [[3월 25일]] ~ [[1955년]] [[1월 9일]]{{뉴스 인용 |url=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7794 |저자=김윤식 |제목=우리나라 여자 아나운서 1호 이옥경 |출판사=기호일보 |날짜=2008-06-29 |확인날짜=2008-07-09 }})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방송인이다. == 생애 ==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시]] 출신으로 [[일본]] [[도쿄도|도쿄]]로 유학하여 [[도쿄 공업대학|도쿄고등공업학교]] 전기화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한 후 [[조선총독부]] 체신국 기수로 채용되어 방송국 설립에 필요한 기술을 맡았다가 방송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1920년대]]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 설립에 참여{{뉴스 인용 |url=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2529597 |저자=노라노 |제목=[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나의 선택 나의 패션 2. 멋내기 DNA |출판사=중앙일보 |날짜=2006-12-06 |확인날짜=2008-07-09 }} 하는 등 조선 방송계의 선구자격으로 일했다. 기술직으로 출발했으나 능력을 인정받아 함흥방송국 국장을 거쳐 [[조선방송협회]] 제2방송부장 및 사업부장, 방송국장 등을 지냈고, 동양전선주식회사 생산부장으로도 근무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상당한 재력가{{뉴스 인용 |url=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167436 |저자=권근영 |제목=‘신여성’에서 추억을 끄집어내다 |출판사=중앙일보 |날짜=2008-06-02 |확인날짜=2008-07-09 }} 로서 방송계 및 문화예술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전쟁 지원과 전시 체제 확립을 위해 조직된 단체에 두루 가담하기도 했다.{{서적 인용 |저자=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제목=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날짜=2004-12-27 |출판사=민족문제연구소 |출판위치=서울 |id={{ISBN|8995330724}} |페이지=359,384,389,396쪽}}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는 바람에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오르게 된다.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계속 중용되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에서는 [[대한민국 공보처]] 방송관리국장에 임명되었다. 공보처 공무원으로 재직 중 지병으로 사망했다. == 사후 == 부인은 [[마현경]]과 함께 한국 최초의 아나운서로 꼽히는 이옥경이며, 차녀인 노명자가 패션 디자이너로 크게 성공한 [[노라노]]이다.{{뉴스 인용 |url=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2532843 |저자=노라노 |제목=[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나의 선택 나의 패션 4. 여우 목도리 |출판사=중앙일보 |날짜=2006-12-10 |확인날짜=2008-07-09 }}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출판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같이 보기 == * [[경성방송국]] * [[조선임전보국단]] * [[노라노]] == 참고자료 == * {{국사편찬위원회 인물|102_30097|노창성|盧昌成}} == 각주 ==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55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방송인]][[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