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7/23/0200000000AKR20160723046100052.HTML?input=1195m |title=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소변 뿌린 40대 구속 |work=연합뉴스 |date=2016년 7월 23일}}] 계속되는 [[배설|배설물]] 투척 사건에 대해 묘역을 관리하는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노무현재단]] 측은 경비와 시설 강화는 노무현 생전의 뜻과 배치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라고 토로하였다.[{{뉴스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29552 |title=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경비 강화 쉽지 않아" |work=오마이뉴스 |date=2016년 7월 25일}}]
== 평가와 비판 ==
[[1980년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하다 정치에 입문하였다. 그의 정치 인생은 원칙을 굽히지 않으면서 [[권위주의]]와 [[지역주의]] 정치 타파를 위해 애쓴 노력의 연속이었다.[{{뉴스 인용 | url = http://imnews.imbc.com/replay/nwtoday/article/2351794_2710.html | 제목 = '바보 노무현'의 '원칙주의' | 출판사 = MBC }}{{깨진 링크|url=http://imnews.imbc.com/replay/nwtoday/article/2351794_2710.html }}][{{뉴스 인용 | 제목 = 원칙주의 '바보 노무현' 탄생 비화 아시나요? | url =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63928 | 형식 = | 출판사 = 제주의소리 | 저자 = 이승록 | 쪽 = | 날짜 = 2009-05-26 | 확인날짜 = 2010-04-26 }}][{{뉴스 인용 | url = http://www.lawissue.co.kr/news/articleView.html?idxno=7411 | 제목 = 본인도 좋아한 '바보 노무현' 별명 탄생 비화 | 저자 = 신종철 | 출판사 = 로이슈 | 날짜 = 2009-05-28 | 확인날짜 = 2009-05-26 | 형식 = | 뉴스 = }}] 재임 중에는 대연정 제안과 사법 개혁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와 권위주의를 탈피하려고 애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는 지지 정당으로부터도 비판받으면서 원칙과 소신에 입각해서 당정 분리라는 성과를 이루어내었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민주적이고 서민적인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재임 기간 중에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사회주의적이고 반미와 친북적인 설화가 많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으며,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기업의 요구를 많이 반영된 [[비정규직 보호법]]으로 정규직 전환을 가로막고 대량 해고로 이어져 실직자를 양산한 점(이랜드 사태 등)과 같은 노동 환경의 악화와 [[한미 FTA]]의 추진, 이라크 전쟁 파병, 부실한 부동산 개혁 및 친재벌적이라고 비판을 받아 진보, 보수 어느 진영에게서도 명확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보수주의자에 따르면 '친북좌파'라는 비판과 진보 진영에서는 '친미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저널 인용 | url =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14177 | 형식 = | 제목 = [커버스토리] 카멜레온 노무현 | 저널 = 위클리경향 | volume = 뉴스메이커 720 | issue = | 날짜 = 2007-04-17 | 저자 = 정용인 | 쪽 = | 인용 = | pmid = | doi = | id = | 확인날짜 = 2009-05-26 }}] 이 양립하고 있다. 이런 파병결정에 대해 훗날 [[문재인]]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대북 제한폭격을 거론했고 그것을 막기 위해 파병을 했다고 털어놓았다.[{{웹 인용 |url=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102/h2011021121030121000.htm# |제목=문재인 "박연차 게이트 면목없어, MB 정부는 사이비 보수" |확인날짜=2012-10-27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104121512/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102/h2011021121030121000.htm# |보존날짜=2011-11-04 |깨진링크=예 }}]
[[2010년]] 9월에 시행된 "역대 대통령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은 누구인지" 묻는 여론조사에서 [[박정희]]의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올랐다. 전체 지지율은 25.3%로 나타났으며 특히 20~30대 젊은층과, 화이트칼라 직종, 대학재학 이상의 고학력층에서는 박정희를 능가하는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9241436401&code=910100 '박정희 향수' 흐릿… MB 신뢰도 하락 때문?] 경향신문 2010년 9월 24일]
=== 긍정적 평가 ===
==== 법치주의 확립을 위한 노력 ====
노무현은 대통령 취임 뒤 국정원장의 독대 보고를 없앴고,[{{뉴스 인용 | url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43145 | 제목 = 칼자루 놓았다가 '검'에 쓰러진 노무현 | 날짜 = 2009-06-01 | 출판사 = 오마이뉴스 | 저자 = 김용국 }}] 사법 고시 23회인 [[강금실]]을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사법부에 뿌리 깊은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가 있다.[{{뉴스 인용 | url = http://www.consumernews.co.kr/news/view.html?gid=main&bid=news&pid=152062 | 제목 = 노무현의유산,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 | 날짜 = 2009-06-01 | 출판사 =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 저자 = 김미경 | 확인날짜 = 2009-06-09 }}] 2003년 구태의연한 대법관 선발 관행에 제동을 걸었고, 사법 사상 최초로 여성 헌법재판관([[전효숙]])과 서열을 무시한 여성 대법관([[김영란 (법조인)|김영란]])을 탄생시켰다. 또 사법 개혁 위원회를 통해 법조 일원화, 국민의 사법 참여 등의 사법부 개혁을 위한 밑거름을 쌓았다. 일각에서는 지나친 의전 등으로 문제가 되던 법원들의 재판 사무 감사가 [[2006년]] 폐지된 이유가 [[김영란 (법조인)|김영란]] 대법관이 기수를 파괴하며 올라갔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김두식 저, 《불멸의 신성가족》, 247쪽, [[창비]].] 언론인 강준식은 "선거공영제를 확대하여 돈이 들지 않는 선거제를 확립한 것이라든지, 부작용은 있었지만 시민단체의 활발한 정치참여를 유도한 것이라든지, 시장 개입을 없앰으로써 정경유착의 고리를 상당 부분 끊은 것이라든지, 인권을 신장시킨 것이라든지, 권위까지 함께 버리는 우를 범했지만 권위주의를 청산한 것이라든지 하는 것 등은 다 그의 공이다."라고 말했다.[[http://magazine.joinsmsn.com/search.asp?source=sisa&query=%B1%C7%C0%A7%B1%EE%C1%F6+%C7%D4%B2%B2+%B9%F6%B8%AE%B4%C2+%BF%EC%B8%A6+%B9%FC%C7%DF%C1%F6%B8%B8&x=0&y=0 월간조선]{{깨진 링크|url=http://magazine.joinsmsn.com/search.asp?source=sisa&query=%B1%C7%C0%A7%B1%EE%C1%F6+%C7%D4%B2%B2+%B9%F6%B8%AE%B4%C2+%BF%EC%B8%A6+%B9%FC%C7%DF%C1%F6%B8%B8&x=0&y=0 }} 2011년 1월호에서 2011년 8월]
==== 어족자원 복원 ====
해양수산부 장관 출신으로 연안 어족자원 복원에 노력했다.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저인망식 불법어로를 근절하기 위해 촘촘한 그물을 제조하는 업체에 영업정지를 가하는 등 강경책을 사용했으며 연안에 인공 어초를 대량 투입하는 등의 대책을 시행하였다.[[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096006&ctg=13 [이철호의 시시각각]중국은 이 대형 참치를 보라]{{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096006&ctg=1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8301829261&code=940301 저인망 싹쓸이 불법어로 大檢이 '칼' 뽑았다]]
=== 부정적 평가 ===
[[노무현에 대한 비판]]을 참고하십시오.
재임 기간 중에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사회주의적이고 반미와 친북적인 설화가 많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으며,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기업의 요구를 많이 반영된 [[비정규직 보호법]]으로 정규직 전환을 가로막고 대량 해고로 이어져 실직자를 양산한 점(이랜드 사태 등)과 같은 노동 환경의 악화와 [[한미 FTA]]의 추진, 이라크 전쟁 파병, 부실한 부동산 개혁 및 친재벌적이라고 비판을 받아 진보, 보수 어느 진영에게서도 명확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보수주의자에 따르면 ‘친북좌파’라는 비판과 진보 진영에서는 ‘친미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저널 인용 | url =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14177 | 형식 = | 제목 = [커버스토리]카멜레온 노무현 | 저널 = 위클리경향 | volume = 뉴스메이커 720 | issue = | 날짜 = 2007-04-17 | 저자 = 정용인 | 쪽 = | 인용 = | pmid = | doi = | id = | 확인날짜 = 2009-05-26 }}] 이 양립하고 있다. 이런 파병결정에 대해 훗날 [[문재인]]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대북 제한폭격을 거론했고 그것을 막기 위해 파병을 했다고 털어놓았다.[{{웹 인용 |url=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102/h2011021121030121000.htm# |제목=문재인 "박연차 게이트 면목없어, MB 정부는 사이비 보수" |확인날짜=2018-01-2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104121512/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102/h2011021121030121000.htm# |보존날짜=2011-11-04 |깨진링크=예 }}]
==== 정치 ====
===== 취약한 정치 기반 =====
그는 스스로 지역주의에 반대하며 [[민주자유당]]과 [[새천년민주당]]의 주류의 그늘에서 벗어나 개혁 정당인 [[열린우리당]]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국회에서의 그는 자신의 지지 정당인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기반의 취약성과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같은 기존 정치 세력과의 타협이 부족해 다수당의 횡포로 탄핵 사태에 이르러 정치적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국회의원]] [[김경재]]는 그의 정치력 자체를 의심하였다. [[2004년]] [[김경재]]는 노무현을 가리켜 "[[미국]]은 노 대통령이 다중인격자처럼 행동해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노대통령은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등 기본적인 상식이 없는 지도자"라고 지적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0038730 민주당 김경재의원 노대통령에 독설 퍼부으며 탄핵 정당성 부각] 뉴시스 2004년 03월 15일자] [[김근태]]는 "한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는 것은 노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그들이 하라는 대로 다 했기 때문"이라면서 "어떻게 현충일에 일본에 가서 '김구(金九) 선생은 실패한 정치인'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지적하기도 했다.[[http://news.donga.com/3//20030722/7966546/1 김근태의원 "盧의 '웃음거리' 발언이 웃음거리"] {{웨이백|url=http://news.donga.com/3//20030722/7966546/1 |date=20140116202307 }} 동아일보 2003년 07월 22일자]
===== 측근 · 친인척 비리 논란 =====
노무현은 대선 당시 깨끗한 정치, 낡은 정치 타파를 기치로 내걸어 집권에 성공했으며, 재임 중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도덕성을 강조했다. [[참여정부]]가 내건 제일의 기치 또한 도덕성이었다.[{{뉴스 인용 | 제목 = '깨끗한 정치' 특히 강조했는데…도덕성 큰 타격 | url =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573433 | 형식 = | 출판사 = SBS | 저자 = 정준형 | 쪽 = | 날짜 = 2009-04-07 | 확인날짜 = 2010-04-26 }}] 그러나 친형인 [[노건평]]을 비롯하여 [[안희정]], [[이광재 (정치인)|이광재]] 등의 측근 비리에 연루되었다. 항상 도덕성을 토대로 정치적 정당성을 주장하던 노무현이었지만 측근과 친인척의 비리를 막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인용문 | 노무현이 대통령 되면 이제 이상 더 대통령의 의혹 사건을 가지고 국회에서 밤낮 조사하자, 이렇게 싸우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부정부패 없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부정부패 문제가 국회 일의 절반을 넘습니다. | 2002년 12월, 16대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인용문 | 지금까지 청탁문화는 밑져야 본전이었습니다. 본전이었는데, 그걸로는 청탁 문화를 근절할 수 없습니다. 걸리면 패가망신으로…. | 2002년 [[12월 26일]], 대통령 당선자 특별 회견에서}}
{{인용문 | 국민들의 돼지 저금통을 비롯한 성금에 의해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너무나 투명한 돈이고…. | 2003년 [[5월 10일]], 재산관련 특별 기자 회견[{{뉴스 인용 | 제목 = 盧 전 대통령, 날개꺾인 '도덕성' | url =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90407225104045 | 형식 = | 출판사 = MBC | 저자 = 조효정 | 쪽 = | 날짜 = 2009-04-07 | 확인날짜 = 2010-04-26 }}] }}
이러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취임 첫 해부터 대선 자금 문제로 안희정, 최도술 등 주변 인사들이 줄줄이 사법 처리되는 상황에 몰리지만 특유의 공세적 대응으로 불법 대선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밖에 [[2004년]] 3월에는 전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에게서 3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형 노건평이 불구속 기소되자 기자 회견을 열어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라고 형을 두둔하였고, 이 발언 이후 남 전 사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뉴스 인용 | 제목 = 盧 '깨끗한 정치' 하겠다더니… 결국 말만 앞섰다 | url = http://www.segye.com/Articles/News/Politics/Article.asp?aid=20090408004511&subctg1=&subctg2= | 형식 = | 출판사 = 세계일보 | 저자 = 박창억 | 쪽 = | 날짜 = 2009-04-08 | 확인날짜 = 2010-04-26 }}]
또한 [[변양균]]-[[신정아]] 의혹이 터졌을 때는 "요즘 깜도 안 되는 의혹들이 많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라는 발언을 하는 등 참여정부의 도덕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정치 상대를 비난하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결국 2007년 11월 "대통령 취임 후 새살림을 꾸리려고 했는데…. 구시대의 막내 노릇, 마지막 청소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참여정부는 설거지 정부"라고 평가하면서 참여정부 시절 불거나온 비리 의혹들에 대해서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뉴스 인용 | 제목 = <드러나는 '노무현 게이트'> 盧 "이권개입땐 패가망신" 큰소리 치더니 '盧家亡身' | url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408010705231930040 | 형식 = | 출판사 = 문화일보 | 저자 = 유병권 | 쪽 = | 날짜 = 2009-04-08 | 확인날짜 = 2010-04-26 }}]
국회의원 [[이종걸]]은 "'청년 노무현'은 대통령 되기 이전까지가 끝"이라며 "권력의 맛을 본 대통령 이후의 노무현은 더 이상 '청년 노무현'이 아니다"라며 비판했다.[[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090508121504189&p=dailian 이종걸 "권력 맛본 노무현은 '청년 노무현' 아니다"] 데일리안 2009.05.08] [[2009년]] 5월 그는 일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이 밝히면서도 "'청년 노무현'은 남에게 빚을 졌다고 하면, 갚지 않아도 될 빚까지 갚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밝히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증(愛憎)을 피력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민정수석도 구속됐다"면서 "법의 형평성 차원에서, 임채진 검찰총장 입장에서 본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구속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포괄적 뇌물죄 적용과 관련, "돈의 액수가 적다는 게 문제는 안 된다. 대통령 위치에서도 돈을 받았다면 포괄적 뇌물죄가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전직 대통령을 사법처리까지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 [[김지태]]와 인연 논란 =====
노무현은 60년 김해 진영중학교 2학년 재학중 친일 부정축재 의혹이 있는 김지태가 설립한 부일장학회 시험에 합격해 1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다고 한다. 부산상고에 입학해서도 동문회장인 김지태가 교내에 만든 '백양장학회'에서 3년 동안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마쳤다고 한다. 78년에는 김지태가 설립한 삼화그룹 고문 변호사로 일했으며 자신의 자전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이 과정을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나는 장학금만 바라보고 부산상고에 입학해 김지태 선생의 후배가 되었다"면서 "나의 오늘은 그 분(김지태)이 디딤돌을 놓아준 셈"이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뉴스 인용 | 제목 = 盧 "김지태씨는 나의 디딤돌"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9&aid=0000384639 | 출판사 = 매일경제 | 저자 = 윤상환 | 쪽 = | 날짜 = 2004-08-03 | 확인날짜 = 2013-01-24 }}] 또한 1984년엔 김지태 회장의 유족들이 부탁한 117억원 짜리 상속세 소송을 맡아 전액을 취소 시키는 승소판결을 이끌어낸 바 있으며 그는 착수금 2000만원, 승소 사례금 4000만원을 포함 총 6000만원을 김지태 유족으로 부터 받았다고 한다.[{{뉴스 인용 | 제목 = 선택 2002 대선후보 검증 제1부 <2> 변호사 시절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129211 | 출판사 = 동아일보 | 저자 = 김정훈 | 쪽 = | 날짜 = 2002-05-13 | 확인날짜 = 2013-01-24 }}]
[[정수장학회]] 논란이 한창이던 2012년 10월 22일, [[이정현 (정치인)|이정현]] 새누리당 공보단장은 노무현과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의 원래 명칭)의 원소유자인 김지태와의 이와 같은 인연을 들어 논란을 촉발 시켰다. 이정현은 "김지태씨는 친일 부정축재 의혹이 있는데, 민주당이 언제부터 그런 의혹이 있는 사람들의 대변자가 됐냐"라고 말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0026205] 같은날 [[박용진]] 민주당 대변인은 이정현의 발언을 비판하며 "민주당이 '왜 강압과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재산을 강탈하고 그 위에서 온갖 혜택을 누렸냐'고 묻자 느닷없이 새누리당 이 단장이 '너도 한패냐'고 윽박지르고 나섰다"라고 말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0026440]
==== 경제 ====
===== 실패한 부동산 정책 =====
[[참여정부]] 5년간 가장 실패한 정책으로 부동산 정책이 꼽힌다. [[참여정부]] 시절 전국 미분양 주택은 2003년 3월 2만 3000여 가구에 불과했 것이 [[참여정부]] 말기 2007년 12월 11만여 가구로 약 4.7배 이상 증가하였다.[{{뉴스 인용 | 제목 = 참여정부 5년간 미분양 아파트 4.7배 늘어 | url = 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news_seq_no=314406 | 형식 = | 출판사 = MBN | 저자 = | 쪽 = | 날짜 = 2008-02-15 | 확인날짜 = 2014-04-15 }}] 또한 참여정부 5년 동안 신도시 집값은 56% 상승했으며 전국 집값은 36%나 상승했다.[{{뉴스 인용 | 제목 = 참여정부 5년, 신도시 집값 56% 상승..전국은 35% 올라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3&aid=0001972723 | 형식 = | 출판사 = 뉴시스 | 저자 = 김훈기 | 쪽 = | 날짜 = 2008-02-22 | 확인날짜 = 2014-04-15 }}]
[[참여정부]]의 부동산정책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부동산시장의 해법을 경제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소득 계층간 갈등구조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이로인해 서울 강남권 등 일부 부유층을 향해 반 시장적 규제를 가했고 이는 결국 주변집값마저 끌어올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전국토의 난개발로 인해 토지가격 급등과 저금리 기조에 따른 과잉 유동성에 대한 대처 등 부동산시장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수요가 몰리는 곳에 공급을 확대하는 정책이 아닌 단순히 투기적 수요를 근절해 부동산 시장을 잡겠다는 수요측면에서만 접근함으로써 불씨를 키웠다. 정상적인 수요도 투기로 간주해 수요를 차단시켰고 공급은 지나친 가격 규제를 도입해 공급을 더욱 줄어들게 만들었다.[{{뉴스 인용 | 제목 = [참여정부 부동산 평가(상)] 정책 공과 실 | url = 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news_seq_no=314406 | 형식 = | 출판사 = 파이낸셜뉴스 | 저자 = 김관웅 | 쪽 = | 날짜 = 2008-02-21 | 확인날짜 = 2014-04-15 }}]
===== 빈부 격차 및 소득 양극화 심화 =====
노무현 정부 때는 임기 내내 소득 분배가 악화됐다. 지니계수는 2002년 0.293에서 노무현 정부 첫해인 2003년 0.283으로 낮아졌다가 이후 2004년 0.293, 2005년 0.298, 2006년 0.305, 2007년 0.316으로 올랐다. 반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0.319에서 2009년 0.320으로 올랐으나 2010년 0.315, 2011년 0.313, 2012년 0.310으로 내려 소득 분배가 소폭이지만 개선됐다. 박근혜 정부에선 2013년 0.307, 2014년 0.308, 2015년 0.305로 비슷했다.[*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17043091677]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했던 참여정부 시절에는 오히려 지니계수가 증가하면서 소득 불평등이 악화되었고, 참여정부보다 성장을 강조했던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오히려 지니계수가 감소하면서 소득 불평등이 개선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2018년 8월 23일 통계청이 발표한 2분기 가계동향조사(소득 부문) 결과에 따르면, 노무현정부(2004~2007년·2003년은 통계 작성 시작연도로 전년과 비교 불가)에서의 1분위 가구 연평균 소득성장률은 4.0%였으며, 5분위 가구는 5.0%를 기록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보수정권으로 분류되는 이명박·박근혜정부에서는 오히려 1분위 가구의 소득성장률이 높게 나타났다. 이명박정부에서 1분위 가구의 가계소득은 연평균 6.6%나 오른 반면 5분위 가구 성장률은 4.6%에 그쳤다. 박근혜정부는 1분위 가구가 2.5%, 5분위 가구는 2.0%의 성장률을 보였다. 보수 정권기에는 소득 5분위 배율과 지니계수가 개선되었으나 진보 정권기에는 도리어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두원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보수정권에서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란 통념과 달리 2000년대 이후로는 보수·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사회보장성 제도가 대폭 확대돼 왔다"며 "오히려 높은 경제성장을 통해 분배도 개선시키는 방식이 효율적임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소득주도성장은 이번 2분기 가계소득 통계를 통해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평가된다. 그동안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취약계층의 소득을 올려주는 방식으로 새로운 성장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지난 1분기에 이어 이번 2분기에도 저소득층의 소득이 절대적으로는 물론 상대적으로도 큰 폭으로 감소한 게 확인됐기 때문이다.[https://www.mk.co.kr/news/economy/view/2018/08/530847/|#]{{깨진 링크|url=https://www.mk.co.kr/news/economy/view/2018/08/530847/%7C }}[https://www.yna.co.kr/view/AKR20180823079851002|#]{{깨진 링크|url=https://www.yna.co.kr/view/AKR20180823079851002%7C }}
2003년 7.23배였던 소득 5분위 배율은 해마다 증가해 2006년 7.64배까지 벌어졌고, 지니계수는 2003년 0.341에서 2006년 0.351로 증가해 소득 불평등이 심화됐다. 소득 5분위 배율은 상위 20% 소득을 하위 20% 소득으로 나눈 값이고, 지니계수는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하고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함을 나타낸다. 양극화를 해소할 참여정부의 정책이 없었다는 비판이 있으며, 관료들이 주도한 정책은 양극화를 더 심화시켰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유종일 한국개발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경제학)는 “참여정부는 출범 초기에 ‘국민소득 2만불론’이라는 성장우선주의 담론을 내걸었고, 집권하자마자 법인세 인하 조치를 취했다고 비판했다.
==== 사회 문화 ====
===== [[나이스]] 도입 논란 =====
2003년 4월 [[교육행정정보시스템|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의 논쟁이 뜨거웠다.[{{웹 인용|출판사=조갑제닷컴|url=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752&C_CC=AZ|제목=전교조의 본질을 보여주는 NEIS 호칭|날짜=2003-05-30}}] 토론회, 집회 등에 여러 가지 양상으로 도입 반대 의견들이 쏟아졌다.[{{웹 인용|출판사=오마이뉴스|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20723|제목=2003년 4월, 4대 인권흐름|날짜=2003-04-30}}] 결국 [[출결]], [[성적]]만 관리하는 형태인 [[호주]]의 경우[{{웹 인용|출판사=KBS|url=http://news.kbs.co.kr/news/view.do?ncd=446093|제목=뉴스9 나이스, 인권침해 극복해야|날짜=2003-06-06}}]와 달리 모든 업무를 관리하는 초기 설계로 관철 되었다. 반대측에 우려대로 운영 초기 시스템 부하 문제 등이 발생하였으나[{{웹 인용|출판사=이데일리|url=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DCD=A606&newsid=02564966596317144|제목=교총·전교조, "나이스 전면 재검토" 한 목소리|날짜=2011-07-22}}] 일선 교사들은 전산화로 업무가 편해졌다고 찬사를 보낸다.[{{웹 인용|출판사=디지털 타임스|url=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11022302010960600004|제목=엠투소프트, BI분야 차별화된 경쟁력으로 괄목 성장|날짜=2011-02-23}}] 산간 벽지에 폐교 위기의 [[학교]]가 아닌 부촌에 [[사립 학교]] 조차 [[사물 인터넷|IoT]], [[클라우드_컴퓨팅|Cloud]] 등을 도입[{{웹 인용|출판사=모비인사이드|url=http://www.mobiinside.com/kr/2015/12/14/dt-5keyword/|제목=[정주용의 모바일 트렌드] DT 시대의 5가지 키워드를 연결하자|날짜=2015-12-14}}]하여 [[전산]] 시스템을 증설하기 힘든 결함이 존재한다.[{{웹 인용|출판사=경향신문|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222144165&code=940401|제목=“NEIS 성적 오류 어쩌다 발생했나”|날짜=2011-07-22}}]
===== [[황우석 사건]] =====
[[황우석]] 사건에서의 태도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5년]] [[11월 27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PD수첩]]이 황당한 취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협박과 위협도 한다고 한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는 글을 올리면서 PD수첩의 줄기세포에 진위에 대한 취재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했으며, 이후 줄기세포가 가짜로 판명된 후에도 "자, 이걸로 정리를 하자"라는 말로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는 비판이 있다.[{{저널 인용 | url =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01/05/200701050500017/200701050500017_1.html | 형식 = | 제목 = '황우석 사태' 1년, 최승호 전 'PD수첩' 팀장의 토로 | 저널 = 신동아 | volume = 568 | issue = | 날짜 = 2007-01-01 | 저자 = 김승훈 | 쪽 = 244~260 | 인용 = | pmid = | doi = | id = | 확인날짜 = 2010-04-26 }}]
이후 [[2006년]] [[12월 28일]]에는 황우석 사건을 통해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같은 해 1월에 물러난 박기영 전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이 정책기획위원으로 발탁되었는데, "박 전 보좌관이 정책기획위원을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일으켰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라고 발언을 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뉴스 인용 | 제목 = 노대통령 "국민이 정치 지배할 것이다" | url =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181027.html | 출판사 = 한겨레 | 저자 = 신승근 | 쪽 = | 날짜 = 2006-12-28 | 확인날짜 = 2010-04-26 }}]
===== 노동 정책 =====
한편 [[2007년]] 12월 노동운동계에서는 노무현 정권에서 구속되거나 희생당한 노동자 수가 [[김영삼]] 정권의 두 배라며 비판하였다.[{{뉴스 인용 | 제목 = 노무현 정권 구속노동자, 김영삼 정권의 두 배 | url =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5175 | 형식 = | 출판사 = 참세상 | 저자 = 이꽃맘 | 쪽 = | 날짜 = 2007-12-03 | 확인날짜 = 2010-04-26 }}] 일부 노동단체는 노무현 정권에게 인권을 유린당했다고 주장하였으며 20여 명의 구속 노동자가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한 일도 있었다. 단식 농성에 참여한 구속 노동자들은 "하중근 사망 사건" 관련 싸움을 진행했던 포항건설 노조의 9명, 타워크레인 노동자 5명, 뉴코아-이랜드 관련 2명, 비정규직 철폐와 한미 FTA 반대 집회에서 연행 구속된 3명, 노사관계 로드맵 야합에 반대하며 [[한국노총]] 점거 농성을 진행한 2명의 노동자 등이다. 언론에서는 이렇게 많은 수가 감옥에서 단식 농성에 돌입한 것은 독재 타도를 외치던 80년대 이후 처음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한편 언론지 '참세상'의 조사에 따르면, 구속 노동자 후원회가 집계한 [[2007년]] [[11월 30일]] 당시 구속 노동자는 총계 62명으로 집계하였으며, 노무현 정권에만 1천 37명의 노동자가 구속된 바 있다고 주장했다. 그중 2007년 11월에만 17명이 구속되었다. 이는 문민정부가 들어섰다는 김영삼 정권 때 632명보다 두 배에 가까운 수치이다. 구속 노동자들은 그 외에 "강제 구금당한 이주 노동자의 수는 너무 많아서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외교 ====
노무현은 [[2003년]] 6월의 [[일본]] 방문에서 한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 발언과, [[2004년]] 7월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 발언한 것을 두고 비판 여론이 제기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에서는 그의 외교 정책을 "굴종 외교"로 규정하였다.
2004년 한일정상회담 직후에는 한나라당 이상배 정책위의장이 그의 외교를 '등신외교'라고 비판하자 청와대와 민주당이 강력 반발, 국회 본회의를 거부하는 등 여야가 정면 충돌하기도 했다.[[http://www.chosun.com/politics/news/200306/200306090298.html ‘盧 등신외교‘ 비판 발언 파문] {{웨이백|url=http://www.chosun.com/politics/news/200306/200306090298.html# |date=20120118201009 }} 조선일보][[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9&aid=0000029036 "盧대통령 등신외교" 발언 파문] mbn 2003년 06월 09일자] 이때문에 [[대한민국 국회|국회]] 의사 진행이 중단되는 등의 파행이 벌어지기도 했다.[[http://www.hani.co.kr/section-003100001/2003/06/003100001200306092059263.html '등신외교' 오뉴월 서릿발 대치] 한겨레 2003년 06월 09일자]
===== 대북 안보관 논란 =====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논란|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을 포기했다는 주장]]이 있었다.[{{뉴스 인용 |제목 =정문헌 "'노무현 NLL 땅따먹기' 주장은 내 착각"|url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376336|출판사 =뉴스토마토|날짜 =2013-06-26 }}] 이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이 "실질적으로는 거의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문제를 놓고 괜히 어릴 적 땅따먹기.할 때 땅에 줄 그어놓고 니 땅 내 땅 그러는 것 같다"면서 NLL이 안보상의 실질적 문제가 아닌 정서적인 문제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어 "대강 그려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어느 쪽도 대강그릴 수 없는 심리적 상태,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NLL이 '영토선'이라는 시각에 대해서도 "내가 NLL이 무슨 영토선이냐고 했더니 '목숨 걸고 지킨 우리의 영토선이고 방위선'이라고 하던데 일리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선 때문에 아까운 목숨을 잃은 것이니까 그 선이 합의가 되어있는 선이라면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냐"면서 NLL에 대한 새로운 합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설명했다고 한다.
이에 송대성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노무현의 민주평통 NLL발언에 대해 "어떻게 국군통수권자로서 농담처럼 NLL문제를 얘기할 수 있냐"고 반문하면서 "영토문제에 대해 통수권자가 이렇게 말하는 경우는 세계에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북측은 NLL이 일방적으로 그어졌다고 주장하면서도 70년대 중반까지 실제적인 영토선으로 준수해왔으나 대북햇볕정책이 실시되면서부터 북한이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김영호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을 수호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대단히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말했다. 이어 "NLL이 무너질 경우 수도권 방어가 어렵고, 국익과 안보에 위해가 올 것이기 때문에 NLL 준수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데 대통령은 국민들보다도 안보의식이 해이한 것 같다"면서 "노 대통령이 임기말 대북관계에서 억지 성과를 내려는 데 집착해 누가 봐도 납득이 안 되는 이상한 망언들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1102010304231110022 "땅따먹기 같은 NLL"… 盧대통령 발언 비난 목소리] 문화일보]
이렇게 보수적인 색채를 띄는 사람들이 [[NLL]]([[북방한계선]])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영토선적인 인식을 가지고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지만, 이런 문제는 김영삼 정부 시절 국방부 장관이 국회에서 한 발언[{{뉴스 인용 |제목 =李국방, 북방한계선 발언 논란|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034059|출판사 =연합뉴스|날짜 =1996-07-16 }}] 을 볼 때 단순히 '트집잡기'에 지나지 않으므로 건설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뉴스 인용|제목 =연평도 해법? "NLL을 남쪽으로 물려 다시 그어라"|url =http://pressian.com/news/article.html?no=61478|출판사 =연합뉴스|날짜 =2010-10-13|확인날짜 =2014-05-29|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40529103331/http://pressian.com/news/article.html?no=61478|보존날짜 =2014-05-29|깨진링크 =예}}]
한편 대북低(저)자세 외교라는 비판과 함께 민간 차원의 북한 반대 운동을 탄압하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였다는 주장이 있었다. 민간단체의 인공기 소각 퍼포먼스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북한에 사과한 것에 대해서도 대북 굴종 외교 논란이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201733 盧, 인공기 훼손 유감 표명 여론수렴도 없이 결정]][[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201706 [사설]대통령 유감표명 적절치 않았다]]
이런 태도에 대하여 반론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헌법 제66조 제3항)를 다하여야 하는 대통령 입장에서 대북 적대를 하여 괜히 국익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남북관계개선의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는 남북신뢰를 다지기 위한 전략적 발언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결과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한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 인물평 ====
* [[조지 W. 부시]]-[[오바마]] 정권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던 [[로버트 게이츠]] 전 미국방부 장관은 자신의 회고록 임무(Duty)에서 지난 2007년 11월 서울에서 당시 재임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고 소개한 뒤 "나는 그가 반미적(anti-American)이고 아마도 약간 정신나갔다(crazy)고 결론내렸다"고 말했다.[{{뉴스 인용 | 제목 = 盧 前대통령 정신나간 인물" 게이츠 회고록 논란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sid1=&oid=001&aid=0006699781 | 형식 = | 출판사 = 연합뉴스 | 저자 = 이승관 | 쪽 = | 날짜 = 2014-01-15 | 확인날짜 = 2014-01-15 }}]
*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무장관은 자신의 저서 "최고의 영예"에서 노무현을 평가하길 "좀처럼 심중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고, 반미 감정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적었다.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만난 [[조지 W. 부시]]와의 정상회담 기자회견장에서 '종전선언' 발언 요청을 한 노무현을 떠올리며 '이상한 성격'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란 독설도 쏟아냈다.[{{뉴스 인용 | 제목 = 콘디 라이스 전 美 국무장관 "DJ는 이상주의자…노무현은 속을 알 수 없었죠" | url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82303791 | 형식 = | 출판사 = 한국경제 | 저자 = 김재일 | 쪽 = | 날짜 = 2012-08-23 | 확인날짜 = 2013-01-24 }}]
* [[새누리당]] 대통합위원회 기획조정특보 [[김경재]]는 [[2012년]] [[12월 5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유세기간 전남 [[여수시]]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지원유세에 나서 노무현을 맹비난했다. [[김경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호남 사람의 한과 희망이 얽혀져 90% 이상 지지를 한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면서도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르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노아무개란 사람이 국정을 농간하고 호남을 차별하고 심지어 자신에게 90%대를 찍어준 우리에게 '그 사람들이 뭐 나 좋아서 찍었습니까, [[이회창]] 미워서 찍었지'라는 싸가지 없는 발언을 했다"면서 "호남 사람들에게 한을 맺히게 했고 우리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고 말했다.[{{뉴스 인용 | 제목 = 김경재 "盧, 싸가지 없는 발언만 하며 호남차별"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4&aid=0002268511 | 형식 = | 출판사 = 이데일리 | 저자 = 박원익 | 쪽 = | 날짜 = 2012-12-05 | 확인날짜 = 2014-01-25 }}]
* [[2008년]] [[9월 24일]] 민주당 [[박지원 (정치인)|박지원]] 의원은 [[평화방송]]의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에도 유독 [[호남]]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는 말을 많이 했다"라고 비판했다. "호남당을 벗어나기 위해 만든 [[열린우리당]]이 결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이 받았던 지지표를 이번 선거에서 반토막 내서 [[한나라당]]에다 정권을 바친 꼴 아닌가"라고 성토했다.[{{뉴스 인용 | 제목 = 박지원 "盧전대통령의 호남 발언 '배은망덕'"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2294079 | 형식 = | 출판사 = 뉴시스 | 저자 = 김달중 | 쪽 = | 날짜 = 2008-09-24 | 확인날짜 = 2010-04-26 }}]
* [[진중권]]은 "노 전 대통령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었고 거의 종교적 열정에 가까울 정도로 그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라며 "어리석을 정도로 무구했던 그 순수한 신뢰를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배신해도 되는 것인지 안타깝다"라고 비판했다.[{{뉴스 인용 | 제목 = 진중권 "盧, 이 정도로 한심한 수준일 줄이야" | url =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48932 | 형식 = | 출판사 = 뷰스앤뉴스 | 저자 = 이준기 | 쪽 = | 날짜 = 2009-04-08 | 확인날짜 = 2010-04-26 }}]
* [[지만원]]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아침 일찍 패가망신하는 도피처로 자살을 택한 것"이라며 폄하한 뒤 "파렴치한 죄를 짓고 그 돌파구로 자살을 택한 사람이 왜 존경의 대상이 돼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주장했다.[{{뉴스 인용 | 제목 = "노무현, 패가망신 도피처로 자살" | url = http://www.newdaily.co.kr/html/article/2009/05/27/ART27473.html | 형식 = | 출판사 = 뉴데일리 | 저자 = 임유진 | 쪽 = | 날짜 = 2009-05-27 | 확인날짜 = 2010-04-26 }}{{깨진 링크|url=http://www.newdaily.co.kr/html/article/2009/05/27/ART27473.html }}]
* [[이인제]] 선진통일당 대표는 2012년 11월 13일 새누리당 세종시당 선대위 발대식에서 노무현은 "부패혐의에 쫓겨 자살했다"고 말했다.[{{뉴스 인용 | 제목 = 이인제 "盧, 부패혐의 쫓겨 자살, 문재인 영원한 죄인"|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1987982 | 형식 = | 출판사 = 프레시안 | 저자 = 여정민 | 쪽 = | 날짜 = 2012-11-14 | 확인날짜 = 2013-08-18 }}]
* [[김영삼]]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라고 평가절하 하였다.[[http://www.sisaon.co.kr/sub_read.html?uid=1085§ion=sc14 YS 단독인터뷰-"DJ가 1년6개월 동안 내 뒷조사해, 그러나 용서…"] {{웨이백|url=http://www.sisaon.co.kr/sub_read.html?uid=1085§ion=sc14 |date=20120127113200 }} 시사온 2009년 10월 24일자 기사]
* [[2003년]] 그의 둘째 형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 (1945년)|남상국]]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과 관련, 언론에 출연하여 [[남상국 (1945년)|남상국]]의 실명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있다. 노무현의 남상국 비난 발언은 언론을 통해 공식 보도되었다. 이 사건 직후 남상국은 한강 다리에서 투신, 13일만에 시신이 발견되었다.
=== 기타 ===
==== 서민 대통령 ====
진보적 가치 실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등등을 노무현 정신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노무현 정신의 핵심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바보 노무현[[http://plus.hankyung.com/apps/newsinside.view?aid=201412302651A&isSocialNetworkingService=yes '바보 노무현'과 다른 문재인 의원의 선택]]
의 삶처럼 사람 냄새 나는 삶의 실현이었던 듯하다. '대통령의 언어'가 아닌 '서민의 언어'로 말하고 서민의 몸짓으로 행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언행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도 많았고, 그로 인해 안티도 많았다. 이 모든 해프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뒤에도 털어내지 못한 서민적 언행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민적 풍모는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낙향해 살면서 보여준 봉하마을 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http://www.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597 노무현 서거 6주기, 그의 향기가 그윽한 까닭은?]]
==== 여론 조사 ====
2011년, 미국의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는 노무현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평가를 공개했다. 이 문서에서는 노무현을 "고졸 출신의 대통령으로서 국제 무대에서는 신인이지만 주관이 뚜렷하고 신념이 확고하다"고 평가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5&aid=0000204305 위키리크스 "YS 다혈질, DJ 능숙"…노무현은?] sbs 2011년 5월 1일]
[[2010년]] 10월, 30여개 분야 전문가 1,500여명을 대상으로 시행된 조사에서 응답자 가운데 가장 많은 11.1%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우리 시대 영웅'으로 꼽았다.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또한 정치, 통일, 국제, 외교 분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01018165156§ion=01 우리시대 진정한 영웅'은? 1위 노무현·2위 DJ] 프레시안 2010년 10월 18일] 이어 [[12월 4일]] [[중앙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정치발전에 대한 긍정 평가가 67.9%에 달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특히 남북 화해 부분에서는 80% 이상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5&aid=0002110937 노무현 긍정 평가 늘어 … 현직 때와 '극과 극'] 중앙일보 2010년 12월 4일]
2011년 5월 12일에 더 좋은 민주주의 연구소가 리서치뷰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시 대선에 출마할 경우 다시 뽑겠다는 응답이 47.4%로 나타나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또한 전현직 대통령들 중 가장 호감 가는 인물을 묻는 단순 호감도 조사에서도 30.3%로, 31.9%를 기록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131049381&code=910100 '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 1위는 박정희, 2위 노무현] 경향신문 2011년 5월 13일]
== 논란과 의혹 ==
=== 신행정 수도이전 공약 논란 ===
[[2002년]] [[12월 11일]] 당시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이날 인천을 방문해 유세를 하면서 [[충청]]권으로의 수도이전 공약을 내세웠다.
{{인용문|이제 앞으로는 서울과 인천 이 지역을 세계업무중심지역으로 얼마나 쾌적한 도시로 만드느냐, 교통 지옥 없는 환경이 깨끗한 도시로 만드느냐가 과제입니다. 수도권에 새로운 사업들이 벌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수도권 엄청난 행정규제가 있습니다. 수도권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기능을 분산하는 것입니다. 정치 행정은 충청으로 보내고 여기에는 경제, 금융, 비즈니스 하자는 것입니다. 돈 되는 것은 여기서하고 돈 안되고 시끄럽고 싸우는 것은 충청도로 보냅시다. 아니 충청도 고향 분들 화나겠습니다. 이제 정직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방도 발전해야 합니다. 지방이 발전하지 않으면 지방과 수도권이 앞으로 엄청난 갈등으로 국가가 문제가 됩니다. 지방이 함께 발전하기 위해 수도권을 충청으로 옮기자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00281&PAGE_CD= '돈안되는 것 충청도로' 발언 뻥튀기 - 오마이뉴스] 2002년 12월 25일]
}}
당시 그의 이같은 발언을 두고 [[대전일보]]는 다음날 1면 머릿기사로 대서특필하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노 후보는 이날 인천 유세에서 정치 행정은 충청권으로 분산시키고 경제·금융·비즈니스는 수도권에 남는다"면서 "돈 되는 것은 여기서하고 돈 안되고 시끄럽고 싸움하는 것은 충청권으로 보내자고 말해 청중의 웃음을 샀다"고 보도했다.
==== 한미 FTA 추진 ====
{{참고|한미 FTA}}
[[2006년]] [[1월 18일]] 그는 2006년도 대국민 신년연설을 통해 한미 FTA 협상 의지를 발표[[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268414 한미 FTA 일지]] 하였다. [[2월 3일]] 당시 미국시각으로는 2월 2일 그는 [[미국]]으로 간 통상교섭본부장 김종훈을 통해 [[미국]] 의회에서 협상 출범을 선언했다. 이후 노무현이 대통령에 재임 중인 [[2007년]] [[4월 2일]] 한미 FTA가 타결되었다.
6월 5일부터 6월 9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차 협상이 개최되었다.
2006년부터 그는 [[한미 FTA]] 추진을 강행한다. 그러나 한미 FTA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허세욱 (1953년)|허세욱]]은 결국 협상이 타결 직전에 이르러 가자 2007년 4월 1일 협상장인 서울 하얏트 호텔 정문 부근에서 분신하였다.[{{뉴스 인용
|제목 = FTA 협상장 앞에서 50대 남성 분신
|url = http://www.ytn.co.kr/_ln/0103_200704011655386172
|출판사 = YTN
|날짜 = 2007-04-01
|확인날짜 = 2011-08-16
}}] 그는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실려 가면서까지 한미FTA 중단과 노무현 정권 퇴진을 요구하였다.[{{뉴스 인용
|제목 = "한미FTA 폐기하라" 50대 노동자 분신
|url = http://www.vop.co.kr/2007/04/01/A00000068291.html
|출판사 = 민중의소리
|날짜 = 2007-04-01
|확인날짜 = 2011-08-20
}}]
[[4월 3일]] 민주노동당은 지역위원회별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고 언론에 밝혔고, [[4월 4일]] 참여연대 등도 '병원비가 많이 나올 텐데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자'며 성금 모금 활동이 있었다. 참여연대 게시판 등에도 많은 네티즌들의 격려와 후원이 있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218883 ''FTA 반대 분신'' 허세욱씨 살리기 각계 모금운동] 세계일보 2007-04-04일자] 그러나 그는 사망하면서 모두가 비정규직이니 모금성금은 하지 말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뉴스 인용
|제목 = 故허세욱씨 '굴곡의 인생'…의로운 세상 꿈꾸다 '배반당한 삶'
|url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4151828471&code=940100
|출판사 = 경향신문
|날짜 = 2007-04-15
|확인날짜 = 2011-08-20
}}] [[2007년]] [[3월 8일]]부터 [[3월 12일]] 한미 FTA 8차 협상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협상은 1개월만에 체결된다.
[[2007년]] [[4월 2일]] [[한미 FTA]]가 최종 타결된다. 그러나 [[6월 16일]] 미국 측에서 노동, 환경 등 7개 분야 수정안 제의하여 [[6월 21일]]부터 [[6월 22일]] FTA 추가협상 1차 협상을 개최하여 [[6월 29일]] 추가협상도 최종타결되었다.
한편 분신자살기도로 입원중인 허세욱을 문병왔다가 허세욱으로부터 입당 권유를 받은 경제학자이자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경제비서관 출신[[정태인]](鄭泰仁)은 그의 뜻에 따라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정태인]]은 이후 노무현 정부와 결별했고, 더불어 그의 30년 친구인 [[유시민]] 등과도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다.[{{뉴스 인용
|제목 = "유시민과 난 항상 신분격차 있었다" - 30년 친구와 결별하고 '새 동지' 선택
|url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7562
|출판사 = 오마이뉴스
|날짜 = 2007-08-10
|확인날짜 = 2011-08-16
}}] [[2008년]] [[노동당 (대한민국)|진보신당]] 창당 이후 정태인은 진보신당에 입당하였다.
=== 남상국 실명 언급 논란 ===
[[2003년]] 그의 둘째 형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 (1945년)|남상국]]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과 관련, 언론에 출연하여 [[남상국 (1945년)|남상국]]의 실명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있다. 노무현의 남상국 비난 발언은 언론을 통해 공식 보도되었다. 이 사건 직후 남상국은 한강 다리에서 투신, 13일만에 시신이 발견되었다.
=== 사돈 배병렬의 권력형 비리 의혹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돈인 배병렬(62) 전 NH-CA자산운용(구 농협CA투자신탁운용, 이하 CA자산운용) 상임감사가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2005년 자신의 삼촌이 회장으로 있던 회사가 농협에서 수십억원대의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개입,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9/04/08/200904080500005/200904080500005_1.html 검찰 내사 받는 노무현 전 대통령 사돈 배병렬]]
경남 김해시 소재 농협 내외동지점 부지점장을 역임한 김모 씨 주장에 따르면, 배씨는 자신의 삼촌 배OO이 회장으로 일하던 T개발이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서 농협 대출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자 농협 김해 내외동지점과 심사를 맡은 농협중앙회 등에 압력을 행사해 대출이 가능토록 했다. 김 전 부지점장은 당시 대출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배 전 감사를 만났고 압력에 가까운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T개발에 대한 대출이 문제가 있었음은 이 대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농협 인사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 김구에 대한 관점 논란 ===
[[2003년]] 6월 [[일본]] 순방 중, [[6월 8일]] [[도쿄]]에서 가진 공개 인터뷰에서 존경하는 인물에 대해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라고 평가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27583 노무현 대통령, 김구 평가 발언 논란 - 오마이뉴스] 2003년 06월 11일자]
그러나 언론들 사이에서는 노무현이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으로 발언했다고 보도하면서 비판했다. 광주의 도청이전반대추진위원회 관계자는 "평생을 항일독립운동으로 민족의 재단 앞에 부끄럼없이 살아온 분을 일국의 대통령이 침략자였던 일본 국민들 앞에서 실패한 정치인으로 평가한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며 "그렇다면 항일독립운동이 실패한 정치활동이란 말이냐"고 분개했다.
[[김근태]]는 그가 외교 문제에서 실패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외교에 있어서도 실패하고 있다. 중국 가서 하는 이야기, 일본 가서 하는 이야기가 다르다. 국민의 자부심을 상처낸다. 한미 정상회담까지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비판했지만 한일정상회담은 너무 기가 막혀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과거사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지 않은 일본 천황과 건배하는 것이나 일본 국민들과의 대화에서 '김구 선생이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철학과 원칙은 함께 하지만 판단이 다를 수 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34415 "대선자금공개 이회창씨에게 달려있다" - 오마이뉴스] 2003년 07월 19일자]"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발언을 지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정치인 김구선생이 바르게 평가돼야'라는 글을 게시한 네티즌은 "외세의 힘에 의해 우리 국민은 공산주의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해야하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백범 김구선생의 중립적인 민족주의 국가는 어디에 세워야하고 국민은 어떻게 김구를 선택하고 어떻게 따라야했던가"라며 정치 지도자로서 김구 선생은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네티즌은 "결국 김구는 훌륭한 인격자이자 지도자이지만 남에도 북에도 설자리가 없었던 비운의 지도자였고 우리 국민은 훌륭한 지도자 김구를 두고 북에서는 공산주의를 따라갔고 남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따라갔다"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비극을 강조했다. [[성균관대]] 교수 [[김삼웅]]은 "일왕이나 수상과 공식적으로 말한 것도 아니고 애국심은 존경하지만 정치인으로서 실패했다는 발언 하나 가지고 왈가불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고 더 이상의 코멘트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발언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비판거리의 하나로 활용되었다.
=== 다케시마 발언 논란 ===
[[2004년]] 7월 한일 정상회담 당시 [[독도]]를 [[일본]]이 자국 영토라며 부르는 호칭인 다케시마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7월 21일]] 한.일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기자회견 과정에 일본 기자의 질문에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하지요?'라며 '독도'를 무심결에 일본인들이 독도를 자국영토라고 주장하며 부르는 '다케시마(竹島)'라는 표현을 써 파문이 일었다. 일본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나온 '실수'이나, 일본 언론들이 이를 "한국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했다는 식의 보도를 하고 있고 야당도 이를 문제삼고 나와[[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40722095514§ion=01 盧대통령 "다케시마" 실언 논란] 프레시안 2004년 07월 22일자] 논란이 되었다.
노무현의 다케시마 발언은 곧 일본 언론들에게도 보도되었다. 지지통신은 "영토와 역사문제에 대한 견해를 묻는 일본인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무심코 발언한 것으로 보이나, 눈살을 찌푸리는 한국인 기자도 있었다"고 비꼬았다. 그의 다케시마 발언을 일본 극우 인사일각에서는 한국에서 다케시마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 북방한계선 포기 논란 ===
{{본문|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논란}}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상 [[북방한계선]]을 포기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새누리당 [[서상기]], [[정문헌]] 의원이 주장하여 논란이 일었다. 당시 공세를 주도했던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훗날 밝혔다.[http://m.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36173.html]
== 언론과 노무현 ==
노무현이 3당 합당을 거부하고 통합민주당 대변인이 된 직후인 1991년 10월 조선일보는 주간조선 보도를 통해 이력과 재산을 문제 삼았다. 노무현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 정치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조선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에 나서 승소했다. 국민의 정부 때 해양수산부 장관으로서 언론사 세무조사를 앞장서 지지하고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언론사 소유 지분 제한에 공개 찬성했다. 보수 언론과의 적대적 관계가 고착화되기 시작했다.[{{뉴스 인용 | 제목 = [盧 전대통령 서거] 보수언론들과 질긴 악연…취재선진화 강행 갈등도 | url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241801325 | 형식 = | 출판사 = 경향신문 | 저자 = 이지선 | 쪽 = | 날짜 = 2009-05-24 | 확인날짜 = 2010-04-26 }}]
처음 '[[이인제]] 대세론'에 묻혀 있다가 [[2002년]] [[3월 16일]] 광주 지역 경선부터 본격적인 노풍(盧風)을 일으켰고, 언론들은 이 현상을 신기한 듯 부쩍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노무현 바람에 심상치 않은 무게가 실리자 보수 언론의 견제가 본격화됐다. 대선 당일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 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라며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라고 방점을 찍은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대권을 잡은 이후에는 집권 1년 만에 보수 언론의 포화 속에 헌정 사상 유례없는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탄핵 반대 [[촛불 여론]]으로 권좌를 되찾은 후에도 보수 언론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으며, 여기에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 무역 협정|한미 FTA]] 협정 추진, 대연정 구상 등으로 인해 진보 언론도 노무현에게 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임기 말에는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 기자실 폐쇄로 이어지면서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은 모든 언론이 비판을 퍼부었다.
'[[박연차 게이트|박연차 회장 비리 사건]]'에 연루된 정황이 드러나면서 진보 언론마저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언론들은 검찰발로 노무현의 가족과 관련된 비리를 낱낱이 보도하며 노무현을 부도덕과 비리의 몸통인 양 매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망으로 노무현의 생애가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가면서 언론의 긍정적인 평가들이 등장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언론과의 관계가 가장 순탄치 않았던 정치인으로 평가되었다.[{{뉴스 인용 | 제목 = 언론, 노무현 생전 딱 두 번 미소 보냈다 | url =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156438 | 형식 = | 출판사 = 노컷뉴스 | 저자 = 김정훈 | 쪽 = | 날짜 = 2009-05-25 | 확인날짜 = 2010-04-26 }}]
== 종교 ==
=== 천주교 관련 ===
[[1986년]] 당시 [[천주교 부산교구]] 당감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송기인]]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얻었지만 열심히 신앙생활도 못하고 성당도 못 나가 프로필의 종교란에는 무교로 쓴다고 밝힌 적이 있다.[{{뉴스 인용 | 제목 = 역대 대통령들 종교 문제 | url =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308324.html | 출판사 = 한겨레 | 저자 = | 쪽 = | 날짜 = 2008-09-03}}][김종목.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251743305&code=960206 노무현 전 대통령 가톨릭 사회관·불교 생사관 지녀]《경향신문》]
대통령 후보 시절인 [[2002년]] [[6월 20일]]에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 가톨릭대 주교관이던 [[김수환]] 추기경을 방문했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노무현이 먼저 신앙 문제를 화제로 꺼냈다. 노무현은 "[[1986년]]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송기인]]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얻었다."라고 소개하고 "하지만 열심히 신앙생활도 못하고 성당도 못 나가 프로필 쓸 때 종교란에 '무교'로 쓴다."라고 고백했다.
이에 [[김수환]]은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었고, 노무현은 "희미하게 믿는다."라고 답했다. [[김수환]]이 "어려울 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말하자 노무현은 "앞으로는 종교란에 '방황'이라고 쓰겠다."고 대답했다.[부형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136518 노무현후보 김추기경의 방문], 동아일보, 2002년 6월 20일]
=== 불교 관련 ===
노무현은 자택 옆에 있던 정토원이라는 사찰에서 [[사법시험 (대한민국)|사시]] 공부를 하였다. 이후에는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장유암에 머무르면서 [[사법시험 (대한민국)|사시]]를 준비했으며, 틈틈이 불교 경전을 탐독했다.[{{뉴스 인용|제목=盧전대통령 부부와 불교|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2678071 | 형식 = |출판사 = 연합뉴스 |저자 = 조채희 |쪽 = |날짜 = 2009-05-25 |확인날짜 = 2010-04-26}}] 9년간 [[사법시험 (대한민국)|사시]] 공부를 하여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 (대한민국)|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평소 불심이 깊은 것으로 알려진 아내 [[권양숙]]은 [[2002년]] [[10월 1일]] 당시 대선을 앞두고 합천 [[해인사]]에 머물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조계종]] 종정인 법전 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대덕화'(大德花)라는 법명을 받았는데, '대덕화'는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가 받은 법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법명 수계는 불교계의 민심이 실린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불교계의 기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뉴스 인용 | 제목 ="양심으로 국민을 위해 꼭 해야할 일들 대부분 이뤄"|url = http://korea.kr/newsWeb/pages/brief/categoryNews/view.do?newsDataId=148643108&category_id=p_mini_news&out_site_id=&netporterSectionId=&currPage= | 형식 = | 출판사 = 대한민국 정책포털 | 저자 = 안순모 | 쪽 = | 날짜 = 2007-11-25 | 확인날짜 = 2010-04-26 }}][{{뉴스 인용 | 제목 = [민부정책연구원] 김두관 전 장관 법명 수계식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98&aid=0000227240& | 형식 = | 출판사 = 연합뉴스 | 저자 = | 쪽 = | 날짜 = 2007-05-16 | 확인날짜 = 2010-04-26 }}] 이후 노무현은 재임 기간 동안 [[해인사]]를 무려 세 차례나 방문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다 방문을 하였다. [[2003년]] [[12월 22일]]에 노무현은 아내와 함께 경남 합천 해인사를 불시 방문해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 총무원장 법장스님과 환담한 뒤 오찬을 함께 했다. [[사패산 터널]] 문제에 대한 공약을 지키게 못하게 되었다면서 양해를 구했다.[{{뉴스 인용 | 제목 = 盧, 사패산터널 불교계 협조당부 | url = http://economy.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news/200312/e2003122220345619200.htm&ver=v002 | 형식 = | 출판사 = 서울경제 | 저자 = 박동석 | 쪽 = | 날짜 = 2003-12-22 | 확인날짜 = 2010-04-26 }}][{{뉴스 인용 | 제목 = 盧대통령 해인사 왜 갔나...불심ㆍPK민심 다지기 | url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3122274911 | 형식 = | 출판사 = 한국일보 | 저자 = 허원순 | 쪽 = | 날짜 = 2003-12-22 | 확인날짜 = 2010-04-26 }}]
또한 노무현은 [[2005년]] [[8월 30일]]에 [[T-50 골든이글]] 양산 1호기 출고식에 참석했다.[{{뉴스 인용 | 제목 = "방위산업은 자주국방 토대"…盧대통령 T-50출고식 참석 | url = http://www.fnnews.com/view?ra=Sent0801m_View&corp=fnnews&arcid=0920459176&cDateYear=2005&cDateMonth=08&cDateDay=30 | 형식 = | 출판사 = 파이낸셜뉴스 | 저자 = 차상근 | 쪽 = | 날짜 = 2005-08-30 | 확인날짜 = 2010-04-26 }}]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목조 불상인 쌍둥이 비로자나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해인사]]에 들러 비행기 사고 없이 잘 날아다니고 잘 팔아 달라고 부처님께 기도를 했다. 취임 이래 2번째로 해인사를 방문했고 해인사 대비로전 건립에 30여억 원의 국고 지원을 즉석에서 약속했다. [[2007년]] [[11월 24일]] [[해인사]] 대비로전(大毘盧殿) 낙성 대법회에 참석하면서 축사를 하였는데 3번째로 해인사를 방문했다.
[[2009년]] [[5월 23일]]에 과거 [[사법시험 (대한민국)|사시]] 공부를 했던 정토원의 법당에 모셔진 부모와 장인의 위패에 예를 표한 뒤 그 옆의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뉴스 인용 | 제목 = [뉴스파노라마] 노 전 대통령, 투신전 정토원서 '하직인사' | url = http://www.bbsi.co.kr/news/news_view.asp?nIdx=395832 | 형식 = | 출판사 = BBS 불교방송 | 저자 = 김동현 | 쪽 = | 날짜 = 2009-05-26 | 확인날짜 = 2010-04-26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90605214738/http://www.bbsi.co.kr/news/news_view.asp?nIdx=395832 | 보존날짜 = 2009-06-05 | 깨진링크 = 예 }}][[봉하마을]] 뒤편 봉화산에 자리 잡은 정토원은 그가 투신한 부엉이 바위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한 사찰이다.[{{뉴스 인용 | 제목 = <盧전대통령 서거>정토원 원장 "盧, 죽음은 타살" | url = 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ticle&ar_id=NISX20090526_0002270444 | 형식 = | 출판사 = 뉴시스 | 저자 = 이재훈 | 쪽 = | 날짜 = 2009-05-26 | 확인날짜 = 2010-04-26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201223453/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ticle&ar_id=NISX20090526_0002270444# | 보존날짜 = 2014-02-01 | 깨진링크 = 예 }}][[2009년]] [[5월 24일]] 해인사의 승려 300여 명이 분향소를 찾아 노무현의 죽음을 애도했다.[{{뉴스 인용 | 제목 = 경남경찰청장 | url = 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473812&tid=1 | 형식 = | 출판사 = 내일신문 | 저자 = 허신열 | 쪽 = | 날짜 = 2009-05-25 | 확인날짜 = 2010-04-26 }}{{깨진 링크|url=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473812&tid=1 }}]
== 학력 ==
* [[1959년]] [[진영대창초등학교|진영대창국민학교]] 졸업
* [[1963년]] [[진영중학교]] 졸업
=== 비학위 수료 ===
* [[1998년]] [[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노동정책과정 수료
* [[1999년]] [[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 수료
=== 명예 박사 학위 ===
* [[2004년]] [[모스크바 대학교]] 명예정치학 박사
* [[2006년]] [[알제대학교]] 명예정치학 박사
* [[2007년]] [[원광대학교]] 명예정치학 박사
== 경력 ==
*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
* [[1978년]] 변호사 개업
* [[1981년]] [[부림 사건]] 변론 이후 인권변호사 활동
*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
*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 [[6월민주항쟁]] 주도로 인해 구속,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
* [[1988년]] [[민변]] 창립회원
*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통일민주당]], [[부산 동구의 국회의원|부산 동구]], 5공비리특별위원회 활동)
* [[1990년]] [[3당합당]] 반대, [[민주당 (1990년)|민주당]] 창당 활동에 합류
* [[1991년]] [[민주당 (1991년)|민주당]] 창당 주도(통합협상 대표), [[민주당 (1991년)|민주당]] 대변인
* [[1992년]] [[민주당 (1991년)|민주당]] 제14대 대통령선거 청년특위위원장 겸 물결유세단 단장으로서 대통령 후보 [[김대중]] 지원
* [[1993년]] [[민주당 (1991년)|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 지방자치실무연구소 개소
* [[1995년]] 부산 시장 선거 출마, [[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통합민주당]] 창당 활동에 합류
*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입당,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제15대 대통령선거 찬조 연설과 파랑새유세단 단장으로서의 활동 등으로 대통령 후보 [[김대중]] 지원
* [[1998년]] [[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선, [[현대자동차]] 파업 중재
* [[1999년]] 국회 동남아특위 위원장
* 제6대 [[대한민국의 해양수산부 장관|해양수산부 장관]]
* [[새천년민주당]] 당무위원
*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 [[2002년]]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후보
* [[2003년]] ~ [[2008년]] 제16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한민국 대통령]]
== 진행 ==
=== 라디오 ===
* [[1997년]] [[6월 30일]] ~ [[1997년]] [[9월 26일]] : [[SBS 러브FM]] [[792 뉴스대행진]] 1, 2부
== 상훈 ==
* [[2004년]] - [[영국]] 최고 훈장 [[바스 훈장|배스 대십자훈장]](GCB)
* [[2004년]] - [[폴란드]] 흰 독수리 훈장(Order Orła Białego)
* [[2005년]] - [[미국]] [[조지 H. W. 부시|조지 부시]] 전 대통령 ‘밴 플리트’ 수상
* [[2007년]] - [[카타르]] 독립대훈장
* [[2007년]] - [[스페인]] 시민 훈장
* [[2007년]] [[10월 8일]] - [[덴마크]]의 코끼리의 기사 수훈
* [[2008년]] - [[무궁화대훈장]]
== 저작물 ==
=== 저서 ===
{{위키문헌 | 글쓴이:노무현}}
* 생전에 출간된 저서
** 《사람 사는 세상》 (1989.09.19)
** 《여보, 나좀 도와줘》 (새터, 1994.09.01) {{ISBN|89-87175-19-7}}
**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돼요?》 (공저 노무현 외 10인, 1997.09.25)
** 《마음 먹었을 때 시작해라》 (공저 노무현 외 54인, 우민OK논술교실, 2000.06.01) {{ISBN|89-91499-27-9}}
** 《노무현이 만난 링컨》 ([[학고재]], 2001.11.30) {{ISBN|89-85846-89-2}}
** 《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 (공저 노무현 외 13인, 행복한책읽기, 2002.02.28) {{ISBN|978-89-89571-03-2}}
**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2002.10.15) {{ISBN|89-89571-07-3}}
** 《성공하고 싶다면 군대에 가라 2》 (공저 노무현 외 48인, 국방일보, [[중앙M&B]], 2003.12.12) {{ISBN|89-8375-824-4}}
** 《로마의 논리와 감성》 (공저 노무현 외 81인, 우민OK논술교실, 2005.12.01) {{ISBN|89-91499-27-9}}
* 사후 출간된 저서
** 《성공과 좌절 (노무현 대통령 못 다 쓴 회고록)》 (노무현 저, 학고재, 2009.09.22) {{ISBN|978-89-5625-096-0}}
** 《진보의 미래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 (노무현 저, 동녘, 2009.11.27) {{ISBN|978-89-7297-608-0}}
** 《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저, 유시민 정리, 노무현재단 엮음, 돌베개, 2010.04.26) {{ISBN|978-89-7199-386-6}}
** 《봉하일기 (그곳에 가면 노무현이 있다)》 (공저 노무현 외 11인, 부키, 2012.01.12) {{ISBN|978-89-6051-192-7}}
** 《노무현의 사람 사는 세상》 (2018.05.21)
** 《그리하여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2019.05.03)
=== 어록 ===
*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88년 13대 국회 대정부질의)[[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037 “분하고 서러워 스스로 목숨 끊는 일 없었으면…”], 《미디어오늘》, 2009년 5월 28일.]
*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나머지는 깽판쳐도 괜찮다. (2002년 5월 인천 부평 정당연설회)[{{뉴스 인용 | 제목 = 盧 선거지원 유세 발언 논란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132026 | 형식 = | 출판사 = 동아일보 | 저자 = 부형권 | 쪽 = | 날짜 = 2002-05-25 | 확인날짜 = 2014-01-25 }}]
* [[인공기]],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의 초상을 불사르고 이런 것은 좀 적절치 못했던 것 같다, 유감스럽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2003년 8월 19일 [[청와대]] 수석 보좌관 회의)[{{뉴스 인용 | 제목 =
노대통령 "인공기 훼손 유감스런 일"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5&aid=0000007907 | 형식 = | 출판사 = SBS | 저자 = | 쪽 = | 날짜 = 2003-08-19 | 확인날짜 = 2014-01-25 }}]
*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 (2007년 10월 2일 [[북한]]의 [[만수대의사당]])[{{뉴스 인용 | 제목 =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고 쓴 노무현 전 대통령|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3&aid=0002669039 | 형식 = | 출판사 = 조선닷컴 | 저자 = 조갑제 | 쪽 = | 날짜 = 2014-01-22 | 확인날짜 = 2014-01-25 }}]
* TV 토론 등에서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발언을 하여, 이 발언이 대통령 취임 초기 한동안 유행어로 회자되기도 했다. 당시 [[한국방송공사|KBS]]의 예능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에서 출연하고 있는 개그맨 [[김상태 (희극인)|김상태]]를 비롯한 여러 연예인들이 그를 흉내내기도 했다. [[넷피아]]의 한글인터넷 도우미를 설치한 컴퓨터에서 '''"맞습니다맞고요"'''라는 한글 주소를 입력하면 청와대 홈페이지에 연결되었다.[신익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09&aid=0000303520 '맞습니다 맞고요' 청와대 기증], 《매일경제》, 2003년 7월 8일.] 그러나, 노무현이 퇴임한 현재는 그의 개인 사이트인 '사람사는 세상'으로 연결된다.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 참석해 연설하던 도중 전직 국방부 장관 등의 군 인사들이 [[전시작전통제권|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반대하는 것에 대해 격하게 말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발언이 플래시, UCC 등으로 편집되어 누리꾼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 기타 사항 ==
=== 유행어 ===
* 집권 당시 네티즌 사이에서 노무현과 전혀 무관한 인터넷 기사에 대해서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댓글을 다는 것이 유행했다. 진담과 농담이 섞인 이러한 풍조의 발생은 각종 정책과 사건마다 대통령을 비판하는 데 주력했던 주요 언론사의 논조에 힘입은 바 크다.[노무현의 서거 이후, '이게 다 노무현 덕분이다'라는 말이 생겨났고,({{웹 인용 | url = http://poisontongue.sisain.co.kr/886 | 제목 = '이게 다 노무현 덕분이다'라는 '노덕놀이' 아시나요? | 저자 = | 출판사 = 고재열의 독설닷컴 | 날짜 = 2009-05-27 | 확인날짜 = 2009-05-26 | 형식 = | 웹사이트 = }}), '노무현'의 자리에 '[[이명박]] 대통령'을 넣어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라는 말도 생겨났다.]
* [[참여정부]] 시기에 삼성의 경제적 비중이 확대되고, 삼성의 전방위 [[로비활동]]이 일부 드러나면서 '삼성공화국' 이란 말이 유행했다.
=== 발명품 ===
노무현은 청와대 온라인 행정업무 처리 표준화 시스템인 '[[e지원]]'을 개발하게 하였다. e지원 시스템으로 청와대에서 종이 서류를 없애고 대신, 대통령의 모든 지시가 'e지원' 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e지원으로 인해 행정관이나 비서관의 업무 기안이 온라인에서 이뤄지고 대통령을 비롯해 간부들은 실시간으로 추진 중인 업무에 대해 댓글로 지시, 보완하고 결재까지 해서 간소화되었다. 노무현은 임기 후 e지원의 복사본을 제작해 봉하 마을에 설치하였는데, 국가정보 보안과 관련하여 문제가 제기되었고, 복사본을 제작하여 사유하는 것에 대하여 법적 근거가 없다는 법제처의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차후 국가기록원에 반납 처리되었다.
사법 시험 준비생 시절 그는 '개량 독서대'를 고안해 특허받기도 했다. 아울러 민주당 최고위원 시절인 지난 [[1994년]]에는 정치인을 위한 인명록 통합 관리 프로그램인 '한라 1.0'을 개발했고, 이는 버전 업을 거쳐 몇 년 후 '노하우(KnowHow) 2000'으로 업그레이드하기도 했다. 또한 의자 등받이를 높게 해 윗부분을 옷걸이 모양으로 해 웃옷을 걸어놓은 '옷걸이 의자'도 발명했지만 큰 빛을 보지 못했다. 퇴임 후에는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했다.[{{뉴스 인용 | 제목 = '발명왕' 노무현.. 靑업무처리시스템 특허등록 | url =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DA31&newsid=02364886579750520&DCD=A00107 | 형식 = | 출판사 = 이데일리 | 저자 = 박기수 | 쪽 = | 날짜 = 2006-02-14 | 확인날짜 = 2010-04-26 }}][{{뉴스 인용 | 제목 = [아침을 열며] 청와대 '댓글문화'의 명과 암 | url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2191748191 | 형식 = | 출판사 = 경향신문 | 저자 = 김해진 | 쪽 = | 날짜 = 2006-02-19 | 확인날짜 = 2010-04-26 }}]
=== 사람사는 세상 ===
'[[사람사는 세상|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은 노무현의 개인 홈페이지이며, 줄여서 '사람사는 세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2009년 5월 홈페이지 개편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다가 [[5월 23일]]에 노무현이 사망하자 개편알림 내용을 추모 이미지로 깔아놓기도 했다. 청와대로 연결되는 주소 "맞습니다 맞고요", "맞습니다", "맞고요"는 [[넷피아]]에 의해 넘어가기도 했었다.[[http://www.knowhow.or.kr/main/main.php 사람 사는 세상 봉하 마을]] [[한명숙]]이 서울본부 이사장, [[권양숙]]이 경남본부 이사장이며, 경남본부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에 있으며, 서울본부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위치해 있다.
=== [[일베저장소]]와 [[디시인사이드]] 합성 갤러리의 합성 및 비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8/Noala_Times_Square_ads.jpg/200px-Noala_Times_Square_ads.jpg
일베 회원에 의해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디스플레이 된 노무현 합성 희화화 광고
격식 없는 그의 발언이 인기를 끌면서 일베와 합필갤 이용자들은 그의 사진과 동영상을 합성하여 비하하고 희화화하였다. 노무현 사후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합필갤에서 자살 장면과 [[구름버섯|운지버섯]] 자양강장제 광고를 합성한 영상이 인기를 끌면서 추락을 뜻하는 '운지'라는 유행어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https://www.youtube.com/watch?v=VvjunPzX-Ys 운지나는 자연인이다노무현버전]] 일베저장소에서는 그의 육성을 '패션시티' 같은 노래와 합성한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vYibVU6Wbas [M/V] MC무현 - 응디시티 ( ASS CITY )]]을 상당히 많이 제작하면서 'MC무현'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일베저장소에서 노무현을 교묘하게 합성한 사진이 사진 검색 결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탓에[{{웹 인용|url=https://www.google.co.kr/search?q=%EB%A1%9C%EA%B3%A0+%EA%B3%A0%ED%99%94%EC%A7%88&source=lnms&tbm=isch&sa=X&ved=0ahUKEwjG0p3u5P7dAhXFU7wKHWFQBLUQ_AUIDigB&biw=1366&bih=651|제목=로고 고화질 - Google 검색|언어=ko-US|확인날짜=2018-10-11}}][{{웹 인용|url=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9341153|제목=이미지 검색 점령한 일베 합성 로고 “지뢰밭 수준”|언어=ko|확인날짜=2018-10-11}}] 공식적인 곳에 실수로 사용되어 관련자들이 물의를 빚는 일이 잦다.[{{웹 인용|url=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2368248|제목=또 일베 합성 논란… 한반도기에 노무현 비하 이미지 사용|언어=ko|확인날짜=2018-10-11}}][{{뉴스 인용|url=https://www.ajunews.com/view/20180720083650784|제목=[단독] 아프리카TV, K리그 엠블럼 일베 이미지 사용...故 노무현 전 대통령 비하|날짜=2018-07-20|언어=ko-KR|확인날짜=2018-10-11}}][{{뉴스 인용|url=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686936.html|제목=MBC 뉴스데스크 또 ‘일베’ 합성이미지 사용 방송사고|날짜=2015-04-15|언어=ko|확인날짜=2018-10-11}}] 노무현은 여전히 일베저장소에서 폄하되고 있다.[{{웹 인용|url=http://www.ilbe.com/?act=IS&where=document&is_keyword=%EB%85%B8%EB%AC%B4%ED%98%84|제목=일베저장소 - 일간베스트, 개드립, 짤방, 플래시 게임, 유머 게시판|언어=ko|확인날짜=2018-10-11}}]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노판석 (盧判石, 1900년 ~ 1976년)
* 어머니(계모) : 배정민 (趙英希)[1976년에 노판석과 결혼하였다.]
* 어머니(친모) : 노서은 (李順禮, 1914년 ~ 1998년)
** 누나 : 노명자 (盧明子, 1928년 ~ 2013년 5월 19일)
** 형 : 노영현 (盧英賢, ? ~ 1973년)
*** 조카 : 노지원 (1965년 ~ )
** 누나 : 노정연 (盧英玉, 1938년 ~ )
*** 조카사위 : 정재성 (1960년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 형 : [[노건평]] (盧建平, 1942년 1월 30일 ~ )
** 형수 :노은정 (1945년 ~ )
*** 조카 : 노상욱 (1975년 ~ )[{{뉴스 인용|제목=노건평씨 외아들 결혼 청와대 '전전긍긍'|url=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503/h2005030817285921080.htm|출판사=한국일보|저자=|쪽=|날짜=2005-03-08|확인날짜=|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24113556/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503/h2005030817285921080.htm#|보존날짜=2013-12-24|깨진링크=예}}]
*** 조카 : 노희정 (1981년 ~ )[{{뉴스 인용|제목=盧대통령 형 건평씨 막내딸 희정씨 결혼|url=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606/e2006062516410248200.htm|출판사=서울경제|저자=|쪽=|날짜=2006-06-25|확인날짜=|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1128023027/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606/e2006062516410248200.htm#|보존날짜=2014-11-28|깨진링크=예}}]
** 배우자 : [[권양숙]] (權良淑, 1948년 2월 2일 ~ )
*** 자부 : 배정민 (裵晶旻, 1976년 ~ )
**** 손녀 : 노서은 (盧敍銀, 2004년 ~ )
*** 딸 : 노정연 (盧靜姸, 1975년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4&aid=0003055024 '故노무현 사위' 노영현 변호사 "변호인 본 아내가 서럽게 운다"]《파이낸셜뉴스》]
*** 사위 : 곽상언 (郭相彦, 1971년 ~ )
* 장인 : [[권오석]] (權五石, 1918년 12월 22일 ~ 1971년 8월 30일)
* 장모 : [[박덕남]] (朴德南, 1922년 4월 29일 ~ 2017년 2월 24일)
** 처형 : 권창좌 (權昌左, 1945년 ~ )
** 처제 : 권진애 (權珍愛, 1950년 ~ )
** 처남 : 권기문 (權奇文, 1952년 ~ )
== 같이 보기 ==
* [[참여정부]]
* [[대한민국의 대통령]]
*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
* [[새천년민주당]]
* [[열린우리당]]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 [[권양숙]]
* [[문재인]]
* [[이해찬]]
* [[김대중]]
* [[유시민]]
* [[한명숙]]
*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 [[강금실]]
* [[천호선]]
* [[김경수 (정치인)|김경수]]
* [[친노]]
* [[노사모]]
* [[통일민주당]]
* [[민주당 (1990년)]]
* [[민주당 (1991년)]]
* [[민주당 (1995년)]]
* [[새정치국민회의]]
* [[일베저장소]]
== 노무현을 연기한 배우들 ==
* [[배칠수]] - [[2002년]] [[MBC TV]] [[코미디 하우스]] 삼자 토론
* [[김상태 (1973년)|김상태]] - [[2003년]] [[KBS 2TV]]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
* [[송강호]] - [[2013년]] 영화 《[[변호인 (영화)|변호인]]》 (영화에서 실제로 맡은 역할은 노무현을 모티브로한 "송우석"이라는 가상의 캐릭터)[정지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41&aid=0002171233 ‘변호인’ 고 노무현 연기한 송강호 “진심 담아 불 뿜었죠”]{{깨진 링크|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41&aid=0002171233 }}, 일간스포츠, 2013년 12월 9일][이승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8&aid=0002215288 왜 우리는 송강호에 환호하나], 한겨레, 2013년 12월 27일][듀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8&aid=0002214249 송강호가 노무현이면 안되는 걸까], 한겨레, 2013년 12월 19일][동아닷컴 영상뉴스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0&aid=0002495352 송강호,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모티브… 표현 잘 못할까봐 망설였다”], 동아일보, 2013년 11월 19일]
* [[김대성 (희극인)|김대성]] - [[2014년]] [[KBS 2TV]] [[개그콘서트]] 우리동네 청문회 (영화 《[[변호인 (영화)|변호인]]》'송우석' 패러디)
== 참고 서적 ==
* 《여보, 나 좀 도와줘》(새터, 1994) : 자전적 일대기
* 《노무현은 배신자인가(강준만의 정치비평집)》(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12.16) : 인물 비평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유시민, 개마고원, 2002.08.26)
* 《노무현 죽이기》(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07.21)
*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인질'로 잡힌 한국인은 개혁을 원치 않는다)》(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1.04.01)
* 《조선 바보 노무현(바다에 빠져죽은 명계남이 토해내는 이야기)》(명계남, 원칙과상식, 2007.03.03)
* 《노무현, 반DJ 신드롬을 넘어서(2002 대선 코드 읽기 - 왜 노무현 대통령인가)》(장신기, 시대의창, 2002.10.28)
* 《노무현의 亂》(김성욱, 조갑제닷컴, 2007.03.01) : 노무현 비판서 ({{ISBN|89-92421-11-7}})
* 《노무현의 정체 - 신혜식의 패러디》(신혜식, 조갑제닷컴, 2006.07.14) : 노무현 패러디 ({{ISBN|89-957721-4-X}})
== 역대 선거 결과 ==
{{선거기록 시작|KR|개인}}
{{선거기록/KR/개인|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 13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 [[부산 동구의 국회의원|부산 동구]] | 통일민주당 | 53,075 표 | 51.0 | 1위 | 당선 |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직할시#동구|초선]] }}
{{선거기록/KR/개인|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 14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 [[부산 동구의 국회의원|부산 동구]] | 민주당1991 | 30,397 표 | 32.25 | 2위 |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직할시#동구|낙선]] | }}
{{선거기록/KR/개인|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지방 선거]] | 30대 | [[지방 관청|시장]] | [[부산광역시장|부산광역시]] | 민주당1991 | 647,297 표 | 37.58 | 2위 |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낙선]] | 민선 1기 }}
{{선거기록/KR/개인|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 15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 [[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 민주당1995 | 17,330 표 | 17.66 | 3위 |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종로구|낙선]] | }}
{{선거기록/KR/개인| [[1998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7·21 재보선]] | 15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 [[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 새정치국민회의 | 26,251 표 | 54.4 | 1위 | 당선 | [[1998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재선]] }}
{{선거기록/KR/개인|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 16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 [[부산 북구의 국회의원|부산 북구]]·[[부산 강서구의 국회의원|강서구 을]] | 새천년민주당 | 27,136 표 | 35.69 | 2위 |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광역시#북구·강서구 을|낙선]] | }}
{{선거기록/KR/개인|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대선]] | 16대 |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 [[대한민국]] | 새천년민주당 | 12,014,277 표 | 48.91 | 1위 | 당선_대 | }}
{{선거기록 끝}}
== 노무현 관련 영화 ==
* 《[[변호인 (영화)|변호인]]》(2013)
* 《무현, 두 도시 이야기》(2016)
* 《[[노무현입니다]]》(2017)
* 《[[노무현과 바보들]]》(2019)
* 《물의 기억》(2019)
* 《시민 노무현》(2019)
== 각주 ==
; 내용주
{{각주|group=주}}
; 인용주
{{각주|30em|refs=[{{뉴스 인용 | url = http://www.khan.co.kr/kh_news/art_view.html?artid=200905132307145 | 뉴스 = | 형식 = | 제목 = 美주택 계약서 찢고…명품시계 버리고…檢 "盧측 증거인멸 시도" | 출판사 = 경향신문 | 날짜 = 2009-05-13 | 저자 = 조현철 | 쪽 = | 확인날짜 = 2010-04-24 }}][{{뉴스 인용 | url = 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_id=NISX20090514_0002172409 | 뉴스 = | 형식 = | 제목 = "버렸다, 찢었다" 궁색해지는 盧의 변명 | 출판사 = 뉴시스 | 날짜 = 2009-05-14 | 저자 = 김종민 | 쪽 = | 확인날짜 = 2010-04-25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116201248/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_id=NISX20090514_0002172409 | 보존날짜 = 2014-01-16 | 깨진링크 = 예 }}]}}
== 외부 링크 ==
* {{위키공용분류-줄}}
* {{위키문헌언어-줄|ko|노무현}}
* {{위키인용집-줄}}
* [http://16cwd.pa.go.kr/cwd/kr/president/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 브리핑
* {{헌정회|185}}
* [http://www.knowhow.or.kr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 [http://www.hani.co.kr/section-003300000/2002/12/003300000200212192259604.html 노무현이 걸어온 길 : 가난·역경 딛고 인권 변호사로], 《한겨레》, 2002년 12월 19
*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6/10/13/200610130500027/200610130500027_1.html 변호사들이 들려준 '변호사 노무현'의 좌충우돌 법정 비화], 《신동아》, 2006.10.1.
*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271178.html '노무현 혐오증' 대중들의 속내 뭘까] 한겨레 2008.02.21.
*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250934 (盧 전 대통령 서거 닷새째)② ′타살 의혹 증폭′] 아시아투데이 2009년 05월 27일자
* [http://16cwd.pa.go.kr/ 청와대 웹사이트]
* [http://www.knowhow.or.kr/ 사람사는 세상]
* [http://www.nosamo.org/ 노사모]
* {{웹 인용|제목=바보 노무현을 그리다|url=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42&contents_id=2780|보존url=https://archive.today/20130627005403/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42&contents_id=2780#|웹사이트=[[네이버캐스트]]|날짜=2010-05-20|보존날짜=2013-06-27|확인날짜=2018-05-10|깨진링크=예}}
{{대한민국의 대통령
|대수 = 16
|전임자 = [[김대중]]
|임기 = 2003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
직무정지 : 2004년 3월 12일 ~ 2004년 5월 14일
[[고건]](권한대행)
|후임자 = [[이명박]]
}}
{{전임후임|
|전임자 = 이항규
|후임자 = [[정우택 (1953년)|정우택]]
|대수 = 6
|직책 = [[대한민국의 해양수산부 장관|해양수산부 장관]]
|임기 = 2000년 8월 7일 ~ 2001년 3월 25일
}}
{{전임후임 국회의원|
|전임자 = (중구·동구·영도구)[[박찬종]]·[[김정길]]
|후임자 = [[허삼수]]
|대수 = 13
|직책 = [[부산 동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부산 동구)]]
|임기 = 1988년 5월 30일 ~ 1992년 5월 29일
|소속정당 = [[통일민주당]] → [[민주당 (1990년)|민주당]] → [[민주당 (1991년)|민주당]]
}}
{{전임후임 국회의원|
|전임자 = [[이명박]]
|후임자 = [[정인봉]]
|대수 = 15
|직책 = [[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종로구)]]
|임기 = 1998년 7월 22일 ~ 2000년 5월 29일
|소속정당 = [[새정치국민회의]] → [[새천년민주당]]
}}
{{전임후임|
전임자=[[김대중]]|
후임자=[[고건]]|
직책=[[한반도]]의 국가 원수|
임기=2003년 2월 25일 ~ 2004년 3월 12일
}}
{{전임후임|
전임자=[[고건]]|
후임자=[[이명박]]|
직책=[[한반도]]의 국가 원수|
임기=2004년 5월 14일 ~ 2008년 2월 24일
}}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열린우리당}}
{{전거 통제}}
[[분류:1946년 태어남]][[분류:2009년 죽음]][[분류:광주 노씨]][[분류:통영시 출신]][[분류:진영대창초등학교 동문]][[분류:진영중학교 동문]][[분류:사법연수원 수료자]][[분류:대한민국의 판사]][[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분류:대한민국의 해양수산부 장관]][[분류:김대중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분류:민주당 (대한민국)]][[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최면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후보]][[분류:노무현]][[분류:노무현 정부]][[분류:대한민국의 자서전 작가]][[분류:탄핵 절차가 진행된 공직자]][[분류:대한민국의 자살한 사람]][[분류:투신자살한 사람]][[분류:자살한 정치인]][[분류:무궁화대훈장 수훈자]][[분류:백수리 훈장 (폴란드) 수훈자]][[분류:인터넷 밈]][[분류:대한민국의 발명가]][[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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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통영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