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정보
| 이름 = 노덕술
| 원래 이름 = 盧德述
| 그림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8/8b/%EB%85%B8%EB%8D%95%EC%88%A02.JPG
| 출생일 = [[1899년]] [[6월 1일]]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68|4|1|1899|6|1}}
| 출생지 = {{국기나라|대한제국}}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울산군]]
(現 {{국기나라|대한민국}} [[울산광역시]])
| 본관 = [[교하 노씨|교하]](交河)
| 직책 = 前 대한민국 수도경찰청 수사과 과장
(前 大韓民國 首都警察廳 搜査科 科長)
| 임기 = [[1948년]] [[8월 21일]] ~ [[1949년]] [[1월 24일]]
| 사망지 = {{국기|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별명 = 호(號)는 해촌(海村)
일본식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松浦 鴻)
| 학력 = [[울산초등학교|경상남도 울산보통학교]] 중퇴
| 경력 = [[경찰]] 겸 [[헌병|헌병 군관]]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정당 = [[무소속]]
| 참전 = [[한국 전쟁]]
| 지휘 = 육군 제2범죄수사전단 예하 헌병대대장
| 복무기간 = [[1949년]] ~ [[1955년]]
| 계급 = [[대한민국 육군]] [[중령]]
}}
'''노덕술'''(盧德述, {{일본명|松浦 鴻|まつうら ひろ|마쓰우라 히로}}, [[1899년]] [[6월 1일]] ~ [[1968년]] [[4월 1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경찰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악질고문자라고 평가한다.
== 이력 ==
그는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울산군]] 출신 (현 [[울산광역시]]) 이며,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친일 경찰이었으며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친일파 경찰에서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요인 암살 음모 사건]]의 이종형, 박흥식과 함께 주범 중 한명이며,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내는 등의 호사를 누렸다.
== 생애 ==
=== 일제 강점기 ===
[[1899년]] [[6월 1일]]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울산군]] 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경기도]] [[개성특급시|개성]]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울산으로 이주했다고도 한다.{{출처}} 아무튼간에 1899년 6월 1일 [[울산광역시|경상남도 울산 장생포]]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개성특급시|경기도 개성]]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주로 경상남도 울산에서 자랐고 경상남도 울산 보통학교 2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그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잡화상의 고용인으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홋카이도]]에서 취직을 위해 머물렀다.
귀국 후 경찰관에 지원하여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에 지원하여 6월 경상남도 순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순사교습소를 수료한 후, 같은 달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근무하다가 1922년경 경상남도 울산경찰서 사법계 순사부장으로 재직했다. [[1924년]] 12월 도경부 및 도경부보고시에 합격한 후, 같은 달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상남도 의령경찰서 경부보, [[1926년]] 4월 거창경찰서 경부보를 지냈으며, [[1927년]] 12월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28년]] 10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일형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같은 해 겨울에는 부산제이상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동맹휴교사건을 수사하다가 동맹휴교의 배후에 '혁조회'라는 반일단체가 있음을 알고 혁조회 관련자인 김규직, 유진흥 등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12월 옥사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사건과 관련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제보를 받고 보통학교 교원을 체포하여 심문했다.
[[1929년]] 8월 동래유학생학우회 주최로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이 동래유치원에서 개최한 강연회의 강연 내용이 일본정치를 비난하는 등 내용이 불순하다고 강연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문재순, 추학, 차일명등이 주도하여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석방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일으키자 부하들을 지휘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체포된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1931년]] 경상남도 통영 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통영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32년]] 5월 노동운동가 김재학을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여 고문했다.
[[1932년]] 7월 경부로 승진하여 울산경찰서 경부로 전근했다가 같은 해 8월 다시 [[경기도]] [[경성부]] 본정경찰서(오늘날 서울 명동) 경부로 옮겨 사업주임을 지냈다. [[1933년]] 2월 인천경찰서 경부, [[1934년]] 2월 양주경찰서 경부, [[1938년]] 11월 개성경찰서 경부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양주경찰서와 개성경찰서 경부로 재직 당시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수송 경계, 여론 환기, 국방사상 보급 선전을 비롯해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독려하기 위한 각종 시국좌담회에 참석하고 지도하는 등 전시 업무를 적극 수행했다. 이러한 활동은 일제 총독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1941년]] 3월 훈8등 서보장을 받았다. 그해 6월 경성 종로경찰서 경부로 전근해 사법주임으로 근무했다.
[[1943년]] 9월 경시로 승진해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에 임명되어 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6월 전시체제하에서 경찰의 임무가 치안유지 이외에 징병, 운송, 방공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찰기구가 개편되어 기존의 보안과가 수송보안과로 확대 개편되자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12월에서는 영화와 연극 등의 보급을 통한 사상선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흥행협회'이사를 지냈다.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재직 시 자동차 수송통제를 목적으로 조직된 평남자동차수송협력회의 이사를 지내면서 여러 대의 화물자동차를 징발하여 군수품 수송에 제공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협력했다.
=== 광복 이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3/34/%EB%85%B8%EB%8D%95%EC%88%A0.JPG/300px-%EB%85%B8%EB%8D%95%EC%88%A0.JPG
광복 이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노덕술
광복 후, [[1945년]] 8월부터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을 맡고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이내 곧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5년]] 말에 월남을 하게 된다. 다음해 [[1946년]]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부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 9월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관구 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을 암살한 한현우 등을 검거함으로써 장택상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들의 인정을 받았다.
[[1948년]] 7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저격 혐의로 체포된 박성근을 고문치사 시킨 후 시신을 한강에 투기한 혐의로 경무국 수사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다가 석방되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백민태라는 청부업자를 고용하여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음모가 알려지면서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틀 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투사다. 그를 풀어줘라.'라고 그의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는 석방을 거절했으나 얼마 안가 대통령 이승만과 내무차관 장경근의 주도하에 조작된 [[국회프락치 사건]],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으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고, 노덕술은 풀려나게 되어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한다. 이후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여 [[1950년]]에는 육군 본부에서 범죄수사단장으로 근무하는 등 대공업무를 담당하였으며, [[1955년]] 서울 15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냈다. [[1955년]],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으로 재임 시의 뇌물수뢰 혐의로 그 해 11월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6개월을 언도받으면서 파면되었다. 이후 [[1956년]] 이후 고향 [[울산광역시|울산]]으로 내려가 칩거 생활하면서 지내다가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8년]] 4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사했다.
== 대중문화 ==
* 1981년 [[MBC]] 《[[제1공화국 (드라마)|제1공화국]]》 [[신충식]]
* 2002년 [[SBS]] 《[[야인시대]]》 [[서영탁]]
* [http://www.ziksir.com/ziksir/view/735 고문왕 노덕술의 생애]
== 경력 ==
* [[1920년]] [[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 [[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를 시작으로 경찰 근무를 시작하여, [[울산경찰서]] 사법계에 근무하면서 순사부장이 됨.
* [[1924년]] 경부보로 승진하여 의령, 김해, 거창, 통영 경찰서의 사법주임을 지냈다.
* [[1927년]]경, 비밀결사조직 혁조회(革潮會) 수사를 담당하였다.
* [[1928년]] [[10월]] 박일경을 검사, 취조하였다.
* [[1929년]] - [[1930년]] [[동래경찰서]] 사법주임으로 재직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 맹휴 사건과 조선인 일본 유학생의 하기휴가 이용 귀국 강연회 사건 수사를 담당하였다.
* [[1932년]] [[5월]] [[통영경찰서]] 사법주임 재직 시, 독립운동가 김재학(金載學)을 고문 취조
* [[1934년]] [[9월]]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승진
* [[1948년]] 1월 24일, 임화(任和) 박성근이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암살하려다 미수하고 체포되었는데, 노덕술과 그 부하 김재곤, 박사일등이 그를 고문하다가 1월 29일 사망케 하였다.
* [[1949년]] [[1월 24일]]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요인 암살 음모 혐의로 체포
* [[1949년]] [[1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석방 요청, 반민특위의 요청 거절
* [[1950년]]에는 육군 본부에서 범죄수사단장으로 근무하는 등 대공업무를 담당하였다.
* [[1968년]] [[4월 1일]]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사했다.
*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으며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외부 링크 ==
* [https://web.archive.org/web/20141021202152/http://bluecabin.com.ne.kr/split99/nds.htm 친일 고문경찰의 대명사, 노덕술]
* [http://blog.ohmynews.com/ckeynine/128660 한국 경찰의 원죄, 노덕술]
[[분류:1899년 태어남]][[분류:196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경찰]][[분류:대한민국의 경찰관]][[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울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병사한 사람]][[분류:교하 노씨]][[분류:대한민국 육군 중령]][[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