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c/c3/%ED%95%9C%EC%84%9C_%EB%82%A8%EA%B6%81%EC%96%B5_%EC%84%A0%EC%83%9D%EC%83%81_20180317%EC%86%8D%EC%B4%88%EC%B4%88%EB%93%B1%ED%95%99%EA%B5%90%28%ED%99%8D%EC%B2%9C%EA%B5%B0%29IMG_3551.jpg/220px-%ED%95%9C%EC%84%9C_%EB%82%A8%EA%B6%81%EC%96%B5_%EC%84%A0%EC%83%9D%EC%83%81_20180317%EC%86%8D%EC%B4%88%EC%B4%88%EB%93%B1%ED%95%99%EA%B5%90%28%ED%99%8D%EC%B2%9C%EA%B5%B0%29IMG_3551.jpg 한서 남궁억 선생상(속초초등학교) '''남궁억'''(南宮 檍,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은 대한제국 조선 황조 말기의 교육자, 계몽운동가이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 사회운동가, 시인, 작사가, 작곡가, 언론인이다. == 이력 == 그의 자(字)는 치만(致萬)이고 호(號)는 한서(翰西)이며 본관은 [[함열 남궁씨|함열]](咸悅)이다. [[한성부|조선 한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과 [[서울특별시|조선 경기도 서울시]]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한 노래들을 작곡하였으며 [[좌옹 윤치호]]의 사돈이기도 하다. [[1887년]]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고종의 통역관이 되어 관직에 나갔으며 [[1894년]] [[내무부]] 토목국장이 되어 [[경성부]]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공사의 감독을 맡아 완공시켰다. 또한 [[경성부]]내의 도로 정비와 도시 계획을 주도하였다. 그뒤 개화, 계몽운동을 추진하다가 [[1903년]]부터 성주목사, 양양군수(襄陽郡守)를 지냈으나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대한협회장, 관동학회(關東學會) 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계몽,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1910년]] [[10월]] [[한일합방]] 이후에는 배화학당 교사와 상동학원 원장을 겸하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으며, 신편언문체법(1914), 가정교육(1914) 등의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1918년]] 고향 홍천 모곡으로 낙향하여 교회와 학교를 짓고 [[무궁화]] 보급 운동을 추진했다. [[1933년]] [[12월]] [[조선총독부]]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석방되었다. 성이 남(南)이고, 이름이 궁억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성이 남궁이고 이름이 억이다. == 생애 == === 초기 삶 === ==== 출생과 수학 ==== 한서 남궁억은 [[1863년]](철종 14년) [[12월 27일]], [[한성부]] 종로방 정동 왜송골(倭松洞)에서 [[중추부]]도사(都事)를 지낸 [[남궁영]](南宮泳)과 덕수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는 정식으로 수학하지 못하고 [[한문]] 공부를 하다가 [[1883년]](고종 20년) [[미국인]]이 경영하는 영어학교에 다녔다. [[1884년]](고종 21)에는 영어학교 1학년 재학 중 해관(海關) [[묄렌도르프]](P.G. Von Möllendorff)의 견습생이 되었고, 1886년 내부주사(內部主事)로 특채되었다. [[1887년]] 초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조선 고종|고종]]의 어전통역관이 되었다. ==== 관료 생활 ====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상하이]]에도 갔다. 영국, 러시아, 독일 순방길을 계획하고 홍콩까지 갔으나, [[청나라]]의 간섭과 방해로 2년간 홍콩에서 머물다가 결국 다시 소환되어 돌아왔다. 이후 1889년 [[궁내부]] 별군직(宮內府別軍職), [[1893년]] 칠곡부사를 역임하고, [[1894년]]에는 [[갑오경장]]으로 [[내무부]] 토목국장에 발탁되어 서울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경성부]]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공사의 감독을 맡아 완공시켰다. 이후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교사로 영문법과 국사(國史)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5년]]에는 주변 조정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성부]]의 민가를 정비, 허물고 도로를 정비하여 길을 닦았다. 그뒤 [[1896년]] [[2월]] 관직을 사퇴하였다. === 계몽, 구국 운동 === ==== 독립협회, 독립신문 활동 ==== [[1895년]] [[12월]] [[서재필]]이 귀국하자, 이후 귀국한 [[서재필]](徐載弼), [[유길준]], [[윤치호]], [[이승만]] 등과 개화 운동을 펼친다. 또한 서재필과 함께 언론사 창립을 추진한다. [[1896년]] 초에는 [[서재필]], [[윤치호]]와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독립신문]]의 기자이자 필진의 한사람으로 활동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해 [[2월]] [[아관파천]]이 단행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해 별군직으로 임명되었으나 한직이었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의 창립총회에 참여했으며, 이때 남궁억은 독립협회의 중앙위원 겸 수석 총무로서 또 서기가 되었다가 [[독립협회]] 평의원, 사법 위원을 겸하였다. [[1897년]] 관직을 사퇴하였다. 한편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 (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광무 1년)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 언론 활동 ==== 그해 [[9월]] 나수연(羅壽淵), 유근(柳瑾) 등과 함께 재정난에 허덕이던 [[윤치소]]의 [[경성신문]]을 인수하고 다시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를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후 [[황성신문]]을 일간지로 발행하고 국한문 혼용체를 채택했다. 그밖에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혁, 의회를 설립하고 대대적 개혁을 단행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며 독립협회운동과 [[만민공동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1898년]] [[11월]] 왕당파로부터 왕정타도와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17명의 지도자와 함께 경성부 외곽에 숨었으나 결국 경무청 형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1899년]] [[12월]]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언론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00년]] [[7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을 주장하고 이를 번역하여 외국 신문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는 논평을 게시했다가 경무청에 체포, 구금되었다. ==== 계몽, 개화 활동 ==== 1902년(광무 5년) 5월에도 [[황성신문]]에 일본이 '[[1894년]] [[동학난]] 이래 [[조선]]을 침략해 들어오면서 러시아와 맺은 조약이라며 [[러일협정]]의 성격을 논박한 사설을 실었다. 이 사건으로 황성신문 총무 나수연과 함께 다시 경무청에 체포,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02년]]에는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한국 분할설과 러일 협정을 공박하였으며, [[1903년]] 영관(領官)을 지낸 유동근(柳東根)이 '황성신문 사장이던 남궁억과 신문사 총무 나수연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 등과 공모,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고 모함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혐의 없음으로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3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특별히 성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성주목사와 [[1904년]] 양양군수를 역임하면서 부패한 토호들과 토색질을 일삼는 향리들을 엄히 단속하여 처벌하였으며 조정 고관들의 비리를 탄핵하기도했다. 강원도 양양군수 재직 중 폐습타파와 단발령, 신식 학교 유치, 도로 정비, 병원 유치 등을 추진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실패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로 복직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광무 10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양양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11월에는 권동진(權東鎭), 여병현(呂炳鉉), 유근, [[유길준]], 이우영(李宇榮), [[오세창]](吳世昌), [[윤효정]](尹孝定), [[안국선]], [[장지연]], 정운복(鄭雲復), 홍필주(洪弼周), [[윤치호]] 등과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대한협회 회장이 되었다. 이어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07년 [[7월]] [[일본]]이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을 이유로 [[조선 고종|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가하여 사퇴시키고 [[이완용]], [[박제순]] 등과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관직을 사임하고 홍천 모곡으로 낙향하였다. [[1908년]](융희 2년) 4월 강원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관동학회(關東學會)를 창립하였으며 [[1908년]], 교육 계몽 잡지인 [[교육월보]]를 간행하였다. [[1909년]] 관동학회의 회장이 되었으며 [[경기도]]내 신문물, 신식 학교의 건립과 신식 교육을 보급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 일제 강점기 활동 === ==== 교육 계몽 활동 ====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배화학당]](培花學堂) 의 [[한글]], [[역사]], 가정 교사가 되고 [[1911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배화학당 교사로 있으면서 《가정교육》 《신편언문체법(新編諺文體法)》 등 교과서를 지었고 '우리의 역사', '언문 체법', '가정 교육', '무궁화 지도', '육아법' 등의 책을 집필, 발간하고 시와 노래를 지었다. 1912년부터는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낙향 초기에는 교회를 설립한다 하여 주민들의 편견과 비방에 시달리기도 했다. 문맹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20대에서 30,40대의 학생들도 받아서 가르쳤다고 한다. 낮에는 학교 교사로 밤에는 부락의 마을 지도자로 활동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또한 조선이야기 와 동사략 등을 집필, 간행하였다. 후에 모곡학교는 총독부 학제 개편에 의해 한서국민학교와 한서중학교로 분리되었다. 그는 홍천군 모곡리 유리산에 올라 매일 '불의의 일본을 이 땅에서 물리쳐 주소서.', '이 민족에게 불의에 굴하지 않는 힘을 주소서.'하고 매일과 같이 기도하였다 한다. 또한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로 시작하는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한 몇몇 노래와 시 등을 직접 작사 작곡하였다. 그는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노동과 애국심을 주제로 한 찬송가와 시, 가사 등을 지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에 보급하였다. 특히 그가 지은 창가(唱歌) 가사 무궁화동산, 기러기 노래, 조선의 노래, 운동가, 조선지리가(朝鮮地理歌) 등은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 투옥과 석방 ==== {{참고|십자당 사건}} 그뒤 〈무궁화 묘포〉(苗圃)를 만들었으며 1933년에는 무궁화동산이라는 노래를 지어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가 8개월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가석방된 뒤 [[1933년]] [[9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가당]](十字架黨)을 조직, 활동하다가, [[1933년]] [[12월]]에 총독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홍천]] 모곡리 무궁화 사건(십자가당 사건)으로 비화되면서 홍천경찰서로 넘겨졌다가 [[경성부]] [[서대문형무소]]로 넘어가 복역한다. 일제가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일장기]]와 [[벚꽃]]을 보급하고 장려하려는 것에 항거해 당시 모곡리의 [[감리교]] [[전도사]]로 일하던 남궁억은 그의 동지들과 더불어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배포하였다. 남궁억은 [[1918년]] 자신의 선향인에 내려와 모곡 감리교회를 세우고 전도사로 목회하면서 더불어 교회내에 4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무궁화 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무궁화 묘목을 가꾸어 보급하였으나 일제는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태우고, 이들을 구속하였으며, 학교는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시켜 버렸다. === 최후 === 그뒤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학무국의 회유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고문을 당하였다. [[1935년]], 복역 중 병으로 석방되어 [[개성]]의 [[윤치호]] 자택에서 얼마간 요양하다가 고향인 으로 낙향하였다. 저서로는 《동사략(東史略)》, 《조선이야기》, 《가정교육》, 《조선어보충(朝鮮語補充)》, 《신편언문예법》,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등이 있으며 이 중에는 기독교계열 학교의 교과서, 교재로도 활용되었다. 석방된지 4년 만인 [[1939년]] 4월 5일에 고문 후유증 등으로 사망하였다. [[1937년]] [[1월]] 부인 양씨의 장례식을 치룬 뒤 그는 제자들과 친지들에게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일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 저작 == * 통사략(동사략, 東史略) 5권 * [[죠션니약이]] (조선이야기) - 아동용 한국사 * 기러기 * 조선의 노래 *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통일찬송가 371장){{인용문2|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봄 돌아와 밭갈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곡식 익어 거둘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후렴: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따옴표크기=10px}} - 일부 가사가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청석골 학교 낙성식 장면에 언급되어 있다{{인용문|귀에 익은 [[손풍금]] 소리가 들리며, '삼천리 반도 금수 강산'을 부르는 찬미 소리가 일어났다. 그제야 장래는 활기가 돌기 시작하는데,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목청을 높여,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하고 소리를 지를 때는, '그런 [[찬송가]]는 꽤 좋군.'하고 동혁이도 따라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상록수》|제12장}}. == 가계 == * 아버지 : 남궁영(南宮泳), [[조선]]시대에 [[중추부]][[도사]](都事) 역임 * 어머니 : 덕수이씨(德水 李氏) * 부인 : 양혜덕(梁惠德, [[1866년]] [[9월 13일]] - [[1937년]] [[1월 20일]] ** 딸 : 남국숙경, 남궁자경 ** 아들: [[남궁염]](南宮炎, [[1888년]] [[3월 17일]] ~ [[1961년]] [[11월 29일]], 미국명 데이비드 남궁(David Y. Namkoong), 독립운동가 겸 외교관) == 같이 보기 == {{Col-begin}} {{Col-2}} * [[대한협회]] *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 * [[무궁화]] * [[윤치호]] * [[양기탁]] * [[이동녕]] * [[이상재]] * [[이시영]] * [[박중양]] * [[서재필]] * [[유길준]] * [[윤효정]] {{Col-2}} * [[애국가]] * [[을사보호조약]] * [[찬송가]] * [[한서초등학교]] * [[한서중학교]] * [[남궁염]] * [[서광범]] * [[남궁자경]] * [[윤광선]] * [[명승희]] * [[신규식]] {{Col-end}} == 각주 == {{각주}} == 참고 자료 == * 김세한, 《한서남궁억선생의 생애》 (한서남궁억선생기념사업회, 1960) *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김상태 편역, 인물과 사상사, 2001) * 피정만, 〈한서 남궁억과 강원도 근대교육〉,《강원문화연구 11》, (강원대학교, 1992) * 김동면, 〈한서 남궁억의 역사관〉, 《한국사연구 46》, 1984 * 정진석, 〈남궁억: 황성신문 초대 사장〉 (도서출판 기파랑 2014) == 외부 링크 == *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544877 한서 남궁억 선생의 생애 담아] 강원도민일보 2011.12.17 {{1994년-이 달의 독립운동가}} {{2000년-이 달의 문화 인물}} [[분류:1863년 태어남]][[분류:1939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고문 피해자]][[분류:개화파]][[분류:사상가]][[분류:반일 감정]][[분류:음서]][[분류:일제 강점기의 감리교도]][[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분류:대한제국의 언론인]][[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작가]][[분류:대한제국의 저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저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작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곡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분류:독립협회]][[분류:신민회]][[분류:함열 남궁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