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정보 |이름 = 김효주 아녜스 |출생일 = [[1816년]] |사망일 = [[1839년]] [[9월 3일]] |축일 = [[9월 20일]]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그림 = |크기 = |설명 = |출생지 = 서울 밤섬 |사망지 = 서울 서소문 |직업 = 순교자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상징 = |수호 = |매장지 = |성당 = |기도 = }} '''김효주'''(金孝珠, [[1816년]] ~ [[1839년]] [[9월 3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녜스'''(Agnes)이다. == 생애 == === 출생과 성장 배경 === 김효주는 [[1816년]]에 [[한강]] 변의 [[밤나무]] [[섬]]을 의미하는 [[밤섬]]이라는 마을에 있는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같은 데서 태어난 두살 터울의 언니 [[김효임 콜룸바]]가 있다. 본래 그들의 가족 중에서는 [[천주교]] 신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어머니가 일찍이 천주교 신앙에 관심을 갖고 서서히 그것과 가까워지고 있던 반면, 그들의 아버지는 전혀 믿지 않았다. 사실, 그들의 아버지는 집에서 [[교회]]라는 소리 조차 듣기 싫어할 정도로 엄격히 그것을 금하였다. === 독실한 신앙생활 === 그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그들의 어머니는 여섯 명의 자녀와 함께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 남매들은 각각 안토니오와 베네틱타, 효임 콜룸바, 효주 아녜스, 프란치스코 그리고 클라라이다. [[김효임 콜룸바]]와 김효주 아녜스 그리고 그들의 여동생 김 클라라는 모두 [[세례]]를 받고나서 곧바로 [[동정 (성 문화)|처녀]]로 살아서 [[하느님]]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봉헌키로 다짐했다. 그들의 어머니는 그들이 결혼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결심을 돌리지 않았고 결혼한 여자라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쪽머리를 땋아 올렸다. 그들은 [[한양]] 근교의 [[고양시|고양군]] (현재의 덕양구)에 살고 있는 오빠 김 안토니오와 함께 살러 내려갔다. 그들은 [[기도]]하기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기, [[성경]] 읽기, [[묵주기도]] 그리고 빈자에게 [[자선]]을 베풀기 등을 하며 신앙 생활에 매진하였다. 그들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그들은 속세의 재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기질적으로 온화하며 인정 깊었고, 그러함은 그들의 삶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들 주변의 모든 교우들이 그들의 [[자선]]과 모범에 찬탄했고 그들에 대하여 커다란 경의를 나타냈다. 그 남매들의 어머니는 용머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샤스탕]] [[신부]]가 그녀에게 [[종부성사]]를 베풀어주기 위하여 특별히 찾아와 주었다. 그 뒤로 그 남매들은 결코 용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체포 === [[1839년]] [[기해박해|기해년에 박해]]가 발발하여 곳곳으로 퍼져나가 도처의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세 자매는 두려워하지 않고 감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교우들을 위하여 매일 [[기도]]를 드렸다. [[5월 3일]], 같은 마을에 사는 [[김사문]]이라는 남자가 [[관아]]에다 김 안토니오가 [[천주교]]를 믿는 부유한 사람이라고 고발했고 그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 지역의 천주교인들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던 포졸들은 지체없이 용머리로 향했다. 당시 김 안토니오는 용무를 보고 [[궁술]] 연습도 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포졸들이 습격한다는 소식을 들을 김 안토니오의 부인 김 루치아는 김 베네딕타 그리고 김 클라라와 함께 황급히 집을 빠져나갔고, [[김효임]]은 옆집 담장을 넘어 들어가서 장작더미 뒤에 숨었다. 김효주는 달아나지 않고 포졸들이 침입할 때까지 세살 된 조카와 함께 방 안에 앉아 있었다. 흥분한 포졸들은 김효주를 가둬 놓고서 옆집도 습격하여 김효임을 발견하고는 그녀도 집에 끌고 들어왔다. 무례한 침입자들이 그녀의 여동생 김효주를 학대하는 것을 본 김효임은 그들에게 그들에게 화가 나서 위엄있게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를 체포하면 우리는 순순히 따라갈 터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이 나라에서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에게 그런 몰지각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포졸들은 두 자매를 방 안에다 가둬놓고, 그 집에서 [[개]]와 [[닭]]을 잡아 잔치를 벌이며 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자, 그들은 자매를 붉은 밧줄로 포박하고 마을 이정에게 보인 후에 [[한양]]으로 압송했다. === 극심한 고문과 형벌 === 그들이 [[포도청]]에 도착하고 즉시 [[심문]]이 시작되었다. 포장은 [[김효임]]에게 물었다. "네가 [[천주교|천주교도]]라고 하던데, 사실이냐?" "예, 그렇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경배하고 흠숭합니다." "어찌하여 너는 이 나라에서 금지된 그러한 가르침을 믿느냐? 천주교도 네년은 어째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는 것이냐?" "조상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감옥에 갖힌 부모님을 위해 자식들이 음식을 차려 놓고 그것을 드셔보라고 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부모님께서 나오셔서 그것을 드시지도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포장은 심문을 계속했다. "허나, 그것은 너희들만이 하는 소리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인륜]]을 저버리는 일이다. 우리에게 너의 신앙을 버린다고 말하고 너의 책들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다른 천주교도들이 어디에 있는지 불어라. 네년들의 오래비가 어디있는지에 대해서도 대거라." 김효임과 김효주 자매는 대답했다. "우리가 만 번을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포기 못합니다. 또한 우리는 오라버니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두 자매는 그들이 어째서 다른 교우들을 배신할 수 없고 그들의 종교 서적을 포기할 수 없는지를 설명했다. 그 후 그들에 대한 고문이 준비되었다. [[체포]]되어 [[심문]] 받는 천주교인들을 [[고문]]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형리는 먼저 그들의 온몸을 매질했으며, 그 다음에는 못 박힌 몽둥이로 그들의 [[어깨]]와 [[팔]] 그리고 [[무릎]] [[관절]]을 가격했다. 하지만, 그 자매의 얼굴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포장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더 힘을 내라. 그들을 더 쎄게 때려라!" 그리고 그들은 [[주뢰]]의 고통을 다섯 차례나 견뎠다. 포장은 매 회의 [[고문]] 사이 마다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온갖 약속과 감언을 남발하며 그들을 유혹했다. 그러나, 그 두 자매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고개를 저으며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극심한 주뢰형으로 인해 그들의 다리뼈가 뒤틀렸다. 그 때부터 벌써 그들은 모두 [[천국]]의 평화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절대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고문을 받으면서 종종 "[[예수님]],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마리아님]]"을 부르는 다른 죄수들은 있었지만, 그 자매는 어떠한 말도 없었다. 그들은 마치 마음 속으로 [[예수]]와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마리아]]를 번갈아 말하는 것 처럼 침묵으로 [[기도]]하였다. 형리들은 그들의 끈질긴 침묵에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함은 형리들을 더욱 화나고 포악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 두 여성이 극악무도한 [[마귀]]에 씌였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 자매의 옷을 벗기고 자매의 [[등]]에 [[주문]]을 적었다. 그리고는 빨갛게 달궈진 쇠꼬챙이를 사용하여 그 글자를 따라 그들의 등을 열세 차례나 불로 지졌다. 그러나 두 여성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듯 했다. 그들의 등가죽이 타들어가는데도 그들의 침착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포장이 다시 [[심문]]을 시작했다. 먼저 그는 그들의 [[독신]] 상태에 대해서 물었다. "너희들은 [[성년]]의 나이가 지났는데, 어째서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 [[김효임]]이 대답했다. "저희는 저희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순수하게 지킴으로써 [[하느님]]을 충실히 섬길 수 있으며 그분께 더 큰 기쁨을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효주도 같은 대답을 했다. 포장은 그들이 처녀로서 치욕스러운 모욕과 수모를 당한다면 그들이 신앙을 포기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여, 그들에게 그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난푹한 형리 몇 명에게 자매가 [[학]][[춤]]을 추게 만듦으로 자매에게 굴욕을 줄 수 있는 도구를 맡겼다. 그 형벌은 죄수의 옷을 벗기고 수 손을 등 뒤로 묶고 두 팔 사이로 밧줄을 걸어 올려 죄수를 사람들 보는데에 매달아 놓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서 네 명의 형리들이 대나무로 만들어진 회초리를 들고 돌아가며 죄수에게 매질을 가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면, 죄수는 [[입]]에 [[거품]]을 물고 [[혀]]가 튀어나오며 얼굴이 검푸른 색으로 변했다. 만일 죄수를 신속히 바닥에 내려놓지 않으면 죄수가 이내 죽게 되었다. 여성에게 그것은 특히도 잔인한 고문이었다. 두 자매는 질질 끌려 한적한 옥방으로 갔고, 옷이 벗겨진 뒤에 위의 방법대로 [[고문]]을 당하였다. 야비한 형리들은 일체의 자비심도 없었다. 그들은 자매가 죽기 직전에만 자매를 바닥에 내려서 잠시 쉬게 하다가 다시 매달아 잔학한 짓을 반복했다. [[김효임]]과 김효주는 고통과 치욕에도 불구하고 결코 용기를 잃지 않았으며 소리를 내지 않았다. 포장이 그 자매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학]][[춤]]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여겨 더 사악한 짓을 벌이기로 했다. 그는 그 젊은 여성들의 [[처녀성]]을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만일 그들이 [[하느님]]께 바칠 처녀성이 더럽혀졌다면, 그들은 낙심하여 배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자매의 옷을 다 벗겨 남자 죄수들만 있는 옥방에 집어 넣었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하느님이 자매를 보호하여 이틀 동안 자매는 갖가지 악행에 익숙한 남성들 사이에서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성령]]이 그의 힘으로 자매를 감싼 것처럼 보였다. 옥방의 남자 죄수들은 자매에게 어떠한 신비한 힘이 있다고 여기는 듯 하였고, 자매에게 건드리지 못하였다. 결국 형리들이 옥방으로 돌아와 자매들에게 옷을 돌려주고 다른 여성 옥방에 수감시켰다. 자매는 [[형조]]로 이송되었고, 형조 [[판서]]가 그들을 [[심문]]했다. "[[천주교]]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덕행과 선행을 실천할 다른 방도가 없느냐?" [[김효임]]이 또렷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공자]]와 [[맹자]]는 현자라고 여기지 않느냐?" "그들은 현자가 맞습니다만, 이 세상에서만 그러합니다." 김효주는 마지막 즈음에 이렇게 말했다. "판서님께는 [[백성]]들의 아버지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판서님께 제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십시오." 포장은 말을 허락했고, 김효임은 동생과 자신이 포도청 감옥에 있을 때 겪었던 일을 이야기 했다. "어떤 여자가 [[양반]]의 딸이든 [[평민]]의 딸이든, 젊은 여성의 순결은 존중받아야 할 권리입니다. 만일 판서님께서 [[국법]]에 따라 저를 죽이셔야 한다면, 저는 기꺼이 처형 받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법]]에 일절 없는 치욕을 당한 것은 결코 옳다고 생각되지 않으므로 그것에는 반대하는 바입니다." [[형조]] [[판서]]는 그녀가 한 말을 듣고 놀라 이렇게 말했다. "이 여성의 순결은 백[[비취|옥]]처럼 귀한 것이다. 그녀에게 치욕을 준 야만 행위가 대체 무엇이냐?" 그는 그 사건의 조사를 명령했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의정부]]에 올렸다. 두 자매는 법정에서 끌려나와 다시 매질을 당하며 [[심문]] 받았다. 형리들은 그들에게 다른 천주교인들이 어디 있는지 특히 오빠 김 안토니오에 대해서 발설하기를 요구했다. 그들은 끝까지 말하기를 거부했고 그렇게 [[순교자]]의 길을 택했다. === 순교 === [[1839년]] [[9월 3일]]에 김효주는 [[한양]]의 [[서소문]] 밖에서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24세 였다. [[9월 26일]]에는 [[김효임]]도 같은 장소에서 [[참수]]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26세였다. == 시복 · 시성 == [[김효임 콜룸바]]와 김효주 아녜스 자매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백과사전 인용 |url =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8 |제목 =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백과사전 =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확인월일 = 2014-10-12 |인용문 = }} [[시복|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뉴스 인용 | 제목 =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 url = http://www.pbc.co.kr/CMS/news/view_body.php?cid=520930&path=201407 | 출판사 = 평화방송 | 저자 = 이상도 | 날짜 = 2014-07-24 | 확인날짜 = 2014-10-19 }}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고 문헌== * [http://www.mariasarang.net/saint/bbs_view.asp?index=bbs_saint&page=&no=135&curRef=135&curStep=0&curLevel=0&month=9&day=20 마리아 사랑넷: 성녀 김효주 아녜스 (金孝珠 Agnes)] * {{언어링크|en}} [http://english.cbck.or.kr/Saints103/265 Catholic Bishop's Conference Of Korea. 103 Martryr Saints: 김효주 아녜스 Agnes Kim Hyo-ju] == 각주 == {{각주}} [[분류:1816년 태어남]][[분류:1839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참수된 사람]][[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