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정보 | 이름 = 김화랑 | 필명 = 이익 | 출생일 = [[1912년]] [[10월 8일]] | 출생지 = [[경성부]] | 사망일 = [[1976년]] | 사망지 = | 직업 = 작가, 연극인, 영화감독 | 국적 = {{국기나라|대한민국}} | 장르 = 시나리오, 소설 | 배우자 = [[신카나리아]] }} '''김화랑'''(金火浪, 일본식 이름: 星野正史, [[1912년]] [[10월 8일]] ~ [[1976년]])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이며 연극인이다. 다른 이름으로 '''이익'''(李翼)이 있고, 본명은 이순재(李順載)이다. == 생애 == [[경성부]] 출신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배재고보 시절부터 연극부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1937년]] [[주영섭 (1912년)|주영섭]] 등과 함께 [[조선영화작가협회]]를 결성하며 문화예술계에 첫선을 보였다. 그는 '천부적인 예술 감각의 소유자'로, 천재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서적 인용 |저자=황문평 |제목=삶의 발자국 1 |날짜=1998-04-25 |출판사=선 |출판위치=서울 |id={{ISBN|89-86509-07-5}} |장=018. 천부적 예술 감각의 소유자 김화랑 }}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악극단 전문 작가였다. [[1938년]] [[방한준]]의 《한강》을 각색하고 곧 [[조선일보사]] 주최의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도 당선되어 영화계에 데뷔하였다. [[1939년]] [[정비석]] 원작으로 방한준이 영화화한 《성황당》(1939)의 시나리오로 호평을 받으며 전문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 [[중일 전쟁]]을 배경으로 [[1939년]]에 [[조선문화영화협회]]가 제작한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를 연출하여 영화감독으로도 데뷔했다. [[최운봉]]과 [[복혜숙]]이 출연한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는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고 근로와 저축으로 국가에 충성을 다할 것을 주제로 삼고 있는 직설적인 어용 영화이다. 주인공은 동네에서 손수 [[일장기]]를 만들고 나누어 주고 [[신사참배 강요]] 정책에서 앞장서 모범을 보이며, 마지막에는 일장기 아래에서 일본 궁성을 향해 죽는 인물이다. 이 무렵까지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대부터 영화에서 연극과 악극 분야로 주무대를 옮기면서 김화랑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주로 순회공연 악극단의 희곡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 후 연극계에서 [[우익]] 계열 극작가로도 활동 {{저널 인용 |저자 = 황문평 |제목 = 기획특집/ 해방공간(1945∼50)의 우리 문화예술*대중예술 - 내일을 지향하는 대중예술의 가치관 정립 |저널 = 문화예술 |연도 = 1988 |작성월 = 9 |url = http://www.kcaf.or.kr/zine/artspaper88_09/19880905.htm |확인날짜 = 2007-08-18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70922035314/http://www.kcaf.or.kr/zine/artspaper88_09/19880905.htm |보존날짜 = 2007-09-22 |깨진링크 = 예 }} 하였고, 이후 시나리오는 사극 《거지왕자》(1963) 한편만 쓰고 영화감독으로 주로 일했다. [[한국 전쟁]] 초기에는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숨어지냈다. 부인인 가수 [[신카나리아]]는 [[조선인민군]]에게 잡혀갔다가 북행 중 도망쳐오기도 했다. 전세 역전 이후 이들 부부는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활동했다.{{뉴스 인용 |저자=이동순 |url=http://www.yeongnam.com/yeongnam/html/yeongnamdaily/culture/article.shtml?id=20080214.010190755080001 |제목=[이동순의 가요이야기.24] 식민지 갇힌 삶을 노래한 신카나리아 |출판사=영남일보 |날짜=2008-02-14 |확인날짜=2008-06-25 }} 피난지 [[부산]]에서는 악극단을 창립했다. 신카나리아와 [[왕숙랑]], [[백설희]] 등 유명한 가수를 보유하고 쇼에 중점을 두는 악극단이었다. 김화랑은 짤막한 코미디 집필에도 재능이 있었다. 이후 악극이 쇠퇴하자 영화계로 돌아가 1950년대와 1960년대 많은 영화를 발표했다. 이 가운데 [[양훈 (희극인)|양훈]], [[양석천]],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김희갑]] 등 유명 코미디언들이 출연한 희극 영화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영화계에서 주로 활동하며 라디오 드라마 작가와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여인숙》(1959), 《인생복덕방》(1959), 《가슴에 맺힌 눈물》(1969)로 영화화된 그의 소설은 신파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말기인 [[1959년]]에는 [[임화수]]가 주도해 설립한 어용 단체인 [[반공예술인단]]의 조직부장을 맡은 바 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강옥희, 이영미, 이순진, 이승희 |제목=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id={{ISBN|978-89-90626-26-4}} |페이지=83~85쪽}} * {{서적 인용 |저자=김종원 |제목=한국 영화감독 사전 |날짜=2004-04-28 |출판사=국학자료원 |출판위치=서울 |id={{ISBN|89-541-0189-5}} |장=〈갯마을〉(1965·김수용 감독)}} == 각주 == == 외부 링크 == * {{KMDb 사람|00004738|김화랑}} * {{KMDb 사람|00043369|이익}} * {{IMDb 이름|1077023|Hwa-lang Kim}} * {{IMDb 이름|1641344|Ik Lee}} [[분류:1912년 태어남]][[분류:1976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극작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각본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감독]][[분류:대한민국의 극작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각본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