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규'''(金虎圭, [[1911년]] [[11월 22일]] ~ [[1961년]] [[8월 5일]])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 출신 관료, 사회운동가로, 해방 후 [[반민특위]]에 기소되기도 했다. 본관은 [[안동 김씨|안동]],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며 자작 [[김성근 (1835년)|김성근]]의 손자이다.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양 외종질이 된다.
[[1919년]] [[12월 27일]] 할아버지 [[김성근 (1835년)|김성근]]에게서 [[자작]] 작위를 상속받았으나 [[1930년]]대까지 양자관련 소송의 잡음이 있었다. 할아버지 [[김성근 (1835년)|김성근]]은 그를 큰아버지 김병칠이 죽은 뒤 [[사후양자]]로 삼았다가, 이것이 문제가 되어 [[1930년]]대까지 작위 무효 소송, 토지 무효 소송 등에 시달림당했다.
== 생애 ==
=== 생애 초반 ===
김호규는 [[김성근 (1835년)|김성근]](金聲根)의 첩 유씨(劉氏) 소생["金子爵家紛爭 宗中이 蹶起 문숭이 불명예하여진다고 雙方에 決議文送與" 매일신보 1932년 02월 26일자, 02면] 서자인 김병팔(金炳八)의 아들로 태어났다.["宗中서도 憤起聲明書發表 김병팔씨 측에서 조정불청 故金聲根子家門紛糾", 매일신보 1932년 03월 04일자, 2면] 고조부는 김이회(金履會), 증조부는 [[공조판서]]와 판부사를 지낸 [[김온순 (1812년)|김온순]](金蘊淳)이다. [[1890년]] 무렵 [[승정원]][[승지]]를 지낸 [[김병억]](金炳億)은 그의 당숙이 된다. 공조판서와 [[한일 합방]] 후 [[자작]]을 지낸 할아버지 [[김성근 (1835년)|김성근]]은 정실에게서 본 아들들이 일찍 사망하자, 아들이 없어 결국 서자 김병팔(金炳八) 아들인 그를 정실 자식의 양자로 입양하였다.
본부인에게서 적자가 없던 김성근은 첩 유씨의 아들인 김병칠을 적자로 삼았다. 따라서 [[매일신보]] 기사에는 김병팔을 실제(實弟)라고 하였다.["金發貴未亡人의 最後哀訴도 敗北 金虎圭子爵家의 家庭騷動劇 高等法院서 再審判決", 매일신문 1936년 03월 27일자, 05면]
그의 대고모의 양자가 [[서재필]]로 [[서재필]]은 그의 내종숙, 그는 [[서재필]]의 내종질간이었다. 또한 내종숙인 [[서재필]]은 그의 할아버지이자 서예가, 학자인 [[김성근 (1835년)|김성근]]의 문하생이기도 했다. [[갑신정변]]의 지도자였던 [[김옥균]]의 일족이었다. 그러나 김옥균이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므로 돌림자를 바꿔서 이름을 규로 지었다.
=== 작위 소송 분쟁 ===
[[1919년]] [[12월 27일]]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김성근이 받은 자작 작위를 승계받았다. 그런데 1930년대까지도 그의 생부 김병팔이 소송을 제기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문제가 되자 그의 양어머니인 김발귀(金發貴)는 양자 무효 소송을 내기도 했다. 김병팔(金炳八)은 [[김성근 (1835년)|김성근]]의 서자로, 측실 유씨(劉氏) 소생이었다. 생부 김병팔은 자기가 [[김성근 (1835년)|김성근]] 생전에 태어난 자식이라 하여 작위는 자신이 받아야 된다고 적형의 양자로 간 김호규와 적형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생부 김병팔은 자기가 [[김성근 (1835년)|김성근]] 생전에 태어난 자식임을 주장하였으나, 김병팔의 신분은 서자였고 그의 소송은 결국 무효가 되고 말았다.
[[1931년]] [[12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종5위에 서위되었다. [[1932년]] [[3월]]까지 생부 김병팔은 소송을 제기했고, 당숙인 김병억 등이 개입했지만 결국 조정에 실패하고 만다. 이 싸움은 김호규와 김호규의 양어머니 김발귀 사이에 양자무효소송으로 가게 되었다. [[3월 6일]]에는 김발귀가 그를 상대로 양자 무효소송을 냈다.["被告側抗辯업시 公判은 結審 원고측에선 두 증거물 제출 故金聲根子家訴訟", 매일신보 1932년 03월 06일자, 02면]
[[1935년]] [[도쿄 대학|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1938년]] 3월 대학을 졸업했다.
=== 양자 무효화 소송 ===
그러나 [[1932년]]부터는 그의 양어머니인 김발귀가 다시 양자 무효소송을 제기하였다. [[1932년]] [[3월]]의 소송에서 패한 김발귀는 계속 김호규를 상대로 양자무효소송을 제기하였다. [[김발귀]]는 [[1936년]] [[3월]] 다시 소송을 제기하여 김호규가 남편 김병칠의 양자가 아니라는 확인소송을 걸었다.
[[김성근]]이 정실의 양자로 들인 김병칠은 [[1913년]](다이쇼 2년) 양아버지 [[김성근]]보다 먼저 사망했다. 그러자 [[김성근]]은 김병칠의 사후 자신의 서자인 [[김병팔]]의 외아들 김호규를 김병칠의 양자로 삼았다.
김병칠은 [[1913년]](다이쇼 2년) [[11월 28일]]에 사망했다. [[김병칠]]은 다시 자신의 서자 아들인 김옥규(金玉圭)에게 유산을 상속하였으나 김옥규는 [[1913년]](다이쇼 2년) [[8월 12일]]에 자신의 아버지 김병칠보다 먼저 사망했다. 결국 김옥규의 적모이자 김병칠의 아내인 김발귀가 [[김성근]] 사후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여자라 하여 서시동생이자 양아들의 생부인 김병팔에게 토지를 대신 관리하게 했다. 그런데 김병팔이 소화 7년 이 땅은 내 아들 김호규 몫이라고 주장하고 명의를 김발귀 명의가 아닌 김호규 명의로 돌리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김발귀는 남편의 첩이 낳은 김옥규 사후 정당하게 자신이 소송받은 몫이라고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김발귀는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에 있는 전답 2만8천41평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걸었다. 남편 김병칠이 시아버지 [[김성근]]에게 증여받은 것임을 들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김발귀는 이 소송에서도 패배하고 만다.
=== 사회 활동 ===
[[1937년]] [[8월 25일]] [[동요회]](同耀會) 발기인과 이사로 참여하는 한편 국방헌금 헌납에 적극 참여했다. 1937년 12월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의 [[난징 시|난징]] 함락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했으며 1938년 1월 조선에서 실시된 지원병 제도를 적극 지지하는 글을 기고했다. 1938년 다시 [[동요회]] 이사에 선출되었다.
[[1938년]] [[조선실업구락부]] 회원을 역임했고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 내무국 지방과 촉탁으로 근무했다. [[1941년]] 3월에 열린 [[대동아공영권]] 확립에 관한 연설에서 도쿄 회의(대동아공영권에 대한 회의)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등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1940년]] 일본 기원 2600년 축전 기념 초대자로 선정되었고 1940년 11월 10일 일본 정부로부터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1942년]] [[12월 28일]] 일본 정부로부터 종4위에 서위되었으며 그해 [[8월]] 광복 이후 칩거하였다.
=== 생애 후반 ===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반민특위]]의 해체로 그해 [[2월]]에 풀려났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조선귀족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수작/습작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가족 관계 ==
* 할아버지 : [[김성근 (1835년)|김성근]](金聲根, [[1835년]] - [[1919년]])
* 할머니 : 이름 미상
* 양 아버지 : 김병칠(金炳七, ? - [[1913년]] [[11월 28일]])
* 양 어머니 : 김발귀(金發貴)
* 양 서모 : 이름 미상
** 양 이복동생 : 김옥규(金玉圭, ? - [[1913년]] [[8월 12일]]) - 양아버지 김병칠의 서자
* 친 할머니 : 유씨(劉氏), 할아버지 [[김성근 (1835년)|김성근]]의 첩
** 큰아버지 : 김병칠 - 서자였는데 할아버지 [[김성근 (1835년)|김성근]]이 본부인의 아들로 [[성서탈적]]시켰다.
** 친 아버지 : 김병팔(金炳八), 할아버지 김병팔(金炳八)의 서자
* 친족 : 15촌 [[김옥균]](金玉均)
== 각주 ==
{{각주}}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제목=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3
|연도=2009
|id=
|출판위치=서울
|쪽=653~664
|장=김호규
|장url=
}}
* 이강수, 《반민특위 연구》 (나남출판, 2003){{쪽|날짜=2013-7-8}}
[[분류:1911년 태어남]][[분류:1961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자작]][[분류:서재필]][[분류:대한민국 사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안동 김씨 (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