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정보 | 이름 = 김충현
金忠顯 | 출생일 = [[1921년]] [[4월 2일]] | 출생지 = {{국기|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2006|11|19|1921|4|2}} | 사망지 = {{KOR}} [[부산광역시]] | 국적 = {{KOR}} | 소속 = 前 서울백악예원 명예이사장
前 [[동국대학교]] 전임교수
前 [[단국대학교]] 전임강사 | 별칭 = 호(號)는 일중(一中) | 경력 = | 직업 = [[서예|서예가]] | 종교 = | 분야 = 서예 | 상훈 = | 웹사이트 = }} '''김충현'''(金忠顯, [[1921년]] [[4월 2일]] ~ [[2006년]] [[11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서예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서경(恕卿), 호는 ‘일중(一中)’[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9%80%EC%B6%A9%ED%98%84&ridx=0&tot=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며, 서울 출신이다. == 생애 == 1943년 를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 1943년 서예가로 첫 입문하였다. 이후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등을 역임했고, 1953년 국전 심사위원이 되었다. 1965년 한국 서예가협회 상임위원이 되었고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를 창립, 이사장으로서 1천5백여 회원들에게 서예를 지도하기도 했다.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현대미술/현대의 미술가/서예가/김충현, 《글로벌 세계 대백과》 1968년부터 1974년까지 서예가협회 회장을 맡았고, 1975년에는 학교법인 오산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1983년 백악미술관을 건립하여 대표로 활동하였고, 1998년 3월부터 4월까지 서예 개인전을 3차례 열었다.[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8KOR_A1921_1_0030625&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7세 때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쓰기 시작했고 만년에는 후한(後漢) 조전비서풍(曹全碑書風)의 예서(隸書)를 썼다. 궁체(宮體) 한글은 국내 독보적인 존재로 알려지고 있다. 김응현과 중계(仲季)의 형제간으로 그들의 사백(舍伯) 김문현(金文顯) 등 3인 모두 삼절(三絶)로 불릴 만큼 일가(一家)의 서풍(書風)을 이루었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예술원상‧보관문화훈장‧추사서예대상원로작가상‧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주요작품으로 〈4·19의거 희생자 묘비〉, 〈권도원수 행주대첩비명〉, 〈이충무공 한산도제승당비〉, 〈병천 유관순 기념비〉, 〈예산 윤봉길의사 기념비〉, 〈백범 김구선생 묘비〉, 〈사육신묘비〉, 〈의암손병희선생 묘비〉, 〈월남 이상재선생 묘비〉, [[독립기념관]] 현판이 있다. 저서로는 『우리글씨 쓰는 법』‧『근역서보』‧『서예집성』‧『한글서예』등이 있고, 대표 작품으로 『경복궁의 건축문 현판 글씨』‧『서울 남산의 안중근 동상 및 충무공 기념비 글씨』‧『탑공공원 3ㆍ1정신찬양비문』‧『대통령 이승만과 박정희 묘비 글씨』 등이 있다. == 각주 == == 참고 자료 ==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토막글|미술가|교육인}} [[분류:1921년 태어남]][[분류:2006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서예가]][[분류:대한민국의 서예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