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search.pstatic.net/common/?src=http%3A%2F%2Fcafefiles.naver.net%2F20121026_167%2Fcoolbj1_1351179511282jE7EO_JPEG%2F%25C1%25A4%25BC%25F6%25C0%25E5%25C7%25D0%25C8%25B8%25BF%25CD_%25B1%25E8%25C1%25F6%25C5%25C202.jpg&type=n88_88 '''김지태'''(金智泰, [[1908년]] 7월 [[부산광역시]] ~ [[1982년]] [[4월 9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언론인이다. == 약력 == [[1927년]] [[개성고등학교|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에 입사하였다. [[1932년]] 폐결핵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퇴사하였다. 이를 두고 일부라는 의혹이 있으나 입사한지 5년밖에 되지 않아 중도퇴사 직원을 적극적 친일파로 보기에는 무리였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의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거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친일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동양척식주식회사 입사로 인해 친일파 논란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섬유한국생사(주) 사장, 부산상공회의소 초대회장, [[부산일보]] 사장, 경남육상경기연맹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무소속으로 제2대 민의원, [[1954년]]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을 역임하였다. 그의 자본가로서의 시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장에게 인심을 얻어 동경의 본사와 의논하여 불하받은 울산의 땅 2만 평을 이용해서 자본가로 직업을 바꾼다. 직물공장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나 얼마 못가 실패한다. 지기공업(紙器工業)에 진출하였고 마침 터진 [[중일 전쟁]]으로 인해 사업성공, 지기제조, 지류무역, 부동산업 등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해방 후 조선견직(전 아사히 견직), 삼화고무, 제사업(製絲業) 등을 주축으로 전국적인 자본가로 성장하였다. [[1949년]] [[부산일보]]를 인수하였다. [[1958년]] [[부일장학회]]를 설립하였고, [[1959년]] [[부산문화방송]]을 개국하고, [[1961년]] [[문화방송]]을 개국하였다. [[1954년]] 12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다가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해당 행위자로 제명되었으며, [[1957년]] 5월에 복당했으나 [[1958년]] 5월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에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1961년]] [[12월 30일]] 부정축재 환수금으로 5억 4570만 환을 냈다. 그 후에 [[1962년]] 5월, 다시 국내재산도피방지법, 관세법 및 형법, 농지개혁법 위반 혐의로 박정희 군사정부의 군검찰로부터 징역 7년을 구형받았는데, 같은 해 [[6월 20일]] 구속된 상태에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및 부일장학회 소유의 부산 시내 땅 10만 147평을 5·16 장학회에 무상기증한다는 기부 승낙서에 서명하고 날인하였다. 그리하여 [[6월 22일]] 공소취소로 석방되었고 5·16 장학회는 1982년에 박정희 대통령 및 영부인 육영수의 이름을 한글자씩 옮긴 [[정수장학회]]가 된다. 이후, 유족은 기부과정의 위법성을 주장하면서 [[정수장학회]]에 주식 반환 청구 소송을 수십년동안 진행했으나, [[2012년]]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7부(염원섭 부장판사)는 "국가도 과거 군사정부가 자행한 강압적 위법행위에 대해 배상책임이 있다. 하지만 이 역시 10년이 훨씬 지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이유로 강압적 기부는 인정했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인해 소송을 기각하면서 일단락된다. == 이외 이력 == * 前 [[동아대학교]] 특임강사 == 역대 선거 결과 == {| class="wikitable" |-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제2대 총선]]||[[부산시의 국회의원|국회의원(경남 부산시 갑)]]||2대||[[무소속]]||{{막대|무|2|8|8|9}} 28.89%||12,521표||1위|| |-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제3대 총선]]||[[부산시의 국회의원|국회의원(경남 부산시 갑)]]||3대||[[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막대|옥|3|3|9|7}} 33.97%||27,659표||1위|| |-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선거|제4대 총선]]||[[부산 부산진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부산 부산진구 갑)]]||4대||[[무소속]]||{{막대|무|2|2|0|5}} 22.05%||9,911표||2위||낙선 |} == 참고 자료 == * {{헌정회|327|김지태}} * {{뉴스 인용 |url=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040510000118 |제목=(부산 경제 야사) <23> 인물편 김지태 ① 광복이전 기업활동 |장=III. 조사결과 1.부일장학회 헌납에 따른 의혹 사건 |저자=[[부산일보]] }} * {{뉴스 인용 |url = http://sstv.hankyung.com/?c=news&m=v&nid=132728 |제목 = 정수장학회 반환 청구 기각, "강압은 있지만 '공소시효' 때문에…" |저자 = [[한국경제 SSTV]] |확인날짜 = 2013-10-31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1102105915/http://sstv.hankyung.com/?c=news&m=v&nid=132728# |보존날짜 = 2013-11-02 |깨진링크 = 예 }} == 외부 링크 == {{전임후임 국회의원| |전임자 = (부산시 갑)
(부산시 을)
(부산시 병)
(부산시 정) |후임자 = (부산시 갑)
(부산시 을)
(부산시 병)
(부산시 정)
(부산시 무) |대수 = 2 |직책 = [[부산시의 국회의원|국회의원(부산시 갑)]] |임기 =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소속정당 = [[무소속]] →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같은 지역구 의원 = (부산시 을)
(부산시 병)
(부산시 정)
(부산시 무) }} {{전임후임 국회의원| |전임자 = (부산시 갑)
(부산시 을)
(부산시 병)
(부산시 정)
(부산시 무) |후임자 = (부산시 중구)
(부산시 서구 갑)
(부산시 서구 을)
(부산시 영도구 갑)
(부산시 영도구 을)
(부산시 동구 갑)
(부산시 동구 을)
(부산시 부산진구 갑)
(부산시 부산진구 을)
(부산시 동래구) |대수 = 3 |직책 = [[부산시의 국회의원|국회의원(부산시 갑)]] |임기 =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소속정당 =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같은 지역구 의원 = (부산시 을)
(부산시 병)
(부산시 정)
(부산시 무) }} [[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1908년 태어남]][[분류:1982년 죽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자유당]][[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부산상업고등학교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