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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한(축구)



기본 정보


이름 김재한 (金在漢 / Kim Jae-Han)

생년월일 1947년 4월 1일

국적 대한민국

출생지 경상북도 금릉군[1]

포지션 스트라이커

신체조건 190 cm

유스팀 김천고등학교

선수시절 소속팀 제일모직 축구단 (1967) br 건국대학교 (1968~1971) br 한국주택은행 (1972~1975) br 세이코 SA (1976~1977) br 한국주택은행 (1977~1979)

국가대표 58경기 33골

감독 커리어 한국주택은행 감독 (1980~1989)

개요


70년대 대한민국 대표 스트라이커
190cm 장신 공격수의 원조
역대 국가대표 득점 4위

김재한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 싸카(SSAKA)스포츠 사장. 대한축구협회의 상근 부회장.

선수 경력

유소년 시절

경북 김천 출신의 김재한은 어려서부터 신체 조건이 좋았을 뿐 아니라 운동도 좋아해서 축구를 비롯한 여러 종목을 섭렵했다고 한다. 야구, 배구, 육상의 높이뛰기 등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다양한 종목의 대회 출장을 하던 김재한은 대구고 시절 야구 선수로 진로를 잡았다고 한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초대 감독이던 서영무가 대구고의 감독이었다고 한다. 2학년 말에 대구고 야구부가 해체되면서 고3에는 축구로 진로를 틀고 성광고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 그러나 대구는 축구로는 딱히 좋은 지역이 아니어서 고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당대 유스의 팀인 제일모직에서 대구로 전지훈련을 왔다가 김재한의 피지컬을 높이 봤는지 제일모직 코치였던 안종수에 의해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한다. 거기서 1년 가량 연습생 생활을 했으나 그라운드에서 뛰지 못하던 김재한은, 마침 건국대 장경환 감독의 눈에 띄어 건국대에 입학하게 된다.

김재한은 전문 지도자에게 배우는 본격적인 축구를 고 3때 시작했기 때문에 기본기가 부실했다. 그보다 어린 차범근이 국대에 등장했을 때 178의 장신 스트라이커로 분류되었고 농구 국가대표 최장신이 186 가량인 시점에서 190이 넘는 김재한은[2] 지도자들에게 매력적인 카드였다. 건국대에서 장경환의 조련에 의해 김재한은 장경환의 본격적인 지도와 집중적인 헤더 연습에 대한 지시를 통해 파괴적인 공격수로 거듭나게 된다. 김재한은 졸업 후 제일모직으로 돌아간다.

성인 시절


제일모직에 돌아갔으나 제일모직 축구팀은 김재한이 돌아온 후 2년만에 해체한다. 이에 주택은행으로 적을 옮기게 되어 주택은행이 4관왕을 차지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25살인 1972년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김재한은 이회택, 박이천, 차범근, 김진국, 이차만, 허정무 등과 공격수로서 함께 호흡을 맞추며 1979년까지 활약한다. 실제로 1972년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지역에 주어진 단 한 장의 월드컵 진출 티켓을 놓고 벌인 3번의 혈투를 벌였던 당시 호주 국가대표팀 감독과 2007년에 대면할 일이 생겼는데, 기억나는 것은 김재한과 차범근 뿐이었다고 한다.[3]

A매치 57경기 출장 33골 득점인데 경기당 평균 득점률이 0.58로 대한민국 A매치 득점랭킹 순위권에서는 최고의 득점률을 보여줬다. 현재 정식 국가대표 경기로 인정되지 않는 경기까지[4] 포함하면 51골을 득점했다고 한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세미 프로이던 홍콩의 세이코에서 뛰기도 했던 김재한은 다시 주택은행으로 돌아와 79년 커리어를 마무리하게 된다.

은퇴 이후


현역 은퇴 이후 주택은행 축구단 코치로 지도자를 시작하여 이후 감독으로 1989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이후 주택은행 영업부 부장으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은행업무를 보았고, 2005년 싸카스포츠로 이직해 부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2007년부터 사장에 올랐다. 같은해 대한축구협회 상근 부회장에 선임되면서 축구 행정가로 들어오게 되었다. 행정인으로서도 상당한 자질이 있다는 평이다.

플레이스타일

주로 190cm가 넘는 키를 활용하여 포스트 플레이에 능했다.[5][6] 차범근과 나누던 사담에 의하면 헤딩은 김재한이 낫지만 기술이나 움직임은 김신욱이 나은 듯하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당대 대표선수들 중 농구선수들까지 능가하는 최장신인데 점프력까지 나쁘지 않아 높이로는 아시아에 적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아시아에 속해서 겨루던 호주나 이스라엘에서는 비슷한 신장의 적수들이 있었지만 김재한 본인은 그들을 점프력에서 능가했다고 한다. 또한 공의 낙하지점 찾는 것에도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등지는 플레이와 등진 상태에서 돌아서면서 슛을 때리는 것도 자신 있었다고.

기타

장신스트라이커라 많은 견제를 받았으며 옛날이라 플레이가 거칠어서 그런지 선수생활을 하면서 부상이 많았던 편이다. 3번이나 코뼈가 부러졌으며 그 가운데에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부상도 있었다. 헤딩 경합을 하다 넘어진 김재한의 다리 위에 상대 골키퍼가 쓰러지면서 다리뼈가 세 조각으로 부숴지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국가대표 청백전에서는 주전 골키퍼인 이세연이 김재한에게 한 골을 먹은 후 한 손으로는 공을 향해 한 손으로는 김재한의 얼굴을 향해 펀칭을 하는 바람에 김재한의 어금니가 부러지자, 김재한이 자신의 부러진 어금니를 주워들고 이세연을 노려보자 이세연이 움찔하더니 그 이후로는 김재한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7]

선수생활을 하면서 당연하게도 발로 골을 더 많이 넣었지만 당대에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발로 골을 넣으면 발로 골을 넣었다고 신문에도 기사가 나거나, 발로도 골을 넣는군요 하면서 중계되기도 했다고 한다.

부인으로는 전직 국가대표 농구선수인 재일대표 출신 조영순을 맞이했다. 조영순은 원래 일본에서 일본명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일본으로의 귀화를 거부한 후 일본 농구계에서 퇴출당하고 한국 국가대표팀 주장을 역임하던 선수였다. 태릉에서 친분을 쌓은 후 일본에서 펼쳐진 한일정기전을 대패한 김재한을 마침 일본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던 조영순이 위로해 주다가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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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현재의 김천시
  • [2] 선수 시절 190도 나오고 191도 나왔다고 한다.
  • [3] 립서비스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35년이나 지난 후에 회고하는 것인 만큼 상당히 진솔할 수 있다. 립서비스를 감안하더라도 그만큼 부담스러웠다는 뜻으로 생각하면 적당할 듯하다.
  • [4] 70년대에는 외국 유명 클럽팀과 국가대표팀이 경기하거나 외국의 국가대표 일부 선발팀과 경기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역으로 한국이 일부를 선발하기도 했다. 이런 일은 90년대까지 이어진다.
  • [5] 김재한의 은퇴 이후 국가대표에 피지컬이 좋은 장신 공격수가 등장하면 "포스트 김재한"으로 불리기도 했다. 과거 우성용이 그랬고 현재는 김신욱이 그 계보를 잇는 중이다.
  • [6] 국가대표와 주택은행의 감독을 하던 민병대의 영향을 받아 에우제비우와 짝을 이뤘던 포르투갈의 장신 스트라이커 호세 아우구스토 토레스의 플레이를 본받으려 많이 노력했다고 한다. 포스트 플레이를 통해 주위 선수들에게 공을 떨궈주는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 [7] 이세연은 당시 한국의 주전 골키퍼로, 신체적 조건이 부족해 독기로 메운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의 성격으로 대표팀 내에서도 가장 거친 사람이었다고 한다. 김재한보다 선배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