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1/%EA%B9%80%EC%9C%A4%EC%A0%95_1925%EB%85%84.png/200px-%EA%B9%80%EC%9C%A4%EC%A0%95_1925%EB%85%84.png
김윤정, 1925년
'''김윤정'''(金潤晶, 일본식 이름: 淸道金次郞[{{서적 인용
| 저자1 = 백기완 | 저자2 = 송건호 | 저자3 = 임헌영
|제목=해방전후사의 인식 (1)
|날짜=2004-05-20
|출판사=한길사
|출판위치=서울
|ISBN = 8935655422
|쪽=223
}}
], [[1869년]] [[6월 25일]] ~ [[1949년]] [[10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이자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경무관 재직 시절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혐의로 끌려온 [[김구|김창수]](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의 본명)를 심문하기도 했고, 외교관으로 있을 때는 미국 국무부에 고종의 밀서를 전달해 달라던 [[이승만]]의 청을 거절하였다.
인천부 경무관으로 있다가 정부유학생으로 [[미국]], [[영국]]을 유학하였으며 주미조선공사관의 3등 서기관과 1등 서기관, 주미공사 직무대리 등을 역임했다. [[1905년]](광무 8년) [[을사 보호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귀국하여 [[태인군]] 군수, [[1906년]] [[인천부]] 부윤 겸 감리사를 역임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그해 11월 [[조선총독부]]의 특채로 등용되어 [[전라남도]] 참여관과 [[경기도]] 참여관을 거쳐 [[충청북도]][[도지사]]로 고속승진한 후 [[1926년]]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가 [[1945년]]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그의 딸 [[윤고려]]는 개화파 정치인 [[윤치오]]의 두 번째 부인으로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윤씨로 성을 바꾸기도 했다. 본관은 [[청도 김씨|청도]]이다.
== 생애 ==
=== 초기 생활 ===
[[한성부]] 출신으로 관직에 올라 [[인천부]] 경무관을 지냈다. 인천부 경무관 재직 중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의 암살범으로 지목된 [[김구|김창수]](金昌洙, 뒤에 [[김구]]로 개명)을 심문하였다. 당시 인천부윤은 [[이재정]]이었다.
구한말에 관료생활을 하던 중 대한제국의 [[학부 (대한제국)|학부]]가 선발한 유학생으로 뽑혀 [[1897년]]부터 [[미국]]에 유학했다.
=== 외교관 생활 ===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를 [[1903년]] 졸업한 뒤 주미공사관에 서기생으로 채용, 이후 주미한국공사관 3등 참서관, 1등 참서관, 대리공사 등을 지내며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1904년 고종은 1882년 미국과 맺은 조약을 근거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밀서를 이승만을 통해 보냈다. 1905년 8월 4일 뉴욕시 동부 로즈벨트 대통령 별장에서 이승만과 만난 루즈벨트 대통령은 밀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귀국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다"라고 답변했다. 다만 외교적인 일이므로 밀서가 아닌 위싱턴의 한국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고 권유했다. 이때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밀서를 들고 온 [[이승만]](李承晩)이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외면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그의 어린아들을 설득하여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 하였으나 그는 거절했다.[이호,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 I, 하리출판, 2012, 96]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긴 뒤 [[영국]] 유학을 갔다가 그해 귀국했다.
[[태인군]] 군수를 거쳐 [[1906년]] [[인천]][[부윤]]으로 발령받았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1896년]] 치하포에서의 일본인 살인 사건으로 인천에 압송된 김구가 김윤정에게 심문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김구, 《백범일지》 상권 - [[s:백범일지#기구한 젊은 때|1.2 기구한 젊은 때]]], [[손세일]]은 김윤정의 나이와 유학 시기, 인천부윤 발령 시점을 고려할 때 연대가 맞지 않는다며 이를 김구의 착각으로 보았다. 그러나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당시 인천부윤 겸 인천감리사는 [[이재정]](李在正)이었고 [[김윤정]]은 [[경무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1908년]] [[3월]] 해항 신상회사 사원들과 미상회사 사원들 및 지사 강준, 정재홍, 한우근 등과 인천 지역의 유지들이 공동으로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려 하자 흔쾌히 동의하여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https://www.knowledge.go.kr/SearchSF1/search_view.jsp?mdno=14755025&nowurl=http%3A%2F%2Fwww.knowledge.go.kr%2FSearchSF1%2Fsearch_result_subject.jsp%3FcolAlltrue%3D1%26m_type%3Dall%26startCount%3D40%26inSearch%3Dblock%26page%3D1%26resultcount%3D10%26reqkind%3D0%26collection%3Dkc%26sortOrder%3D1%26mType%3Dall%26searchText%3D%25EA%25B9%2580%25EC%259C%25A4%25EC%25A0%2595%26reSearch%3D%26mc_collection%3Dall%26detail%3Dnone%26sortField%3DVIEW_COUNT%26tType%3DcolM 국가지식포털 - 요약정보 - 私變公立]{{깨진 링크|url=https://www.knowledge.go.kr/SearchSF1/search_view.jsp?mdno=14755025&nowurl=http%3A%2F%2Fwww.knowledge.go.kr%2FSearchSF1%2Fsearch_result_subject.jsp%3FcolAlltrue%3D1%26m_type%3Dall%26startCount%3D40%26inSearch%3Dblock%26page%3D1%26resultcount%3D10%26reqkind%3D0%26collection%3Dkc%26sortOrder%3D1%26mType%3Dall%26searchText%3D%25EA%25B9%2580%25EC%259C%25A4%25EC%25A0%2595%26reSearch%3D%26mc_collection%3Dall%26detail%3Dnone%26sortField%3DVIEW_COUNT%26tType%3DcolM }}] 그 뒤 관직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후 [[관립인천실업학교]]의 교장직을 맡았다가 [[1910년]] [[10월]]의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 사직하였다.
=== 관료 생활 ===
그러나 [[1910년]] [[11월]] 개화파 친일 관료로서 등용되어 [[조선총독부]]의 [[전라북도]] [[참여관]]에 임명되었다. [[1919년]] [[3월 13일]] [[전주]] 만세 시위의 주동자인 [[윤건중]](尹建重)의 습격을 받았다. [[윤건중]]은 행사에 참석한 김윤정을 살해하려다가 그가 재빨리 단상으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고 수배당하였다.
[[1921년]] [[3월]] [[경기도]] [[참여관]]으로 전임되었다가 그해 [[10월]] 정기인사에서 다시 [[경기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4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 [[경기도]]내 군수 30여명을 인솔하여 참여관-군수 시찰단의 한사람으로 [[일본]] [[도쿄]]를 다녀왔다.
[[1925년]] [[4월 2일]]에는 [[충청북도]] [[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고등관 2등 충청북도지사, 곧이어 고등관 1등으로 승급한 뒤 이듬해 도지사직에서 물러났다.[[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0973 네이트 백과사전]{{깨진 링크|url=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0973 }}] 1927년부터 여성의 취직과 직업훈련을 목적으로 조선여자직업사(朝鮮女子職業社) 설립이 추진되자 창립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1928년]] [[1월 15일]] 조선여자직업사 대표이사에 선임되었다.
[[1926년]] 도지사 직에서 퇴임한 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처음 임명되었으며, 이후 중추원 참의직을 6차례나 연임하다가 광복 직전인 [[1945년]]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1935년]] 편찬된 총독부의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올라와 있다.[{{뉴스 인용
|저자 = 성강현
|제목 =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url = 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426/TM_0301.html
|출판사 = 일요시사
|날짜 = 2004-03-18
|확인날짜 = 2008-04-16
|확인날짜 = 2008-03-06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0627191258/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426/TM_0301.html
|보존날짜 = 2008-06-27
|깨진링크 = 예
}}][{{뉴스 인용
|저자 = 성강현
|제목 =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url = 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426/TM_0302.html
|출판사 = 일요시사
|날짜 = 2004-03-18
|확인날짜 = 2008-04-16
|확인날짜 = 2008-03-06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0627191303/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426/TM_0302.html
|보존날짜 = 2008-06-27
|깨진링크 = 예
}}] [[1937년]] [[8월]] [[방응모]], [[한상룡]], [[박흥식 (1903년)|박흥식]] 등과 함께 [[애국금차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윤치오]]의 부인이며 한국 최초로 양장을 입은 여성이라는 설이 있는 윤고려가 김윤정의 딸이다.[{http://leekcp.new21.org/zb41/zboard.php?id=rmswjs&no=267 {{웨이백|url=http://leekcp.new21.org/zb41/zboard.php?id=rmswjs&no=267 |date=20160414022939 }} 이경찬의 국사교실}] 윤고려는 본래 김씨이나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전시체제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1940년 10월 전시 황민화정책 시행 당시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국민의용대]] 고문 등 각종 단체에 활동했다.
=== 만년 ===
[[1945년]] [[4월]]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다시 [[1945년]] [[6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지만 2개월 뒤인 [[8월]]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11월]] 환국한 [[김구]]를 찾아 자신이 경무관으로 김구를 심문하던 옛 인연을 대화하기도 했다. [[돈암장]]의 [[이승만]]도 찾아갔으나 [[이승만]]은 [[미국]]에 밀사 파견당시 외면한 일을 기억하여 꼴도 보기 싫다며 냉대한 후 내쫓았다.
=== 사후 ===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두 명단에는 사위 윤치오도 포함되어 있다.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10년]] 김윤정의 손자 2명이 "[[1896년]] [[김구]]가 투옥 중일 때 경무관으로서 배려한 사실 및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다."면서 국가를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취소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에서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참의를 지낸 것은 그 자체로 친일 활동”이라며 “손자들의 주장하는독립운동지원 사실은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정한 조사범위 내에 있지 않다”며 [[2010년]] [[9월 7일]]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68672&sid=E&tid=0 “조선총독부 중추원 활동, 그 자체로 친일”]{{깨진 링크|url=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68672&sid=E&tid=0 }}]
== 기타 ==
실업계에서도 활동하여 조선상사주식회사의 사장으로 활동했다. 딸 [[윤고려]]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는 [[서광범]], [[이범진 (1852년)|이범진]], [[이승만]], [[김규식]](金奎植), [[서재필]], [[하란사]](河蘭史) 등과 함께 초기 조선인 [[미국]]유학생의 한 사람이었다.
== 가계 ==
* 부인:
** 딸 : [[윤고려]](尹高麗, 다른 이름은 윤고라, [[1891년]] [[4월 14일]] ~ [[1913년]] [[12월 28일]])[{{웹 인용 |url=http://leekcp.new21.org/zb41/zboard.php?id=rmswjs&no=267 |제목=이경찬의 국사교실 |확인날짜=2010년 2월 26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414022939/http://leekcp.new21.org/zb41/zboard.php?id=rmswjs&no=267 |보존날짜=2016년 4월 14일 |깨진링크=예 }}] 윤고려는 본래 김씨이나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꾸었다.[다른 이름으로 윤고라 라는 이름도 있다.][《뉴스플러스》 (1999.4.1)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177/np177gg030.html 20세기 한국의 풍물 풍속사⑫ 옷 - '미니스커트 단속' 그 때를 아시나요 ]]
** 사위 : [[윤치오]](尹致旿, [[1869년]] [[8월 5일]] ~ [[1949년]] [[12월 2일]])
*** 외손녀 : 윤융희[국민보 제41호, 1914년 01월 07일자 기사]
*** 외손자 : 윤욱선
*** 외손자 : 윤창선
== 같이 보기 ==
* [[조선총독부 중추원]]
* [[윤치오]]
* [[윤치호]]
* [[김구]]
* [[이재정]]
* [[이승만]]
* [[민영환]]
* [[명성황후]]
* 쓰치다 조스케
* [[가쓰라 태프트 밀약]]
* [[백범일지]]
== 각주 ==
{{각주}}
== 김윤정을 연기한 배우 ==
* [[이창환]] - [[1995년]] 《[[김구 (드라마)|김구]]》, [[KBS]]2 텔레비젼 드라마
* [[김광영 (배우)|김광영]] - [[2017년]] 《[[대장 김창수]]》, 영화
== 참고 문헌 ==
* 김구, 《백범일지》 (국사원, 1947)
* 이원순, 《인간 이승만》 (신태양사, 1985)
* [[허정]], 《위대한 한국인 11:이승만》 (휘문출판사, 1976)
* [[선우진]], 《위대한 한국인 9:김구》 (휘문출판사, 1976)
* 손세일, [http://monthly.chosun.com/board/view_turn.asp?tnu=200202100062&catecode=J&cpage=1 孫世一의 비교 傳記 (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월간조선》 (2002년 2월호)
[[분류:1869년 태어남]][[분류:1949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외교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청도 김씨]][[분류:암살 미수 생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