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정보
|이름 = 김우중
|정당 = [[무소속]]
|출생일 = {{출생일과 나이|1936|12|19}}
|출생지 =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現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사망일 =
|사망지 =
|사망원인 =
|거주지 =
|국적 = 대한민국
|본관 = [[광산 김씨|광산]]
|학력 = [[연세대학교]] 경제학 학사
|직업 = [[기업인]]
|소속 =
|종교 =
|배우자 = [[정희자 (1940년)|정희자]]
|자녀 = 슬하 3남 0녀[장남 김선재, 차남 김선협, 3남 김선용]
|부모 = 아버지 김용하, 어머니 전인항
|전직 = [[대우그룹]] 회장
|수상 = [[1999년]]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
|순자산 =
|기타 =
|서명 =
|웹사이트 =
}}
'''김우중'''(金宇中, [[1936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 학력 ==
* [[1960년]] [[연세대학교]] 경제학 학사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김용하(金容河, 1896년 ~ ? , 6·25때 납북)
* 어머니 : 전인항(全仁恒)
** 부인 : 정희자(鄭姬子, 1940년 2월 20일 ~)
*** 장남 : 김선재(金善宰, 1967년 ~ 1990년 11월 21일)
*** 차남 : 김선협(金善協)
*** 삼남 : 김선용(金善勇)
== 생애 ==
=== 유년기 ===
광산김씨 김우중은 [[1936년]] [[12월 19일]]에 [[대구광역시|대구]]에서 김용하와 전인항 사이의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으로 아버지가 납북되자 15세에 홀어머니 아래서 소년가장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게 된다. 휴전 후 상경해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 진학하고 1956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학창생활을 보냈다.
=== 대우실업 설립 ===
[[1960년]] 25세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까지 [[한성실업]]에서 근무하다가, [[1967년]] 32세에 [[서울특별시|서울]] [[충무로]]에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자본금은 500만원이었지만, [[동남아시아]],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여 [[1970년대]] 초반부터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창설하며 [[1974년]]에 1억불의 수출탑을 달성하는데 성공하며 신흥 재벌이 되었다. [[1981년]]에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1982년]] [[1월]]에는 (주)[[대우]]를 출범시키며 재계 4위에 올랐다.
[[1989년]]에 펴낸 자서전인《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출마하려 했으나 [[김영삼]]의 압박으로 불발되었다. [[1993년]]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선포하였고 또한 김우중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1990년]] 장남 선재를 잃고, [[1996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위기를 잘 넘기며 [[대우그룹]]을 [[1998년]]에 재계 2위로 이끌며 성장시켰다.
=== IMF로 인한 대우그룹 해체 ===
그러나 [[1997년]] [[IMF 구제금융사건|IMF 구제금융]]으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한 여파로 부채비율이 400% 이상이었던 [[대우그룹]]은 쌍용을 인수하는등 확장정책을 이어나갔지만 [[일본]] 노무라 증권이 [[1998년]] [[10월 25일]]에 발표한 '[[대우인터내셔널|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보고서 1장으로 사실상 [[대우그룹]]이 위기를 맞게 된다. 후에 계열사를 41개에서 4개업종 10개 회사로 구조조정 단행과 [[삼성그룹]]과의 빅딜도 추진하나 둘다 실패했다. [[1999년]] [[8월 26일]] 이미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중 16개가 매각되었고 남은 25개 회사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하였다. 당시 부채는 500억 달러였다. 당시 [[대우그룹]]은 금융부문을 중점으로두고 사업확장을 하여 내부적으로 부채가 많았다. 사실상의 그룹 해체였다. [[1999년]] [[11월 1일]] 김우중은 13명의 [[대우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경영포기 및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출국한 후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 호화롭게 생활을 했다는 주장과, 반대로 [[유럽]] 등지의 3류 호텔에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어렵게 생활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대우그룹]]은 당시 [[김대중 정부]]가 정치적으로 탄압했다는 설과 단순한 [[구조조정]] 실패라는 의혹이 있다.
=== 대우그룹 해체 이후 ===
5년 8개월 간의 해외로 도피 생활을 지속하다가, [[2005년]] [[6월 14일]] 입국하여 [[대한민국 검찰|검찰]]의 조사를 받았으며,[[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61640 관련기사]][[2006년]] [[11월 3일]] 열린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 9천 253억원의 형을 구형받았고, 항소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2007년]] [[12월 31일]] [[사면|대통령 특사]]로 사면되었다. [[2014년]] 기준으로 전체 추징금의 0.5%정도인 약 887억원을 납부하였다. [[2013년]] 김우중법에 대해 논란이 일었고, 여전히 17조 8000여억에 달하는 추징금을 미납한 상태이다. [[2014년]] [[대우그룹]] 창립 기념일에 추징금 문제가 불거져 참석하지 못했다. 그해 [[8월 26일]]에 [[대우그룹]] 해체 15주기를 맞아《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라는 회고록을 출간하였다.
==각주==
{{전임후임
|전임자 = (창업)
|후임자 = (폐지)
|대수 =
|직책 = [[대우그룹]] 회장
|임기 = [[1982년]] [[1월]] ~ [[1999년 11월]]
}}
{{전임후임
|전임자 = [[최종현]] ([[SK]] 회장)
|후임자 = [[김각중]] ([[경방]] 회장)
|대수 = 25
|직책 =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임기 = [[1998년]] ~ [[1999년]]
}}
{{전임후임
|전임자 = [[이종환 (축구인)|이종환]]
|후임자 = 김우중
|대수 = 45
|직책 = [[대한축구협회]] 회장
|임기 = [[1988년]] [[2월 17일]] ~ [[1989년]] [[2월 21일]]
}}
{{전임후임
|전임자 = 김우중
|후임자 = [[정몽준]]
|대수 = 46
|직책 = [[대한축구협회]] 회장
|임기 = [[1989년]] [[2월 21일]] ~ [[1993년]] [[1월 12일]]
}}
{{전거 통제}}
[[분류:193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광산 김씨]][[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연세대학교 상경대학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한축구협회 회장]][[분류:대우그룹]][[분류: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훈장 수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