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金雨英, 일본식 이름: 金雨英, [[1886년]] [[10월 23일]] [[부산광역시]] ~ [[1958년]] [[4월 16일]])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로, 화가의 남편이었다.{{뉴스 인용 |저자=정운현 |제목=일본판 개천절 '기원절'에 초대받은 '충성스런' 친일 조선인들의 면면들 - [집중기획2] 발굴자료 <광영록>에 실린 친일파들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8599 |출판사=오마이뉴스 |날짜=2002-03-08 |확인날짜=2008-07-01 }} 아호는 청구(靑邱)이다. == 생애 ==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시]] 출신이며 일본의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에 유학했다. [[1916년]] 첫 부인과 사별했고, 당대의 신여성이자 미술학도로 [[도쿄]] 유학생이었던 나혜석과 만나 [[1920년]] 결혼했다. 김우영은 당시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변호사로 일하던 촉망받는 청년 지식인이었기에, 나혜석과의 연애와 결혼은 크게 화제를 뿌렸다. [[1921년]]부터는 일본 외무성의 외교관으로 [[중국]]에서 근무하였는데, 임기를 마치고 나혜석과 함께 부부동반 세계 일주 여행을 한 사실도 널리 알려질만큼 화제였다. 그러나 2년 가까이 걸린 이 세계 일주 여행 중 일어난과 나혜석의 염문설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1918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변호사로 근무하면서부터 최린 등과 함께 차츰 자치론에 입각한 친일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친일은 1930년대 들어 [[충청남도]]의 도 참여관과 산업부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부터로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도 임명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저서로 논설과 회고를 담은 《민족공동생활(民族共同生活)과 도의(道義)》(신생공론사, 1957)가 있다. 두 번째 부인인 나혜석과는 [[파리 시|프랑스 파리]]에서 발생한 최린과의 불륜 사건을 이유로 [[1930년]] 이혼했으며, 두 사람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 아들인이 [[한국은행]] 제17대 총재를 지냈다.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정규웅 |제목=나혜석 평전 |날짜=2003-12-18 |출판사=랜덤하우스코리아 |출판위치=서울 |id={{ISBN|9788957572283}} }} * 차범석, [https://web.archive.org/web/20071007055511/http://www.wolganmisool.com/200002/exhibition_02.htm 불꽃 속에 타죽어 버린 한마리 불새] 《월간미술》 (2000년 2월호) == 각주 == [[분류:1886년 태어남]][[분류:1958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변호사]][[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나혜석]][[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교토 대학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