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관'''(金容瓘, 1897년 3월 21일-1967년)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공학자, 민족운동가다. 호는 '''[[장백산]]'''(長白山). 서울 출신으로를 1918년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일본에서 유학했다. 귀국 이후 [[중앙공업시험소]]에서 근무했다. 1924년 10월 1일, 경성고공 동문들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써 조선의 기술적 자립을 목적으로 한 발명진흥운동을 제창하여 [[발명학회]]를 설립, 그 지도자로 활동했다. 발명학회가 기금 부족으로 활동을 중단한 뒤 1932년 민족변호사 [[이인]]을 변리사로 영입하여 발명학회를 부활시켜 무학의 자수성가형 발명가들의 특허·실용신안 출원을 돕는 일을 했고, 1933년부터 기관지인 《[[과학조선]]》을 발행했다. 발명진흥운동을 전국적 운동으로 만들고자 [[윤치호]], [[여운형]], [[송진우]] 등 사회 명사들을 영입해 1934년 4월 19일 [[과학데이]] 행사를 개최했다. 이후 과학데이 행사가 1934년 7월 [[과학지식보급회]] 발족과 과학대중화운동으로 발전하자 과학대중화운동과 발명진흥운동을 모두 참여하며 대표적 민족공학자로 활동했다. [[경성방직]]이 총독부 지원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경성방직계열이 친일화되자 김용관의 과학대중화-발명진흥운동에 동조하는 반제비타협주의 세력이 물산장려운동의 후기 주류가 되었다. 1937년 [[미나미 지로]] 총독 부임 이후 일제의 지배가 적극적 동화정책으로 선회하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사회 분위기가 군국주의화되었다. 이 시기 과학지식보급회는 친일파들에게 잠식되고 발명학회는 [[제국발명학회]] 조선지부와의 경쟁에 밀려나게 되었다. 1938년 투옥된 뒤 김용관은 운동을 그만두고 황해도 재령으로 낙향해 중학교 교사를 지내며 은거했다. 운동 내부에서 가장 열성적인 민족주의자였던 김용관이 이탈하자 과학대중화운동과 발명진흥운동은 완전히 친일화되어 1940년 12월 26일 과학지식보급회와 발명학회는 [[과학보급협회]]로 통폐합되었다. 이후 김용관은 별다른 운동을 하지 못했다. 독립 이후 [[대한요업총협회]], [[한국요업학회]] 창립에 관여했다. == 참고 자료 == {{참고 자료 시작}} * {{저널 인용|date=1995|volume=17|저자=임종태|저널=한국과학사학회지|제목=김용관의 발명학회의 1930년대 과학운동|쪽=89-133 }} {{참고 자료 끝}} == 외부 링크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0009936|김용관(金容瓘)}} {{토막글|한국 근현대사}}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67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공학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