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필요|날짜=2013-5-1}} '''김온순'''(金蘊淳, [[1812년]] ~ ?)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 김씨 (신)|신안동]]이다. [[음서 제도]]로 관직에 올라 [[참봉]] 등을 지내고 [[1862년]] 문화현령으로 부임한 이래 해주판관, 합천군수, 순창군수, 담양군수, 해주군수, 밀양부사, 수운판관, 임실군수, 진주목사, 청주목사, 안주목사, 다시 청주목사와 안주목사 등 20년간 지방관을 역임하고, [[1882년]] [[공조]][[참판]]으로 발탁되었다. 지방관으로 재직 당시 실적을 인정받아 여러 번 포상을 받았으며, 청주목사 처음 재직 시에는 통정대부로, 두 번째 청주목사 재직 중에는 1882년 1월에 가선대부, 1882년 4월에 가의대부로 승진하였다. 이후 공조참판,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등을 거쳐 [[1891년]] [[정헌대부]]가 되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최종 관직은 [[보국숭록대부]] 판의금부사에 이르렀다. [[김조순]], [[김달순]], [[김익순]], [[김옥균]] 등의 일족이었다. 서예가 겸 관료 해사 [[김성근 (1835년)|김성근]]의 아버지이며, 승지를 지낸 김병억의 할아버지이고,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자 자작을 역임한 [[김호규]]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송재 [[서재필]]의 양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 생애 == === 초기 활동 === [[1812년]]에 태어났으며 김이의(金履禕)의 아들이었으나 [[현감]](縣監)을 지낸 김이회(金履會)의 양자가 되었다. 김온순의 양아버지 김이회는 사후에 [[증직|증]]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지만, 양자 김온순의 출세로 다시 [[증직|증]] [[이조]][[참판]]. [[이조판서]]에 거듭 [[추증]]되었다. [[음서 제도|음서]]로 출사하여 [[1848년]] [[12월]] 명능참봉(明陵參奉)이 되었으나 [[1849년]] 상을 당하여 사퇴하였다. === 관료 생활 초반 === [[1852년]] [[6월]] 헌릉참봉(獻陵參奉), [[12월]] [[사옹원]]봉사를 지냈다. [[1853년]] [[12월]] [[예빈시]][[직장]]과 [[사옹원]][[직장]], [[1855년]] [[6월]] [[장원서]][[별제]], [[한성부]][[주부]]가 되었다가 [[7월]]에 다시 상을 당하여 사퇴하였다. [[1857년]] [[12월]] 빈전도감의 낭청으로 참여하여 특별히 승진서용되었으며, [[1859년]] [[12월]] [[빙고]]별제가 되었다. [[1860년]] [[3월]] 다시 [[장원서]][[별제]]가 되었다가 [[5월]] [[한성부]][[주부]], [[9월]] [[사직서|사직서령]], [[10월]] [[돈녕부]][[판관]]을 지냈다. === 지방관 생활 === [[1861년]] [[6월]] [[종친부]]전부(典簿), [[1862년]] 음력 윤 8월 문화현령(文化縣令)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해주판관(海州判官)으로 나갔다가 [[1865년]] [[1월 7일]]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갔다가 종3품으로 승진했다. 그해 [[5월 23일]] 순창 군수(淳昌郡守) 이승락(李承洛)과 직책을 교체하여 그가 [[순창군|순창]][[군수]](淳昌郡守)로 부임하였다. [[1866년]] [[2월]] [[조선 고종|고종]]의 왕비 간택 때 그의 딸 중 한명도 간택대상자에 해당되었으나 그는 병을 이유로 [[예조]]를 통해 간택에 불참하였다. [[1866년]] [[6월]] 선정으로 별천되기도 했다. 그해 [[6월 18일]] 선치를 베푼 지방관들을 포상할 때 활과 화살과 통개(筒箇)를 [[조선 고종|고종]]에게 선물로 하사받았다. [[1868년]] [[8월 24일]] [[담양]]부사(潭陽府使)로 부임하였다. 담양 부사로 재직 중에는 세금을 크게 줄여 칭송을 받았다. [[승정원 일기]] 계목에 의하면 그가 '백성에게 거두어들이는 것을 줄이지 않은 것이 없고 상납목(上納木)을 시가(市價)보다 줄였으며 해장죽(海長竹)은 그 잡비(雜費)를 제거하여 가는 곳마다 혜택을 입혔으므로 아직도 인자한 유풍(遺風)을 볼 수 있습니다'라는 [[이조]]의 보고가 올라가기도 했다. [[1872년]] [[7월 16일]]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다가 다시 [[해주]][[군수]]가 되었다. [[1874년]] [[7월 12일]] [[밀양]][[부사]](密陽府使)를 거쳐 [[11월]] [[수운]][[판관]]으로 내직으로 돌아왔다. [[11월 13일]]에는 황해도 암행어사(黃海道暗行御史) 조병필(趙秉弼)이 그가 해주판관으로 있을 때 군호(軍戶)가 고르게 보급되었다고 치적을 보고하여 특별히 [[통훈대부]]로 승진하였다. [[11월 27일]] [[수원부]] [[판관]]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1875년]] [[9월]] 부모의 병으로 사직을 청하는 임실 현감(任實縣監) 민두호(閔斗鎬)를 배려하여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특별히 임실현감 민두호를 수원부판관으로 임명하고 김온순을 [[임실]][[군수]]로 임명해 내려보냈다. [[1876년]] [[12월]]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진주목사로 재직 중 조정에 바칠 공물의 수가 적자, 김온순은 무리하게 거두지 않고 차라리 자신의 녹봉을 감하여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이를 안 [[이조]]가 계목을 올려 그를 치하하였다. {{인용문2|사환미 1460석을 자신의 녹봉을 덜어서 정해진 숫자대로 입본하였습니다. 위의 두 고을 수령에게는 숙마(熟馬)를 하사해야 하겠습니다.|승정원일기 고종 14년 정축(1877년, 광서3) 8월 21일(계묘) 좌목}} 고종은 지방관 인사 실적과 암행어사들의 계본을 보고는 "전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온순(金蘊淳)은 과연 잘 다스렸구나."하고 칭송하기도 했다. [[1878년]] [[4월 26일]] [[청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879년]] [[8월]]에는 [[선혜청]]으로부터 정공(正供)으로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가장 낮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했지만 [[조선 고종|고종]]이 알아서 하겠다 하고 무마시켰다. 청주목사 재직 중 [[1879년]] [[4월]] [[통정대부]]로 가자되고 [[7월]] [[안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880년]] [[1월]] 청주목사로 다시 부임했다. 두 번째 청주목사로 재직 중 두 번 승진했는데, [[1881년]] [[1월]] 시종신(侍從臣)의 아버지라 하여 특별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그해 [[4월]] [[약방]][[도제조]]를 겸임한 [[흥인군]] [[이최응]]의 특별 건의로 다시 [[가의대부]]로 승진했다. {{인용문2|청주 목사(淸州牧使) 김온순(金蘊淳)은 주군(州郡)을 여러 차례 맡아서 일찍이 명성과 공적이 드러났으며, 이 피폐한 고을에 부임한 지 1년 만에 포장(逋帳)에서 17만이나 되는 수량을 모두 추쇄하여 공화(公貨)가 기준량대로 완납될 수 있게 되었고 백성들의 병폐도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솜씨를 가진 자는 장려하는 법전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특별히 가자(加資)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흥인군]] [[이최응]]의 상소}} 이에 고종이 윤허하여 다시 청주목사 재직 중 가의대부가 되었다. === 정치 활동 === [[1881년]] 7월 29일 다시 안주목사가 되었다가 [[1882년]] [[9월]] [[공조]][[참판]]으로 발탁되었고, [[9월 14일]]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다. [[1882년]] [[8월 1일]]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가 다시 [[8월 27일]] [[공조]][[판서]]가 되었다. [[11월 20일]] 동지의금부사가 되고 [[11월 21일]] 겸 [[경연]][[특진관]]이 되었다. [[1883년]] 행[[호군]]으로 전임되었다가 [[8월 1일]] [[자헌대부]] [[한성부 판윤]]으로 발탁되었다가 [[8월 20일]] [[대호군]]으로 전임되었다. 상소를 올려 사직하려 하였으나 [[조선 고종|고종]]이 만류하였다. [[8월 27일]] [[공조판서]]를 천거할 때 [[조선 고종|고종]]이 특별히 3망까지 받았는데도 김온순의 이름을 더 넣어서 결국 그로 낙점하여 임명했다. [[9월 19일]] [[대호군]]으로 다시 전임되었다. [[1884년]] [[5월]]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그해 [[12월]]의 [[갑신정변]] 사건으로 사직소를 올리고 지방으로 내려가 있었다. [[1885년]] [[5월 29일]] [[동지의금부사]]가 되고 그날 다시 [[지의금부사]]가 됐다. 그러나 병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었으므로 [[의금부]] 회의에 소집할 수 없었다. === 생애 후반 === [[1888년]] [[4월 29일]] 다시 지의금부사로, [[5월 12일]]에는 [[대호군]]이 되었다. [[1891년]] [[1월]] 행 [[호군]]으로 전임되었다가 80세의 고령으로 특별히 은전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해 [[1월]] 지돈녕부사에 제수되고, [[4월 24일]] 다시 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다. [[1892년]] [[2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92년]] [[5월 22일]] [[내금위]][[대호군]]이 되고, 대호군 재직 중 그해 [[11월 5일]] 전직 [[승정원]][[승지]] [[김병억]](金炳億)의 할아버지라는 이유로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 그날 [[상호군]]에 임명되었다. [[1893년]] [[2월 19일]] 다시 판의금부사가 제수되었다. 최종 관직은 [[보국숭록대부]]에 이르렀다. == 가족 관계 == * 할아버지 : 김방행(金方行) ** 아버지 : 김이회(金履會) *** 부인 : ? **** 장녀 : 안동김씨 **** 사위 : [[서광하]](徐光夏) ***** 외손자 :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 ****장남 : 김완근(金完根) *****손자 : 김병억(金炳億) **** 차남 : [[김성근 (1835년)|김성근]](金聲根, 1835년 양력 3월 19일~1919년 양력 11월 27일) ***** 손자 : [[김병칠]](金炳七) ***** 손자 : [[김병팔]](金炳八) == 관련 항목 == * [[서재필]] * [[김병억]] * [[김성근 (1835년)|김성근]] * [[김호규]] [[분류:1812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음서]][[분류:서재필]][[분류:안동 김씨 (신)]][[분류:서울특별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