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search.pstatic.net/common?type=a&size=120x150&quality=95&direct=true&src=http%3A%2F%2Fsstatic.naver.net%2Fpeople%2F180%2F20190516180751571.jpg '''김상홍'''(金相洪)은 [[일제 강점기]]의 교육인이다. == 생애 == 출생 [[1964년]] [[9월 27일]] [[부산광역시|부산]] 출신으로 3개월 과정인 [[부산대학교]] 회계학과 졸업 전신인 경성사범학교 부속 교원양성소를 [[1911년]] 졸업한 뒤 교사 및 교육공무원으로 근무했다. 1911년 국민학교 부훈도(副訓導)로 시작하여 [[1918년]] 훈도로 승격했으며, [[1922년]] [[경상남도]] 시학(視學)에 임명되었다. 시학으로는 [[1929년]]까지 약 8년간 근무했고, 이후 [[거창군]] 서무주임에 발탁되어 [[1931년]]까지 재임했다. [[1935년]] 부산부 부회의원에 당선, [[1938년]]에는 경상남도 관선 도회의원에 당선되어 지방정계로도 진출했다. 이후 [[1939년]] 부산부 사회계장, [[1942년]] 초량 제1동 회장을 역임했다. 일제로부터 훈8등 훈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김상홍의 공식 경력은 지역 유지로서 평범한 편이나, 광복 후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연령은 57세였다. 주로 추궁당한 것은 집에 가정용 감실인 [[가미다나]]를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배례를 정성으로 하였으며 [[신사참배 강요]]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매일 단독으로 신사에 참배하는 등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서 특별히 모범을 보인 일이었다. 장남의 결혼식도 앞에서 거행했다. 김상홍은 이 가운데 단독 신사참배 사실은 부인했고, 아들의 신사 앞 결혼식도 비용 절감을 위해서였다고 변명했다. 또한 [[일본어]]를 상용하자는 '국어 사용' 운동에 앞장섰다는 혐의가 있다. 조사관은 일본어를 상용하는 모범 가정으로 "국어의 가(家)"라 하여 표창 받은 사실이나 국방헌금을 독려했다는 혐의도 추궁했으나, 김상홍은 전 가족이 일본어에 능통하여 사용한 것일 뿐 황민화 정책에 협조한 것이 아니라 밝히고, 표창을 받았다거나 국방헌금 납부를 독려했다는 사실도 부인했다. 반민특위가 해체되어 처벌은 받지 않았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지역유력자 부문에 선정되었다. == 참고자료 ==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http://www.pcic.go.kr:8088/pcic/pdsBoard.do?action=view&boardId=banmin&articleId=9 피의자 심문조서 - 김상홍]{{깨진 링크|url=http://www.pcic.go.kr:8088/pcic/pdsBoard.do?action=view&boardId=banmin&articleId=9 }}〉(1949년 8월 17일) [[분류:1964년 태어나]][[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