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호'''(金尙昊, [[1889년]] ~ [[1965년]])는 [[일제 강점기]]의 [[불교]] 승려이다. == 생애 ==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 출신으로 본관은 [[김녕 김씨|김녕]]이다. [[1905년]] 출가하여 [[문경시|문경]] 경흥강숙을 수료하였고, [[1918년]] 범어사에서 성해(性海) 화상의 법맥을 이으며 해명(海明)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9년]] [[3·1 운동]] 때 불교계는 [[한용운]]을 중심으로 [[불교중앙학림]]의 청년 승려들이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때 [[김법린]]이 동래 [[범어사]]로 파견되어 동래읍의 만세시위를 조직했는데, 당시 범어사의 젊은 승려였던 김상호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군자금을 모금해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했다. 3·1 운동으로 투옥된 한용운이 [[서대문감옥]]에서 〈조선 독립의 서〉라는 문건을 몰래 작성했을 때 이를 빼돌려 《[[독립신문 (대한민국임시정부)|독립신문]]》에 싣도록 한 사람도 김상호였다. 3·1 운동 이후 김상호는 불교 청년 운동의 기수로 떠올랐다. [[1922년]]에 불교계 개혁 세력인 [[불교유신회]]가 중심이 되어 당시 대표적인 비리 승려로 지탄을 받고 있던 [[강대련]]을 명고축출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김상호는 주동자로 꼽혀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29년]]에는 [[조선불교승려대회]]를 조직했고, [[1930년]] 비밀결사인 [[만당 (불교)|만당]]을 결성하는 등 점차 명망을 높였다.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 기관지 《불청운동》을 창간해 편집인 및 발행인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36년]]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신임이사로 선출되어 제도권에 진입한 뒤에는 [[조선총독부]]와 가까이 지내며 [[중일 전쟁]]에 협조한 행적이 있다. 이사가 된 해에 [[미나미 지로]] 신임 총독을 환영하러 [[서울역|경성역]]에 나간 것을 시작으로, 일제 관료들과 수시로 만나면서 [[일본군]] 부대 송영, 일본군 전병사자 위령 법요식, 시국강연회, 전사자 유골 맞이와 장례식, 전사자 가족 조문 및 전상자 가족 위문, 국방헌금과 위문금 모금, [[신사참배 강요]]에 따른 신사참배 등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불교계를 대표하여 일본군을 직접 위로하기 위한 북지황군위문사를 선정해 파견한 일도 있다. 북지황군위문사는 승려 3인 외에 악사 3인을 대동하여 파송했는데, 6천원이라는 거금의 경비가 들었고 31대본산이 분담해 냈다. 이 과정은 모두 총독부와의 긴밀한 공조로 이루어졌으며, 김상호가 주도적으로 실무를 맡았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식에도 불교계 대표로 참석했다. [[1938년]] 서무이사직에서 사임한 뒤 광복 후인 [[1946년]] 총무원 소속 포교사로 취임할 때까지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기간 중 만당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붙잡혀 복역했다는 설이 있다. 1950년대 불교 정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대처승]] 측 대표를 맡은 기록이 있으며, [[1964년]]에는 《대한불교》에 3·1 운동 때의 공적을 기록한 회고문을 게재한 일이 있다. == 같이 보기 == * [[범어사]]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임혜봉 |제목=친일 승려 108인 |날짜=2005-03-01 |출판사=청년사 |출판위치=서울 |id={{ISBN|978-89-7278-384-8}} |장=김상호 : 항일 투사에서 친일로 변절한 중앙교무원 서무이사 |페이지=503~522쪽 }}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7KOR_A1889_1_0001794|김상호|金尙昊}} [[분류:1889년 태어남]][[분류:1965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승려]][[분류:대한민국의 승려]][[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동국대학교 동문]][[분류:한용운]][[분류:김녕 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