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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화(코미디언)

김미화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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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미화(金美花)
출생 1964년 9월 22일(age(1964-09-22)세)br경기도 용인시 [1]
신체 154cm, 42kg, A형
학력 서울우이초등학교br신경여자중학교(현 선덕중학교)br 신경여자상업고등학교(현 세그루패션디자인고등학교) (졸업)br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학사)[2]br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커뮤니케이션학과 광고홍보전공br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예술철학전공
데뷔 1983년 KBS 개그콘테스트
가족 어머니, 여동생br남편 윤승호, 아들 윤진희 (2000년생), 윤유림 (2002년생)
취미 등산, 노래 부르기
특기 모창, 말 빨리 하기
별명 순악질여사
포인트 큰 입
종교 개신교(장로회) → 천주교(세례명: 로사)

목차

소개

나는 항상 여성이 주도하는 코미디 연기도 충분히 훌륭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보여주었다.

대한민국의 여성 코미디언이자 방송인.
연예계 대표적 폴리테이너 중 1인.
2018년 현재 '동해북부선 연결 공동 위원장'.



유년 시절

김미화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킨 프로인 쓰리랑 부부에서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던 것이 사람들의 뇌리에 깊히 박혀 있어서 전라도가 고향인 것으로 흔히 오인되지만, 실제 고향은 경기도/서울이다. 서울 수유리 빈민촌에서 자랐다. 기존에는 출생지가 서울특별시로 기재되어 있었지만, 실제 출생지는 경기도 용인시 신갈이다[3]. 신갈에서 태어난 후 다음해에 서울 수유리로 이사와서 수유리와 미아리 쪽에서 성인이 될때까지 쭉 자랐다고 한다. 어릴적 내내 수유리와 미아리 지역에 있는 하천 다리 근처에 당시 빈민들이 거주하던 무허가촌에서 살았다고 한다.[4][5] 천지천이 자신이 어릴 때 주로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는데 너무 자주 이사를 해서 집이 헷갈릴 정도였다고 한다. 셋집을 살다가 이유도 모르게 쫓겨나서 마당에서 비닐 장판을 깔고 잤던 적이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지독하게 가난하여 단한번도 행복했던 기억이 없었다고 한다. 일곱살 터울의 동복 친여동생이 있다. 그러나 나이차가 많이 나서 어릴 때 집안일은 김미화가 도맡아 도왔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을 웃기는데 재능을 보여 동네사람들의 관심을 차지했다고 한다.

친아버지(故 박상복)의 성이 박씨다. 김미화의 친아버지는 이미 본처와 결혼을 한 상태였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한 채로 동거했다고 한다. 호적 등록을 할 때 김미화 자매를 호적상 정상적인 가정에 자녀들로 살게 하려고 아버지 박씨와 본처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로 호적등재를 했다고 한다.[6] 때문에 아버지 박씨의 본처가 김미화의 법적인 어머니가 되었고, 김미화와 친모는 법적으로 남이 되었다. 김미화의 어린 시절 본명도 박미화였다. 아버지의 직업은 엿장수였는데, 폐질환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2학년때에 심한 폐질환을 앓던 친부와 호적상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김미화 자매는 법적으로 고아가 되었다. 김미화의 친어머니(김씨)는 법적 고아가 된 자신의 딸들과 한 호적을 가지려 했다. 그러나 김미화 자매와 모친은 법적으로 남남인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김미화의 호적에 어머니가 오를 수는 없는 일이고 어머니 호적에 자매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자녀가 어머니의 호적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은 아버지를 모르는 미혼모의 자녀이거나 외국인 아버지를 둔 케이스. 그래서 어머니는 미혼모가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을 낳아 뒤늦게 출생신고를 한 것처럼 하여 관청에다 출생신고 지연 과태료를 내고 미혼모의 자녀로 김미화 자매를 자신의 호적에 올렸고(이중신고?) 법에 따라 어머니의 성씨를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7]

김미화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해장국집을 거들면서 자랐다. 그러나 청소년기에 어머니와 갈등이 많았던 모양인데 어머니가 거의 패는 수준으로 때려서 많이 맞고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김미화도 지지 않는 성격이었는지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재혼하려 하자 결사 반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혼 시에도 새아버지쪽 집안 문제가 복잡해서 김미화의 어머니는 결국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김미화는 새아버지와 법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었고 어머니의 호적에 올라있는 상태가 결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중에 김미화는 결혼할 때 호적을 떼면 집안사가 다 드러나기 때문에 많이 걱정하고 있다가 결국 결혼 전에 남편될 사람에게 모두 다 털어 놓았다고 한다.

활동 내역

1기: 데뷔에서 전성기 쓰리랑 부부까지

신경여상에 입학한 후 학교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아르바이트도 있었으나, 개그맨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지인을 통해 방송국 보조출연(엑스트라) 아르바이트도 하였다고 한다. 코미디에 대한 꿈을 결코 버릴 수 없었던 그녀는 상고 졸업을 앞둔 1983년 제2회 KBS 개그콘테스트에서 이정문[8]과 함께 '사부와 석순이'라는 개그로 은상을 수상하면서 공채 2기 개그우먼으로 데뷔했다.

당시 딸이 졸업 후 바로 취업하기를 원하시던 어머니는 저녁식사 중에 KBS '생방송 오늘'에서 그녀가 개그콘테스트 수상자로 나온 걸 보고 매우 놀랐고, 돌아온 그녀를 때리고 화를 내며 말렸다고 한다. 말린 이유에 경제적인 부분도 컸지만, 그녀의 모친이 사실 가장 중요하게 걱정한 것은 '연예계 성상납'이었다고 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여성이던 딸이 그런 것에 휘말릴까봐 용납할 수 없었다고한다.

그러자 김미화는 "6개월 안에 개그우먼으로써 확실한 위치에 가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 그만두겠다고 약속하겠으니, 그동안만 지켜봐달라"고 하여 어머니를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데뷔한 뒤 생각외로 빠른 시일내에 큰 인기를 얻고, 수입도 커지게 되자 어머니는 오히려 응원하는 입장이 되었다고 한다.

데뷔 직후 KBS '젊음의 행진'에서 활약하면서 '유머 일번지'까지 진출하며 점점 입지를 다져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인기가 더 올라가자 다른 여러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게 된다. 본인 스스로 당시를 회고하면서 '나는 당시 신인 중에서 가장 욕심이 많은 신인이었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수많은 아이디어를 연구하고, 어마어마한 연습을 하며 철저하게 노력했다고 한다. 이 욕심이라는 것은,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가 개그계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여성 코미디언들은 프로그램에서 주도하는 역할은 별로 하지 못하고 주로 받쳐주는 역할이었고, 그에 대한 불만이 있던 김미화가 그런 관습을 극복하여 '여성이 주도하는 코미디 연기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주고 싶다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1986년에는 7살 연상의 사업가와 결혼하게 된다.

1988년부터 김한국과 콤비를 이뤄 쓰리랑 부부에 출연했는데, 국악 판소리에서 모티브를 따와 국악인 신영희씨의 북소리에 맞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연기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프로가 큰 인기를 얻으며 전국적으로 유명한 코메디언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쓰리랑 부부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이 코너의 인기에 힘입어 1990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KBS 코미디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때가 코메디언으로서 김미화의 전성기였다.

2기: 90년대 코미디의 전환기

SBS 개국과 함께 SBS에서도 활동하다가 KBS에서 프로그램 제안을 받고 1995년 말부터 코미디 세상만사에 출연하게 되었다. 거기서도 코미디 방송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밤 10시에 '시작하는' 심야 코미디 영역에 맞는 새로운 형식을 개척한다. 당시에 지상파 코미디 방송은 대부분 7시에 시작해서 8시에 끝나는 게 정석이었고, 늦게 하더라도 10시 이후에 끝나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지금보다 수위가 강하지는 않았지만 '성인 대상 코미디'의 지상파 진입 역시 이 프로그램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김미화는 이 방송에서 '이 밤의 끝을 잡고'라는 코너를 통해 일반 유명 남자 연예인과 부부 설정으로 상황극을 하면서도 간간히 그 연예인의 실제 생활에 대한 토크를 섞어 새로운 형식을 추구해서 인기를 얻었다. 이재룡, 설운도, 현철, 이덕화, 최수종 등 코미디 방송에서 잘 나오지 않던 연예인들이 그녀의 남편 역할로 매주 출연해서 재미를 주었고 김미화에 대한 평가와 인기 역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또한 '사미인곡' 코너에서는 목욕탕 사우나에서 4명의 아줌마들이 수다를 떠는 포맷으로 재미를 주었고, 평범한 조연배우에 불과했던 전원주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90년대 후반 기존의 꽁트 코미디가 완전히 사장되는 위기에 직면하자 백재현, 전유성과 함께 초대 개그콘서트의 시작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개그콘서트 자체가 실험적 코미디를 무대에 올림과 동시에 신인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등용문의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은 신인들만으로 꾸려가면서 때 되면 밀려난다 김준호 김대희 박성호는 뭐져 위에 서술되어 있는 코미디 세상만사 또한 성인용 심야코미디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시도였고, 개그콘서트가 중간급 신인들의 메인 무대가 되자 이번에는 완전 신인 발굴을 위한 심야프로인 개그사냥을 런칭하기도 했다. 초반 개그사냥에서는 최종 선발 과정으로 김미화 본인과 '삼순이 블루스'라는 단막코너 연기 무대를 선보여야 하는 미션이 있었다.

다만, 메인 MC로 참여한 프로그램들은 대거 1년을 넘기지 못한 적이 있는데 토요일이 온다, 웃는밤 좋은밤, 가족만세 등이 대표적이었다[9].

3기: 소셜테이너

90년대 후반 김미화는 개그콘서트의 시작을 주도하면서 현장에서의 역할에서 물러난다. 이 부분은 사실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데 타의로 인해 밀려난 부분이 크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김미화는 대학원 진학 후에도 개그콘서트에 참여했으나 새로온 연출자가, 김미화가 이전에 이미 모든 개그콘서트팀과 상의하에 동의를 다 받고 갔다 온 대학원 수업 이후 회의에 몇분이라도 늦게 오면 그런 날마다 미리 다 기록을 해 둔 뒤에 어느 날 "선배님, 그동안 회의에 어느날 5분 어느어느날 15분 지각하셨습니다. 이대로는 방송 준비에 계속 지장을 주실 수 있으니 이제 그만 나와주셔야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개그콘서트에서 하차를 종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실제 준비에 그리 치명적인 시간이었던 게 아니었고, 실제로 그녀가 그로 인해 방송공연 준비에서 큰 문제를 발생시킨 적이 없다는 부분에서 김미화는 억울함을 느낌과 동시에 그 순간 그 피디가 자신을 애초부터 하차시킬 목적을 가지고 상황을 계획했다는 듯한 생각이 확신에 가깝게 들었다고 한다. 그 전에 어느 상황에서 그 피디와 갈등이 있었거나 했는지는 그녀가 추후 뒷소문을 듣지도 못했고, 그 피디가 직접 말해준 부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녀는 모른다고 한다. 실제로 큰 갈등은 없었던 걸로 보이지만 개그계 대모이자 개그콘서트의 창립구성원으로서 워낙 큰 권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김미화의 의견과 피디의 의견이 갈렸을 때, 김미화와 의견이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채택되거나 하여 불만이 생겼을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냥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 수도

처음에는 따지고 항의도 해봤지만 일단 약점이 잡힌 이상 더 이상 대화가 안 되어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녀는 꽤 충격을 받고 개그콘서트를 떠나 방송활동은 거의 하지 않으며 쉬다가 소셜테이너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났다고 하기는 어렵다.

2000년에는 KBS, MBC, SBS 3사를 아우르는 코미디언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냈다. "개그맨들의 위상뿐 아니라 출연료를 높이는 데도 조직의 힘은 컸어요."라고 회상했다. #

2001년에는 늦깎이로 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하여 뒤늦게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김미화는 '자기 추천 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했는데, 당시 김미화 외에도 배용준, 정재환, 차승원, 박주미 등 여러 연예인들이 자기 추천 전형으로 성균관대에 입학했다. 그런데 자기 추천 전형은 최저 학력 기준조차 없었기 때문에 연예인들에게만 특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 김미화가 입학한 이듬해인 2002년 3월 성균관대 학내 신문은 연예인들이 자기 추천 전형을 이용해 최저 학력 기준조차 없이 손쉽게 입학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고 이에 학교 측은 최저 학력 기준을 도입하여 연예인들의 무분별한 입학을 지양하겠다고 밝혔다. #

김미화는 성균관대에 들어간 이후부터 점점 개그계 바깥의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2003년 MBC 라디오의 시사프로그램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진행을 맡게 되었는데, 개그맨의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시사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하다보니 자신도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시사문제 공부를 시작하면서 김미화는 본격적으로 소셜 엔터테이너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로 인해 김미화는 과거의 코미디 현장이 아닌 시사문제가 궁금한 평범한 아줌마인 MC, DJ라는 캐릭터가 확립되어 라디오 DJ및 MC로 활약했다. CBS에서 김미화의 여러분을 진행하기도 하고, 딴지일보 팟캐스트에서 나는 꼽사리다를 진행하는 등 시사 전문 MC로 활동하면서 아래 언급할 KBS 블랙리스트 파문 등을 겪기도 한다.

김미화는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2년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앞장서서 촛불시위를 이끌기도 했다. 여중생 압사사건 무죄 판결이 난 직후 이에 항의하는 방송 예술 연예인들이 항의 기자회견을 열었고, 김미화는 모두 발언을 통해 부시 미국 대통령의 사과, 소파 개정 등을 촉구했다. #

2003년 3월에는 양대 노총, 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이라크 파병반대 시위에 참여하여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김미화는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국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만약에 한다면 뭐가 민주사회입니까? 민주주의는 그게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 당시 1인 시위에는 가수 윤도현, 배우 변정수, 가수 신해철, 배우 정진영 등이 참여했다.[10] #

그밖에도 호주제 폐지 등에 적극 참여하는 등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50여개에 이르는 시민단체에서 시민운동을 했다. #

녹색연합(2002), 시민단체(2002), 유니세프, 국가인권위원회(2007~2011) 등 각종 단체의 홍보대사 등을 맡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이혼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2004년 4월 김미화는 18년 동안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살았다고 주장하며 이혼 소송을 제기하여 파문이 일었다. 그동안 김미화는 남편과 잉꼬부부로 알려져 있었기에 대중들에게 그 충격이 더 했다. 김미화의 남편은 명예훼손 혐의로 맞고소를 했다. 결국 2005년 1월에 합의이혼에 이르게 된다. 자녀의 친권과 양육권을 가져가면서 재산을 6대4로 분할했다.

2007년 1월 5일 5살 연상인 윤승호 성균관대 스포츠과학과 교수와 재혼하게 된다. 윤승호씨는 홍서범과 친구였는데[11], 김미화가 조갑경과 친했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2001년부터 알고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재혼에까지 이르게 된 것.

2016년 현재 몇 라디오 방송을 맡고 있으며, 출생지인 용인시 근처에 친환경 카페 <호미>를 열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접대하며 살고 있다.

한편, 김미화는 2007년 후반기 때 엑스포츠에서 방영될 예정이었던 골프드라마 <홀인원>에 캐스팅되어 정극 드라마 나들이를 할 예정이었으나 투자비 문제 때문에 편성이 불발되어 그녀의 첫 정극 드라마 출연이 무산되었다.

김미화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박선영의 고향 언니 역으로 나올 예정이었는데 박선영이 조연으로 나온 MBC 아들과 딸의 여주인공 이후남 역이었던 김희애는 김미화의 초등학교(우이)-중학교(신경여중)(현재 선덕) 후배이며 이 작품에서 이귀남 역으로 나온 최수종은 김미화가 신변상의 문제로 2001년 가을개편 때 하차한 KBS 2TV 쇼 파워비디오의 김미화 후임으로 발탁됐던 개그맨 김경식의 중학교(배재중) 선배다.

자녀들이 학생들의 돈을 뺏는 것을 보자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자식들이 미국 헐리우드 배우가 되어 돈 좀 땡겨오기를 바랬다고 한다.

출연 작품

방송

논란


방송 중립성 논란

시사프로 진행 시 중립성 논란에 여러차례 휩싸였다. 이에 김미화는 "완벽한 중립이란 건 누구도 절대 불가능하다."하다고 반박했다. 또 "(자신에게) 중립성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중립이 안 되니까 그런 것"이라며 중립성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

하지만 김미화 본인이 중립성 논란에 휩싸이는 이유는 중립을 지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중립이 불가능하다고 중립 자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규칙위반은 누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절도 같은 중죄가 허용되지는 않는다. 특히 김미화의 경우 공인이자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중립성 유지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차라리 나름 자신의 중립성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면 모를까 저런 반박은 논란 해소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논문 표절 논란

최근 일부 언론매체에서는 김미화가 2011년 성균관대 언론대학원에서 받은 석사학위 논문 '연예인 평판이 방송 연출자의 진행자 선정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 부분 표절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김미화는 2013년 3월 24일 오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저는 3월 25일 자로 시사프로그램 진행에서 내려오겠습니다"며 표절 논란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히고, 자진 하차하였다. 2013년 10월, 성균관대 측에서 김미화 씨의 논문이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표절 논문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정했다.# 하지만 성균관대는 김 씨의 논문에 일부 표절 문제가 있음도 밝혔으며 이 일부 표절 문제에 대한 조치를 대학원 위원회에 상정하겠다고 전했다. .#

그리고, 표절논란이 발생한 지 2년이 지난 2013년 3월, 김미화의 논문은 절대로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인용하는 과정에서 왜 재인용 표시를 제대로 하지 않았냐는 지적인데 그거라면 내 불찰이라고 인정한다"라고는 했으나, "하지만 이미 학계에서 누구나 다 아는 정평이 난 이론을 인용한 것이고, 그 이론을 내가 썼다고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매도당하는 것은 억울하다"고 밝혔다. 또한 "보도된 대로 내가 마치 여러 연구자의 논문을 동시에 표절한 것으로 몰고 나가는 것을 보면 너무 어이가 없고 형사고소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이런 식으로 의혹 제기만 해놓고 나중에 아니면 말고 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 기사는 <FTA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더니, 전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훌륭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단 말인가?"하고 놀라며 자신과 직접 토론을 하자고 제안했다.>라는 그녀의 주장이 나온지 1년쯤 지난 후부터 지속되고 있다.

KBS 출연금지 및 정치참여 논란

2010년 7월 6일 트위터를 통해 KBS 내부에 출연금지문건이 존재하고 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출연이 안 된다며 소위 'KBS 블랙리스트'에 대해 언급했다. 이에 대해 KBS는 김미화의 근거 없는 추측성 발언은 명예훼손에 해당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3개월간 공방을 벌인 양측은 그해 11월 KBS가 김미화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면서 일단락됐다. 더불어서 2013년 2월 27일 KBS 창사 40주년 특집 ‘개그 콘서트’ 녹화에도 참여해 1980년대 히트작 ‘쓰리랑 부부’를 재연하면서 KBS와의 악화되었던 관계는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정치코메디를 하는 것이 꿈이라고도 말하기도 했다. #

'진보-좌파적으로 편향된 정치색을 어필하다보니 중도, 보수 성향의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보는 상태'라는 서술이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라갔기에 외압을 받았다는 게 드러났다.

포이동 화재 조작 논란

2011년 10월 17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포이동 재건마을에 다녀와서 트위터에 손이 퍼런 할머니의 사진과 함께 "용역에 맞서다 방패에 찍혀 피멍이...", "우리 엄마라면 제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직도 먹먹합니다. 사람이 먼저입니다."라고 적었다.http://news.mt.co.kr/mtview.php?no=2011101811258233909&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 사실 해당 할머니는 용역들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진술은 했으나 퍼런 손은 치자나무 잎을 덧대어 생긴 것이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1286.html

2012년 국정원의 민간인 불법 사찰 논란 때 김제동과 함께 국정원으로부터 사찰당했다고 주장했다. #

2014년 변희재가 허위사실에 기초해 자신에게 '종북친노좌파'라고 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이에 법원은 변희재에게 "김미화에게 1천 300만원을 배상하라"라고 판결했다. 관련기사

"카페 호미" 미국산 소고기 사용, 내로남불 논란

카페 호미는 김미화가 운영하는 카페/레스토랑인데, 2008년 7월 8일 서울 MBC본사 광장에서 열린 제62차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와 방송장악 저지를 위한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과거가 있으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에서는 미국산 소고기를 사용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논란이 되었다.

논란 후에도 여전히 고급 미국산[19] 소고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

미국 수입산 쇠고기를 청산가리에 비유한 것으로 유명한 김규리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김규리는 '(30개월 이상 된) 미국소를 먹느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넣겠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문제는 2008년에 라스베가스에서 미국산 소고기를 사용하는 인앤아웃 햄버거를 먹고 있는 장면이 Mnet에 나왔고, 캡쳐가 발굴되면서 큰 비판을 받았다.

사실 관계 따위는 안중에 없고, 정치적 문제를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 도구로 사용하다 쓸모가 없어지면 토사구팽하는 일부 연예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녀는 열성적으로 광우병 선전을 하던 사람중 한 명이었다. 그래놓고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광우병 있다고 주장한 미국산 소고기를 사용하는 모습은 중도, 보수측에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행위다.

참고로, 그녀의 두 딸 모두 미국 명문대에 진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딸들을 미국산 소고기 천국인 미국으로 유학 보낸 것. 참고

제주 해군 기지 설립 반대 논란

진보좌파 진영에서도 흑역사로까지 대두될 정도로 내부적 병크로 논란이 많은 제주 해군 기지 설립 논란에 있어서도[20][21]김미화는 설립 반대측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때 설립 반대측이 여러가지 자폭들과 병크들신나게 까이고 있을때 해군기지 설립을 반대했던 이외수와 함께 보수, 중도 성향의 네티즌들에게 까였다.[22]

블랙리스트 논란

이명박 정부시절 블랙리스트 연예인으로 지정되어 불이익을 받았다는 의혹이 생긴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에게 분노를 표하면서 고소까지 한다고 밝혔다. 그 와중에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이 SNS에 김미화가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은 사진이 있다고 사진을 SNS에 올리며 '어이상실'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이후 기사화되었다. 이 기사를 토대로 블랙리스트가 말이 되느냐는 지적에 김미화는 앞에서 상주고 뒤에서 사찰하고 실화냐?며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그녀가 부적절한 행보를 보였다고 해도 블랙리스트에 등재되었다는 점이 정당화되거나 당시 정부의 죄가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 네티즌이 그녀의 행보를 비판할 수는 있다고 쳐도 엄연히 당시 여당 의원으로서 블랙리스트에 책임이 있는 정치인이 블랙리스트 건에 대한 지적을 개인의 치부를 들먹이며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점은 정당화되기 힘든 부분.

정리하자면, 단지 사진을 공개한 정진석 의원의 행동에 의문이 든다면, 그만큼 그녀 역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에게서 직접적으로 표창장을 받아 놓고, 그 사진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이명박 정부에게 핍박받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정작 사진이 공개된 후에는 앞에서는 표창, 뒤에서는 사찰이라는 식의 발언으로 자신은 여전히 핍박을 받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공인으로서의 억울함이나 분노보다는, 특정 정치권에 대한 지극한 반발로 인해 한쪽으로 편중된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지나치게 강조하며, 그쪽의 성향에 맞추어 언론인이라는 지위를 획득하고자 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만 하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중계 및 인종 차별

수준낮은 올림픽 개막식 중계로 시청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이미 스포츠 중계 경력도 없고, 그렇다고 무한도전에서 올림픽 중계에 도전했을 때처럼 무언가 관심을 환기하는 이벤트도 아닌데 아무 상관없는 코미디언인 그녀가 중계에 낙점된 것을 들어 의아해하는 반응이 많았고 블랙리스트 논란의 대표 피해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상징성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평가가 많았다.

마찬가지로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던 김규리 또한 평창 올림픽 홍보영상의 내레이션과 올림픽 리셉션의 사회 역할을 담당했는데 과연 그 정도의 역할을 맡을 수준인지에 대해 의문인 상황이다. MBC 나름의 이미지 쇄신책이랍시고 내놓은 것이겠으나 오히려 역효과만 잔뜩 불러일으켰다. 거기다가 사전 조사 없이 해설 중계에 참여한 것처럼 중계 내내 이어진 전문성이 떨어지는 수준낮은 중계, 편향성을 드러내는 중계로 인해 비난을 받았다.

이미지 쇄신책으로서 초빙한 인물인데도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눈 구경도 못했을 사람들이 한국인들도 모르는 작은 산골 동네에 오는 행사라고 생각했는지 평창을 한국인들도 모르는 작은 동네라 발언했는데, 평창은 이미 국민들의 대표적인 동계 레저 컨텐츠인 스키장들로 유명한 곳이고, 한국지리를 배운 사람들에게도 '대관령 일대의 고랭지 농업 및 관광·레저 산업'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봉평면), 오대산 등도 유명하고, 애초에 동계 올림픽 개최지라는 것만으로도 모르는 국민들이 없다. 말 그대로 자국민 전체를 무시한 망언.유체이탈 화법

한반도기에서 독도를 빼라고 권고한 IOC에 불만이 있다거나, 평창올림픽 반대자들에게 '눈녹을 때까지 반성하라'고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등 공식 올림픽 중계에서 말하기에는 부적절한 발언을 너무 많이 했고 진행도 매끄럽지 못했다.

김미화에 옹호적인 친문 성향의 시청자들조차 '보기 거북했다'는 의견이 태반. 이 영향으로 MBC는 3사 중계방송 가운데 가장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개회식 해설 중계 방송에 아쉬움을 표현하는 기사가 많이 생겨났다.

거기에다 중계 중 아프리카권 선수를 향해 ' 구경을 못했을 것'이라는 인종차별적, 비하적 발언을 해서 논란이 일었다. 아프리카나 중동에도 눈이 내리고, 모로코나 남아공 등에는 스키 관광지도 있다[23]. 세계적인 대회인 올림픽은 마음대로 출전할 수 있는 대회도 아니며 출전하는 선수들은 빙상이건 설상이건 열심히 연습하고 준비해 나오는 대회다. 자국의 여건이 좋지 못하면 동계 스포츠 여건이 갖춰진 타국에서라도 훈련했을 것이므로, 눈이나 얼음 구경 한번도 못 했을리 만무하다. 사실상 실언 수준을 넘어 망언 수준이다. 마찬가지로 평창 올림픽 중계 중 여러 망언들로 구설수에 오른 NBC와 다르지 않다.

평창올림픽 중계 사과문

위 중계 비판과 관련하여 2월 11일에 그녀가 자신의 SNS에 사과문을 올렸다가 되려 다른 논란에 불을 당겼다. 아래는 사과문 전문.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더니 일베들의 악의적인 밤샘 조리돌림으로 일부 비난이 여론이 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이것조차 제 불찰입니다. 저를 아껴주시는 분들께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올림픽중계에 부족함이 있었음을 겸허히 인정하며 앞으로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김미화, 개막식 논란 공식 사과 "제 불찰…부족함 인정한다" [전문“]]

보통 가랑비를 맞아도 겉옷부터 젖는다.[24]

여기서 일베들의 악의적인 밤샘 조리돌림이라는 표현을 써서 가뜩이나 전문성 없는 중계를 시청하는데 짜증이 난 일반 시청자들까지 일간베스트 이용자로 치부하는 일기방패를 시전한 황당한 4과문이 됐다. 다르게 말해서, 만물일베설의 모범사례. 많은 사람들, 그 중 일베를 혐오하는 다른 사이트 이용자들조차도 그냥 사과해도 모자를 판국에 거기에 아무 상관없는 일베타령정신승리를 끼워넣고 있다면서 비판했다. 전형적인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 결국 오마이뉴스에서도 비판 기사가 나오면서 좌우 할 것 없이 까이고 있다. 관련기사

당연한 결과겠지만 네티즌들에게도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수천명의 사람들이 밤을 새가며 본인에 대한 악의적인 댓글을 달았다는 것인데, 스스로 무덤을 더 깊게 파고 있는 꼴이다. 본인에게 그 정도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다.

결국 다시 사과문을 SNS에 다시 올렸다.

부적절한 사과문으로 오히려 논란을 키웠습니다. 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깊은 사과드립니다. 선의의 쓴소리를 해주셨던 많은 분들께 실망을 안겨드려 죄송합니다. 이를 계기로 좀 더 반성하며 낮아지겠습니다.

괜히 부스럼을 만들어 블랙리스트의 피해자 방송인 이미지를 스스로 박살내면서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진짜로 방송에 부적합하고 인기가 없어서 못 나온게 맞는거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듣게되면서, 앞으로의 행보가 전 정권 때보다 더 힘들어질 가능성을 본인이 만들어냈다.

역시 SNS질은 인생의 낭비다 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산증인

"정치단체 위원장 낙하산 논란"

2018년에는 "동해북부선연결 공동위원장"을 맡아 낙하산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사단법인의 명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공공기관은 아니고, 정부 지원금을 받아 쓰는 정치단체로 보이는 곳의 위원장으로 추대된 듯하다. 심지어, 해당 단체에서는 '공동대표'를 300명(...) 선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30여년 연예활동 동안 여러 자선단체의 홍보대사는 셀 수 없이 맡아 왔지만, 거창한 위원장 감투는 이번에 처음 받았네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저 옛 영화에서처럼 기차 타고 북녁땅을 달리고 만주벌판과 시베리아 대륙을 가로질러 유럽까지 가보고 싶어서요. 낭만적이지 않아요? (한겨레신문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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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출생 당시에는 경기도 용인시 이다.
  • [2] 자기추천전형을 통해 01학번으로 입학했다.
  • [3] 김미화 본인도 자신이 수유리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과거에 몇번 이야기했기 때문에 거기서 태어나기도 한 걸로 알려져 있었다.
  • [4] 그러니 사실상의 고향을 따지자면 갓난 아기 때만 잠시 지냈던 출생지가 아니라, 이후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삶을 다 보낸 서울을 고향으로 보는게 맞긴 하다.
  • [5] 이와 비슷한 케이스로 사당동 빈민촌 출신인 배우 정우성이 있다.
  • [6] 혼외자녀는 서출로서 생모를 따로 기재할 수 있지만 본처를 생모로 기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 [7] 기존 문서에 '어머니가 재혼한 후 새 아버지(故 김원곤)와 성이 다르기 때문에 수치심을 겪는 등 여러 가지 힘겨운 경험을 했다고 한다.'가 서술되어 있었는데, 새아버지와 김미화의 성이 모두 김씨이므로 이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 확인, 부연 바람
  • [8] 잠시 개그맨 활동을 하다가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만화가 이정문과는 다른 사람으로 동명이인이다.
  • [9] 이들 중 <유쾌한 가족만세>는 제목만 바뀌었지, 실상은 <가족만세>와 다를 게 없다는 지적이 있었고(MC가 김미화,표인봉,정지영 아나운서) 결국 2003년 3월 3일부터 신정환이 새 남자 보조 MC로 투입되었지만 동시간대 KBS 2TV 주주클럽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여 그 해 봄 개편으로 막을 내렸으며 당시 이 프로그램 메인 사회자 박수홍, 보조 MC 윤정수가 <가족만세>와 경쟁한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공동 사회자였던 탓인지 김미화는 아픔이 두 배였는데 박수홍은 2001년 가을개편 때 KBS 2TV 쇼 파워비디오에서 김미화 후임(김경식) MC 물망에 한때 거론됐다
  • [10] 이라크 파병반대 시위는 2008년 자이툰 부대가 최종 철수할 때까지 이어졌다.
  • [11] 홍서범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임백천은 KBS 2TV 쇼 파워비디오에서 김미화와 공동 MC를 맡기도 했다
  • [12] 99년 9월 초부터 포맷을 정통 코미디로 바꾸면서 코너를 대폭 물갈이한 KBS 2TV 코미디 세상만사에 출연진 형식으로 복귀했으며 같은 시기에 신설된 KBS 2TV 개그 콘서트에도 나옴
  • [13] 2001년 5월 6일부터 진행을 맡아오다가 방송활동과 학업까지 병행하느라 스케줄 조절에 어려움을 겪어 그 해 11월 11일 방영분을 끝으로 하차.
  • [14] 2003년 2월 14일부터 2004년 2월 27일까지는 금요일 오후 5시 45분에 방송됐다
  • [15] 당시 이 프로그램 메인 사회자였던 송은이는 당초 토요일 오후 9시 45분에 방송되었으나 2001년 11월 10일 시작한 MBC 느낌표 때문에 시청률이 갈수록 떨어진 데 이어 김미화가 메인 MC로 활동한 SBS <웃는밤 좋은밤>이 인기 개그맨 캐스팅 실패 뿐 아니라 동시간대 3사 수요일 심야 시간대 최하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4회 만에 조기종영되자 이 프로그램 후속으로 2002년 3월 6일부터 이동 편성했으나 당시 메인 MC였던 남희석이 '웃는밤 좋은밤' 고정 게스트였던 사실이 알려진 점, 첫째 딸 출산 준비 등의 이유 탓인지 2001년 가을개편부터 공동 MC로 활동한 허수경과 함께 2002년 3월 13일 방송분을 끝으로 빠진 SBS <장미의 이름>에서 같은 달 20일부터 안선영과 공동 사회자로 투입되었지만 3사 수요일 심야 시간대 시청률 꼴찌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시간대를 변경한 지 4회 만에 2002년 봄 개편으로 프로그램이 막을 내려 '김혜수 플러스유' 이후 이어진 SBS의 수요일 심야 시간대 징크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16] 김미화가 2001년 봄 개편 때 KBS 복귀를 하면서 메인 MC로 활동한 프로그램에 속했던 <대발견 세상에 이런 법이>는 2000년 봄 개편부터 가을개편 전까지 진행한 <체험 삶의 현장> 등과 맞붙었는데 ‘출발! 마법전사’ 코너에서 개그맨 백재현과 제작진이 몰래카메라로 촬영을 하다가 공항 경찰들에게 적발당한 것을 첫 회(2001년 5월 6일) 방영분에 그대로 내보낸 것 뿐 아니라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MBC TV특종 놀라운 세상과 흡사하다는 비난을 사 시청률 부진을 면치 못했고 2001년 7월 17일부터 <퀴즈 정글>과 시간대를 맞바꿔 화요일 오후 6시 30분에 방송되었으나 김미화의 신변상 문제(학업(성균관대 사회복지학부 2001학번)까지 병행해온 것 외에도 2001년 10월부터 KBS 라디오 DJ로 발탁) 탓인지 그 해 가을개편으로 프로그램이 막을 내려야 했으며 김미화는 <퀴즈 정글>이 본인의 신변상 문제로 공중분해된 것 외에도 2001년 5월 6일 첫 회부터 공동 MC로 활동한 KBS 2TV 쇼 파워비디오에서도 같은 시기에 빠져 2002년 1월 이전까지 한동안 TV 진행자 활동이 뜸해졌다
  • [17] 결국 왕종근 김미화 후임으로는 원년멤버 조영남이경실이 복귀했는데 김미화는 이경실이 출산 준비로 자리를 비우게 되어 1999년 1월 4일부터 그 해 봄 개편 전까지 대체 MC를 맡았다.
  • [18] 68차 경연 참여.(가명: 소원을 말해봐 일출소녀)
  • [19] 메뉴판 문구에 이렇게 적혀있었다고 한다.
  • [20] 사실 이때가 유례없이 반미감정이 심하기도했고 이명박, 박근혜에대한 불신이 고조된 상태였기 때문에 진보좌파진영측이 목소리내기 유리한 상황이기도 했다. 문제는 진보좌파진영이 목소리를 낼땐 팩트대신 반미가 첨가된 감정팔이와 궤변을 주로 사용했다는 것.
  • [21] 강용석의 주장에 따르면 정부에서는 강정 주민 1500여 명 중 단 세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보상했으며(세 명이 보상을 반대) 보상 이후 전문 시위꾼들과 외부 선동세력들이 시위를 위하여 제주도로 주민등록을 이전해서 강정마을로 유입했다고 한다.
  • [22] 이외수는 돌에게도 생명이 있다면서 해군기지 설립을 반대했지만 정작 본인은 본인의 시를 마을의 큰 돌에다가 음각했다.
  • [23] 심지어 레바논도 눈은 온다.
  • [24] 조금씩 내리는 가랑비에 속까지 젖을 정도로 알게 모르게 너무 많이 맞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