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정보
|이름 = 김교성
|그림 =
|설명 =
|본명 =
|예명 =
|출생 = [[1904년]] [[8월 5일]]
|출생지 = [[한성부]]
|사망 = [[1961년]] [[2월 2일]]
|사망지 =
|장르 = [[트로트]],신민요
|활동시기 = [[1932년]] ~ [[1950년대]]
|관련활동 =
|웹사이트 =
|직업 =작곡가
}}
{| class="infobox bordered" style="width:21em; cellpadding=2; font-size:85%; text-align:center;"
! colspan="2" style="background:khaki" | 대표작
|-
| style="width:80%;" | 〈'''능수버들'''〉
| style="width:20%;" | [[1936년]]
|-
| 〈'''사막의 애상곡'''〉
| [[1939년]]
|-
| 〈'''마도로쓰 박'''〉
| [[1941년]]
|-
| 〈'''찔레꽃'''〉
| [[1942년]]
|-
| 〈'''울고 넘는 박달재'''〉
| [[1948년]]
|}
'''김교성'''(金敎聲, [[1904년]] [[8월 5일]] ~ [[1961년]] [[2월 2일]])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작곡가이다.
== 생애 ==
[[한성부]]에서 광산업을 하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가톨릭]] 교회를 통하여 합창단과 성극을 접하면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동학교]]에 다니던 학창 시절에 독학으로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편곡에도 재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초년기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30년]]을 즈음하여 배우이자 가수인 [[나품심]]과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정식으로 작곡가로 데뷔한 것은 [[1932년]]에 [[빅타레코드]]에서 [[강석연]]이 부른 〈영객〉, 〈서울행진곡〉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이애리수]]의 〈처녀 행진곡〉, [[강홍식]]의 〈삼수갑산〉, [[선우일선]]의 〈능수버들〉 등으로 이름을 얻었다.
최고의 히트작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 (1942년 노래)|찔레꽃]]〉이다. 고향을 그리는 가사 내용은 매우 애틋하지만 곡조와 창법이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곡으로, "한국인이 언제 어디서나 가장 즐겨 부르는 민족의 노래"라는 평이 있을 만큼 오래 사랑받았다.[{{뉴스 인용
|저자=이동순
|출판사=영남일보
|url=http://www.yeongnam.com/yeongnam/html/yeongnamdaily/culture/article.shtml?id=20071227.010190756390001
|제목=[이동순의 가요이야기 .21] '찔레꽃'에 망향의 恨 담아낸 백난아
|날짜=2007-12-27
|확인날짜=2008-07-16
}}]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도 〈[[울고 넘는 박달재]]〉와 〈자명고 사랑〉으로 1950년대까지 활발히 활동하면서 인기를 유지했다. [[태평레코드]] 시절부터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맡으며 백난아와 [[태성호]]를 발굴했고, [[박재홍 (가수)|박재홍]]과 [[박경원 (가수)|박경원]]도 김교성에게 발탁되어 가수가 되었다.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제목=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id={{ISBN|9788990626264}}
|페이지=26~27쪽
}}
== 각주 ==
[[분류:1904년 태어남]][[분류:1961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