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정보 |이름 = 김 바르바라 |출생일 = [[1805년]] |사망일 = [[1839년]] [[5월 27일]] |축일 = [[9월 20일]]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그림 = |크기 = |설명 = |사망지 = 서울 |직업 = 순교자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상징 = |수호 = |매장지 = |성당 = |기도 = }} '''김 바르바라'''(金巴巴拉, [[1805년]] ~ [[1839년]] [[5월 27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바르바라'''(Barbara)이다. [[성녀]] 김 바르바라는 [[감옥]]에서 [[질병]]으로 죽은 [[순교자]]들 중에 한 명이다. [[현석문 가롤로]]의 《[[기해일기]]》에 따르면, 60명 이상의 사람들이 감옥에서 [[고문]]과 [[질병]]으로 죽었다. 사실, 고문의 고통도 끔찍했지만, 매일의 수감 생활은 보다 더 심각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곳에는 온갖 종류의 고문을 견디며 용감히 신앙을 증언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결국 굶주림과 목마름 때문에 굴복했다. 고작 하루에 두 줌의 밥만이 배식된 죄수들은 종종 그들 밑에 깔려 있는 [[짚]]을 뜯어 먹었다. 또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작은 옥방에 수감되었으므로, [[질병]]이 생기고 빠르게 전염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후일에 [[순교자]]로 죽은 [[다블뤼]] [[주교]]는 감옥의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했다. {{인용문2|우리 천주교인들은 너무 빽빽히 수감되었기 때문에 다리를 펴고 자는 것 조차 하지 못하였다. 수감 생활의 고통에 비하면 고문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의 썩은 상처에서 풍기는 악취는 견딜 수 없었고 [[장티푸스]]가 발발해 몇 일 동안 여러 명이 사망하였다.}} 김 바르바라와 같은 사람들은 수감 생활의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였다. 감옥에서 그들은 [[망나니]]의 칼로부터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오래 살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 생애 == 김 바르바라는 [[경기도]]의 한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족은 [[천주교]]였지만, 매우 독실하지는 못하였다. 그녀는 13세 때, 한 부유한 천주교 집안인 [[황 마리아]]의 집에 [[하인]]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녀는 영적으로 [[하느님]]을 만났고 [[예수]]에 대한 그녀의 신앙심은 커져갔다. 그녀는 [[주 (기독교)|주]]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정직하며 근면하게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의 주의 영광을 깊히 깨닫고 [[동정 (성 문화)|동정]]으로 살기를 결심했다. 하루는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와 맺어줄 결혼 상대로 한 젊은 천주교 신자가 있다고 알려주러 왔다. 아버지가 딸에게 말했다. "매우 좋은 혼인 상대가 있는데, 우리는 이미 그 결혼에 동의했다. 그러니 너는 지금 시집갈 채비를 하거라." "저의 바람은 주님을 위하여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부부]]가 모두 신자라면 신앙 생활에 있어서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으며 이 결혼은 너에게 이로운 것이다. 그러니 고집부리지 말거라." 아버지의 말에 그녀는 그 결혼을 허락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실상 그녀의 남편은 이교도였고, 그를 개종시키려는 그녀의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그녀는 몇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의 딸만 [[세례]]를 받게 했다. 그 부부 사이에 신앙의 다름은 많은 어려움을 낳았고, 그러한 문제들은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이 죽은 뒤에야 그녀는 기도와 선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나라에 [[외국인]] [[사제]]가 입국하므로 인해, 그녀는 더 열렬하고 행복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녀는 [[1839년]] [[3월]]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지만, 배교하기와 교우들의 이름을 대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3개월의 수감 생활 동안, 고문과 굶주림, 목마름 그리고 질병을 견뎠다. [[1839년]] [[5월 27일]], 그녀는 [[장티푸스]]에 걸려 35세의 나이로 감옥의 더러운 [[멍석]] 위에 누워 숨을 거두었다. == 시복 · 시성 == 김 바르바라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뉴스 인용 | 제목 =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 url = http://www.pbc.co.kr/CMS/news/view_body.php?cid=520930&path=201407 | 출판사 = 평화방송 | 저자 = 이상도 | 날짜 = 2014-07-24 | 확인날짜 = 2014-10-12 }}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참고 문헌 == * {{언어링크|en}} [http://english.cbck.or.kr/Saints103/235 Catholic Bishop's Conference Of Korea. 103 Martryr Saints: 김 바르바라 Barbara Kim] == 각주 == {{각주}} [[분류:1805년 태어남]][[분류:1839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