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정보
|이름 = 기세훈
|원래 이름 =
|그림 =
|그림설명 =
|국가 = 대한민국
|직책 = [[서울고등법원]]장
|임기 = 1969년 9월 2일 ~ 1973년 3월 27일
|대통령 =
|총리 =
|전임 = [[민문기]]
|후임 = [[강안희]]
|직책2 =
|임기2 =
|전임2 =
|후임2 =
|출생일 = {{출생일과 만나이|1914|1|1}}
|출생지 =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시]]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2015|2|22|1914|1|1}}
|사망지 =
|본관 = [[행주 기씨|행주]]
|거주지 =
|정당 =
|내각 =
|소속기관 =
|부모 =
|배우자 =
|자녀 = 기백석(한양대 의대 명예교수)
기춘석(중앙대 의대 교수)
3녀
|학력 = 와세대 대학 법학부
|종교 =
|경력 = 서울가정법원장
청주지방법원장
[[광주고등법원]]장
사법연수원장
|별명 =
|서명 =
|서훈 =
|웹사이트 =
}}
'''기세훈'''(奇世勳, 1914년 ~ 2015년 2월 22일)은 [[대한민국]]의 [[서울고등법원]]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 생애 ==
기세훈은 1914년에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시]]에서 퇴계 [[이황]]과 함께 이기론을 이끌던 고봉 [[기대승]]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일본 와세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42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49년 광주지검 차장검사로 재직하며 [[여순사건]] 당시 좌익 누명을 쓴 박찬길 검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을 하다가[[http://news.donga.com/3/all/20150223/69759560/1]] [[서울지방법원]], [[광주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를 했다. 1954년부터 10여년간 역임한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서울가정법원장, 청주지방법원장, 법원 인사위원장을 지내고 광주고등법원장에 재직 중이던 1969년 9월 2일 서울고등법원장에 임명되어 1971년 신설되는 사법연수원장을 겸직하여 1973년까지 재직했다. 서울고등법원장에 재직할 때 '정권에 밉보인' 소속 판사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후 전국 153명의 판사가 집단사표를 내는 [[사법파동]]이 있었다. [[민복기]] 대법원장에게 "비장한 각오로 사법파동 해결 대책을 마련하라"고 말하면서 서울고등법원 전체 법관 명의로 사법권수호 결의문을 전달했다가 1973년 법관 발령에서 대법원 판사 8명과 함께 의원면직됐다. 서울고등법원장을 마치고 1973년 서울동부합동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개업하여 [[한승헌]] 변호사 등을 변호하면서도 2006년까지 주로 공증 업무를 담당하였다.
서울가정법원장으로 재직하던 1966년 6월 2일에 기세훈은 7세의 소녀를 죽인 12세의 소녀가 아동보호소에 보호 조치되었다가 탈출하여 사회문제가 되자 "현행법상으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제일 좋은 방법은 부모가 책임지고 선도해야 할 것이다"고 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060200209207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06-02&officeId=00020&pageNo=7&printNo=13728&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66년 6월 2일]]
1968년 2월 24일에는 대법원에 의해 [[주재황]] 대법원 판사, [[강안희]] 서울형사지방법원장과 함께 법원측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에 지명됐다.[경향신문 1968년 2월 24일]
재경 전남향우회 회장과 고봉학원 이사장을 맡았으며[동아일보 1989년 12월 28일자] ‘고봉의 문집과 번역’이라는 4권짜리 성리학 이론서를 펴내고 선조 때부터 내려온 광주광역시 소재 고택 ‘애일당(愛日堂)’에 학술원을 열고 학술지인 ‘전통과 현실’을 펴내며 고봉의 학문에 대해 연구했다.[[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91276] {{웨이백|url=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91276 |date=20180315005138 }}] 특히 고봉 [[기대승]] 문집 11책 1질을 다른 후손들과 함께 1971년 1월에 발간하였다.[동아일보 1971년 1월 14일]
1968년 5월 24일에 한국부인회가 보건사회부 후원으로 여성회관 강당에서 개최한 관혼상제 개선방안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혼인에 대한 개선 방안'을 주제로 강연하면서[매일경제 1968년 5월 21일자] 혼수 준비나 결혼식에는 최소한의 비용만 들이고 나머지 돈으로 신혼 부부가 살면서 고난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예금, 적금 통장이나 주권 등을 선물하는 실질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052800099203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8-05-28&officeId=00009&pageNo=3&printNo=677&publishType=00020 매일경제 1968년 5월 28일자]]기세훈은 서울고등법원장에 재직하던 1971년 7월 24일에 산악 전문지 '산' 독자들로 구성된 [[울릉도]]
[[성인봉]] 등반대회에 참가했으며[경향신문 1971년 7월 26일자] 1972년 2월 3일에 [[KBS]] <신혼 만세> 라는 프로그램에 배우자와 함께 출연하여 약혼 시절의 재미있는 경험을 털어놨다.[경향신문 1972년 2월 3일자]
인촌기념사업회가 1989년 12월 27일에 [[이희승]] 후임 이사장에 선출했으며 대한변호사협회가 개최한 제7회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가 열린 1995년 8월 11일에 "국선변호를 통한 형사 피고인의 인권 옹호에 앞장서고 무료변론, 무료법률상담 등 서민의 권리구제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제7회 한국법률문화상을 받은[동아일보 1995년 8월 12일자] 기세훈은 "법조인은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구도자"라면서 "권력이나 어떤 물질적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하면서 법조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행합일이라며 "후배들도 인권수호와 정의구현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95년 9월 3일자]
[[전남대학교]]는 1997년 2월에 "초대 법대학장을 지내며 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변호사 개업 후에는 무료변론과 장학사업을 하는 등 사회에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동아일보1997년 2월 27일]
== 각주 ==
[[분류:1914년 태어남]][[분류:2015년 죽음]][[분류:행주 기씨]][[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지방법원장]][[분류:대한민국의 고등법원장]][[분류:대한민국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