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정보 | 이름 = 권태술 | 원래 이름 = 權泰述 | 출생일 = [[1903년]] | 임기 = [[1930년]] [[5월 31일]] ~ [[1936년]] [[5월 31일]] | 총독 =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 군주 = [[쇼와 천황|히로히토]] (일본 군주) | 총리 = [[하마구치 오사치]] (일본 총리)
[[와카쓰키 레이지로]] (일본 총리)
[[다카하시 고레키요]] (일본 총리 권한대행 서리)
[[사이토 마코토]] (일본 총리)
[[오카다 게이스케]] (일본 총리)
[[히로타 고키]] (일본 총리)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 학력 = 일본 주오 대학교 법학과 | 직책 = 前 [[조선총독부]] 경성지방법원 예하 서기관
(前 朝鮮總督府 京城地方法院 隸下 書記官) | 직책2 = 前 [[만주국]] 신징지방경찰청 예하 서기관
(前 滿洲國 新京地方警察廳 隸下 書記官) | 임기2 = [[1936년]] [[6월 11일]] ~ [[1938년]] [[8월 26일]] | 군주2 = [[푸이]] (만주국 군주) | 총리2 = [[장징후이]] (만주국 총리) | 사망일 = ? | 소속 = 前 대한민국 서울 중구 구청장 | 정당 = [[무소속]] }} '''권태술'''(權泰述, 일본식 이름: '''야스히가시 마사유'''(安東正祐), [[1903년]] ~ ?)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며,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공무원이다. == 생애 == [[한성부]] 출신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에서 [[주오 대학|주오 대학교]] 법학과를 나온 그는 주오 대학교 법학과 학사 학위 후 관리가 되어 경성지방법원 서기로 일하는 등 사법 분야에 재직했다. 이후 [[만주국]]으로 건너가 만주국 수도 [[신징]]에서 신징지방경찰청 서기관 직과 만주국 사법부 대신관방 사무관을 지내는 등 사법관청에서 다년간 근무했다.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해 만주국이 사라진 뒤 서울로 돌아왔다. 권태술은 [[미군정]] 하에서 관리로 발탁되었다. 일본인들이 두고 간 재산을 처리하는 서울재산관리국 감찰서장을 거쳐 서울재산관리처장에 올라 재임하였다. 1948년 9월 이후 [[서울특별시|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중구]] 구청장을 맡고 있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실종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끌려간 것으로 여겨진다. {{웹 인용 |url=http://kwari.org/sub2a_info.php?num=225622 |제목=권태술 |출판사=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확인날짜=2008-06-15 }} 한국 전쟁 초기에 서울이 [[조선인민군]] 점령 하에 있을 때 실종된 민간인 10명과 공직자 5명의 가족이 [[2006년]]에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최초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권태술 가족도 이 가운데 포함되었다. {{뉴스 인용 |제목=6·25중 납북 가족, 정부에 첫 소송 - 납북돼 가는길… "어머니!" 소리쳤네 |출판사=조선일보 |저자=안준호 |날짜=2006-01-18 |쪽=A9면 }} 권태술 가족을 포함한 실종자 가족들은 실종자에 대한 국가유공자 지정과 배상급 지급을 요구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가운데 해외 부문에 선정되었다. == 참고자료 == * {{국사편찬위원회 인물|101_00814|권태술|權泰述}} == 각주 == {{토막글|정치인}} [[분류:1903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죽음]][[분류:만주국 관련자]][[분류:서울 중구]][[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주오 대학 동문]][[분류:납북자]]